첫 시집 <환상수족>에 이은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그로테스크한 환상의 이미지들로 기면증 환자의 악몽과도 같은 체험을 불안하고 강박적인 언어로 구현했다. 시인은 무겁지만 발랄한 글쓰기를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로 자신의 환상들을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은 열린 구조 안에 녹여내는 것이다.
소녀들이 물 속에 들어간다
은빛 비늘 조각들이 코를 찌르는
반짝이는 해변에는 기다란 하이힐을 신은 소나무들
양수에 잠겨 한나절
수평선부터 차츰 피가 번져왔다
소녀들은 혼비백산 피의 욕조에서 깨어나고
엄마들은 케이크 가게와 약국에 들러 파티를 준비하고
이리 나오렴!
가위에 눌린 소녀의 두 발이 물장구를 친다
소녀들이 앞다투어 뽀글거렸다
물결 속에서 밀어올려진 소녀 한 방울 튀어올랐다
붉은 지렁이들의 헹가래
끈적한 점액질의 검은 소나무밭 너머
엄마들이 은발로 짠 머플러를 두르고
해풍을 피해 생선을 다듬는 동안
봉긋봉긋 하늘이 부풀더니
소녀들은 돌고래처럼 솟구쳐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구름은 유두처럼 탱탱해졌고
소녀들은 물의 증거처럼 완성되었다
- ‘해변의 소녀들’, 이민하
당신이 툭, 깨뜨리기 전에
난 이미 깨질 만큼 깨졌다.
껍데기 안에 멍든 살이 고여 있지만
난 감각이 빠르다.
당신이 나를 지목하기 전에
내가 이미 당신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번들번들 때에 찌든 미끄럼틀.
당신이 이리저리 퍼뜨리기 전에
난 이미 퍼질 만큼 퍼졌다.
껍데기를 빼앗기고 바닥에 감염되었지만
난 용서가 빠르다.
허기진 새벽 프라이팬을 꺼내놓고 부산을 떨더니
기념품 가게를 지나 드라마 촬영장을 기웃, 새로 산 접시에 눈물을 촛농처럼 쏟고
계절의 네거리에 겨우 당도하지만
아래로 굳은 손가락,
너는 포크로 진화하지 못한 시간의 갈팡질팡.
휴지통에 버려진 상반신과 하반신을 용접하고
난 변신이 빠르다.
진짜 내 몸은 껍. 데. 기. 털갈이를 하듯
비워낸 내장을 새로 끼우기 위해
당신이 잘근잘근 씹기 전에
난 이미 씹을 만큼 씹었다.
땡볕에 익은 반숙의 살덩이를
개랑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 두 개의 혀.
당신이 지글지글 지지기 전에
내가 먼저 지질 만큼 지졌다. 짖을 만큼 짖었다.
- ‘개랑 프라이’, 이민하
물의 입술에 대고 말을 건다. 내 배꼽까지 샅샅이 만지던 입술. 동그란 배꼽에서 문드러지는 자둣빛 그대의 혀. 아가미 너덜대는 축축한 라디오.
주파수를 잃은 칠월의 계단은 겨드랑이마다 치직거리는 피어싱을 하고 지하에서 바다까지 달렸다.
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계단을 몸속에 접어 넣으며 숨을 고르고 있다. 서걱거리는 모래살점들을 풀어 말리는 해변.
그대의 입술에는 그대가 아직 못 만진 내가 있다. 내가 아직 못 만난 내가 있다. 나는 그것의 행방이 궁금하여 떠나지 못한 내 마을의 이방인. 숲과 언덕이 내 몸을 꾹꾹 누르며 다 지날 때까지 똬리를 틀고 천식을 앓는 우물 속의 뱀.
갈라진 두 개의 혀로 어둠의 속옷을 훔치고 더 많은 관음증이 쌓일 때까지 얼굴을 바닥에 문댄다. 죄가 재가 되도록 재가 새가 되도록
너덜너덜해진 얼굴을 기워 두래박 짠다. 불어터지는 자둣빛 나의 혀. 언니들이 도망간 축축한 인형가게.
나는 바람에 대고 말을 건다. 가만가만 비켜설 뿐인 공터의 탄력.
불타는 모래 위를 뛰어다니는
검은 발바닥의 오후.
- ‘누드’, 이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