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예상과 기대와 바람에 따라 사물에 대한 가치 평가는 지극히 달라진다. 우리에게는 사물의 가치를 일반화하는 능력이 있긴 하지만, 사물에는 절대적으로 ‘고정된’ 의미란 없다. 따라서 이 세계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선호이다.
사물에 부여되는 의미는 한결같지 않다. 누군가에게 중요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이의 욕구와 바람은 어른의 욕구와 바람과는 다르다. 사물은 우리가 품은 목표와 어떤 관련이 있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엄청나게 달라진다. 목표가 변하면 그 목표에 수반된 기대와 소망이 바뀌고, 의미도 변한다. 우리는 사물의 가치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사물을 개인 고유의 방식으로 경험한다.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와 기대하고 바라는 결과가 경험의 의미를 결정한다.
패러다임은 어떤 면에서 일종의 경기와 같다. 경기를 할지 말지는 선택 사항이지만 일단 경기에 돌입하면 사회가 인정하는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은 경기 규칙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만약 규칙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경기’가 된다. 축구 경기 방식을 놓고 다투는 아이들은 축구 경기가 아니라 일종의 철학을 하는 셈이 된다. 패러다임적 사고는 유한한 명제 체계로 무한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며, 궁극적으로 유한한 주제가 무한한 경험 대상(경험 주체를 포함)을 잠정적으로나마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연이어 일어나면 특정한 환상의 토대로 이루던 암묵적 전제가 흔들린다. 단지 그 환상뿐 아니라 ‘무너진 전제에 토대를 둔 수없이 많은 암묵적 환상’이 전부 흔들린다. 이렇게 전제가 흔들리면 기대가 깨지고 두려움과 희망이 솟으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시도로서 탐험이 시작된다. 새로운 환경에 관한 지도를 만들고 적절한 행동 양식을 찾아 새로운 환경에서 자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말이다. 옛 모형이 무너지면서 안정되었던 정서가 다시 요동치고 있다면, 탐험을 통해 질서를 재구축해야 한다.
전체주의적 교만은 겸손한 창조적 탐험에 맞서는 뿌리 깊은 악이다.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스스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 하는 미지가 존재한다는 점과 기존 지식을 수정하고 행동 양식을 바꿀 필요성을 인정한다. 이러한 겸손은 다소 역설적이긴 하지만 곧 용기이기도 하다. 스스로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곧 미지를 맞닥뜨리기 위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전체주의의 전제를 만들어 낸 ‘숨은’ 동기이다. 전체주의자는 두려움으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려 든다. 전체주의자는 애국심 속에 자신의 비겁함을 감추지만 결국 스스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거짓된 사람은 과거에 효과적이었던 행동 양식 및 해석 도식, 즉 과거의 도덕적 패러다임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경험을 이해하거나 새로운 욕망을 실현시킬 수 없음에도 기존 패러다임을 고수한다. 또 자기의 시선에 이례적으로 보이는 정보를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다시 말해서 거짓말쟁이는 자기만의 경기를 선택하고 자기만의 규칙을 정한 다음에 속임수를 쓴다. 이들은 성장하는 데 실패하며, 의식 과정 그 자체를 거부한다.
대개 거짓된 사람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지른다기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죄를 범한다(물론 적극적인 죄를 범하기도 한다). 이들은 탐험을 하고 기존 지식을 쇄신하는 데 일부러 실패한다.
집단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사람은 두려운 미지로부터 보호하고 사회 구성원으로 수용될 만한 인생을 산다. 이들의 노예 같은 삶의 방식은 집단을 강화한다. 그러나 집단이 수용하는 특정한 행동 양식과 신념 체계는 결코 미지의 영역과 개인의 잠재력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 집단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사람은 자신의 자연재해나 야만인이 아니며 일탈하거나 나약하거나 비겁하거나 열등하거나 복수심에 불타지 않는,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똑같이 죽은 사람)’ 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굳은 미소’라는 사회적 가면을 쓴다.
전체주의자의 잔인성은 질서가 병적으로 강화될 때 나타나는 정서적 결과이다. 생명의 물이 고갈된 삶에는 필연적으로 고통과 좌절에 끔찍한 권태가 더해지고, 더 나아가 질서가 점점 더 엄격해지면서 변칙이 늘어난다. 그러면 고통과 좌절과 무력감에 더하여 혼돈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다. 이처럼 부정적인 감정에 과도하게 시달린 사람에게는 앙심을 품고 잔인하게 행동할 이우가 충분히 있다. 전체주의자는 잔인하게 행동하려는 동기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정서 상태로 자신을 몰아간다.
오류는 만물의 어머니다. 따라서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못하면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험에서 매번 뒤로 물러서게 된다. 이렇듯 계속적응하지 못하면 미지는 머지않은 미래에 반드시 부정적인 얼굴로 다시 나타난다. 화경은 서서히 끊임없이 변하므로 여기에 적응하지 않으면 현실과 환상의 괴리가 커지고 해결하지 못 한 문제가 쌓여 간다. 완고하고 교만한 사람일수록 더욱 오랫동안 변화를 회피한다. 하지만 곧 미지가 그의 주위를 둘러싸서 더 이상 그것을 회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그 시점에 이르면 혼돈의 용이 지하 세계에서 등장해 그를 통째로 집어삼킨다. 그러면 그는 용의 배 속에서, 어둠 속에서, 지하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 환경에는 증오가 잦아들기 마련이다.
우리에게는 각자 자기 인생의 한계를 설정하는 사회적, 생물학적 조건이 있다.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심을 한결같이 좇을 줄 아는 사람은 자기만의 적절한 수단을 손에 넣어 한계를 초월한다. 의미는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본능이다. 의미를 저버리면 각자의 개성은 구원의 능력을 잃는다. 최악의 거짓말은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의미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의미를 부인하는 사람에게는 생에 대한 증오와 과거에 대한 욕망이 잦아들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