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기호학자이자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가 새 장정으로 재출간되었다. 이 책을 준비하기 위해 오컬트 관련서 천 여 권을 읽었다고 에코가 호언했듯이, 인간의 <의심을 멈추는 능력gt;의 극한을 보여주는 오컬트의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푸코의 진자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처음에는 추가 조금씩 방향을 바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자가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자신의 운동면을 유지하려는 추 아래에서 우리가 딛고 있는 지구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고, 바닥과 함께 움직이는 우리는 그 움직임을 느끼지 못한 채 눈앞의 진자가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장치가 기묘한 것은 보이지 않는 운동을 눈에 보이게 만든다는 데만 있지 않다. 무엇이 움직이고 무엇이 정지해 있는지를 판단하려면 언제나 어떤 위치에 서 있어야 하며, 그 위치 역시 세계의 운동 바깥에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까지 함께 드러내기 때문이다. <푸코의 진자>를 다 읽고 나서 나는 이 소설이 결국 그 불편한 사실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인간은 세계를 해석하면서 자신이 세계를 바라보는 자리만큼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에코는 그 믿음부터 흔들어버린다.
리아가 암호문으로 여겨지던 문서를 조사한 끝에 그것이 사실 평범한 물품 청구서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장면이 오래 남은 것도 그래서였다. 그 종이에는 처음부터 비밀이 숨어 있지 않았다. 먼저 비밀이 있으리라고 확신한 사람이 있었고, 그 확신이 숫자의 배열과 단어의 위치를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을 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단순히 문서를 잘못 읽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질서를 바깥에서 발견한 질서라고 믿었다.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관찰자가 진자의 방향이 변한다고 생각하듯, 자신의 해석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인간은 세계 쪽에서 의미가 다가오고 있다고 믿는다.
카소봉과 벨보, 디오탈레비가 만들어내는 ‘계획’은 바로 그 착각을 거대한 규모로 반복한다. 성당기사단과 카발라, 장미십자회와 각종 비밀결사의 역사는 원래부터 하나의 중심을 향해 배열되어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시대에서 생겨난 사건과 문서와 전승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세 사람은 그 사이에 선을 긋기 시작하고, 하나의 연결이 생길 때마다 또 다른 연결의 가능성이 열린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선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연결이 충분히 많아지자 그 선들이 어느 순간 지도의 무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도에 길이 그려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실제 땅에도 그 길이 있으리라고 믿기 시작하는 순간, 장난은 이미 끝난다. 만들어낸 질서를 발견한 질서로 착각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는다.
나는 이 지점에서 푸코의 진자가 오히려 그들의 사고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진실에 접근한다는 생각을 했다. 진자의 운동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철저하게 제한되어 있다. 중력과 관성이 그 운동을 붙들고 있고, 지구의 회전과 진자가 놓인 위치가 그 움직임이 나타나는 방식을 규정한다. 진자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는 까닭은 마음대로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대로 흔들릴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방향이 가능한 운동이라면 그 궤적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다. 어떤 움직임이 다른 움직임을 배제하고, 현실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나누어놓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의 운동은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계획’이 만들어지는 동안 카소봉 일행의 해석에서는 바로 그 제약이 하나씩 사라진다. 어떤 숫자가 맞아떨어지면 연결의 증거가 되고, 맞지 않으면 누군가 일부러 흔적을 지웠다는 증거가 된다. 기록이 남아 있으면 비밀의 흔적이고, 기록이 없으면 은폐의 흔적이다. 누군가 인정하면 내부자의 고백이 되고, 부정하면 더욱 깊은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 된다. 현실이 어떤 대답을 내놓더라도 해석이 자신을 수정할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 생각은 더 이상 깊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과의 접촉을 잃고 끝없이 자신만을 증식하기 시작한다. 의미가 다른 의미를 낳고, 그 의미가 다시 새로운 기호를 불러들이면서, 사유에는 더 이상 그것을 아래로 끌어당길 중력이 남지 않는다.
그래서 <푸코의 진자>에서 음모론의 문제는 단순히 틀린 사실을 믿는 데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더 근본적으로는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어떤 이론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이론을 틀렸다고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이론은 세계를 설명하지 못한다. 세계가 그것을 거부할 가능성까지 미리 설명 속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구조가 일종의 완벽한 밀폐와 닮았다고 느꼈다. 바깥으로 통하는 모든 문을 잠그면 안쪽의 질서는 더 완전해 보이지만, 동시에 그 공간 안에는 더 이상 새로운 공기가 들어올 수 없다. 음모론은 세계를 너무 완벽하게 설명한 나머지 세계를 잃어버리는 사고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렇게까지 닫힌 설명을 원하는 것일까. 단순히 무지해서라고 말하기에는 이 소설 속 인물들이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다. 오히려 그들의 지식이 많기 때문에 더 많은 점을 발견하고, 더 많은 점을 발견하기 때문에 더 많은 선을 그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의 문제가 지식의 부족보다는 우연을 견디지 못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사건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좀처럼 만족하지 않는다. 그 원인 뒤에 다시 의도를 세우고 싶어 한다. 어떤 일이 우연히 벌어졌고, 서로 닮은 두 사건이 아무 관계도 없으며, 역사가 수많은 욕망과 실수와 실패가 겹쳐진 결과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이상할 만큼 견디기 어렵다. 우연에는 책임질 사람이 없고, 이야기를 완성해줄 마지막 문장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모론은 공포이면서 동시에 위안이 된다. 누군가 세계를 조종하고 있다는 믿음은 끔찍하지만, 적어도 그 세계에는 중심이 있다. 사건들은 제멋대로 흩어져 있지 않고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하나의 방향으로 끌려간다. 악의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상상은 절망적이지만, 아무 의지도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는 오히려 견디기 쉽다. 어쩌면 인간이 끝내 두려워하는 것은 악이 아니라 우연이며, 음모론은 혼돈을 견디지 못한 인간이 우연에 의지를 부여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잡고 있지 않은 줄의 끝에 누군가의 손을 상상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사는 세계가 완전히 무심하지는 않다고 믿을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계획’이 끊임없이 찾으려 하는 세계의 중심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어줄 하나의 궁극적인 관점에 가깝다. 그 자리에서 바라보기만 하면 흩어진 사건들이 정렬되고, 모순처럼 보이던 것들이 하나의 거대한 의도 안에서 제 위치를 찾으리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푸코의 진자가 다시 돌아온다. 진자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세계의 운동을 판단할 수 있는 초월적인 관측소가 아니라, 관찰자 자신도 이미 움직이는 세계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지구 밖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듯 역사를 바라볼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잇고 어떤 연결을 발견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이미 특정한 시대와 언어와 욕망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세계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시선을 얻었다고 믿는 순간, 오히려 자신이 서 있는 바닥의 움직임부터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글리에를 비롯한 사람들이 ‘계획’을 실제로 믿기 시작한 뒤의 이야기는 단순한 오해의 비극보다 훨씬 불편하다. 애초에 그런 계획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존재하지 않던 것은 현실 속에서 실제 효과를 갖는다. 허구가 추적을 낳고, 추적이 폭력을 낳으며, 마침내 죽음까지 만들어낸다. 이때 거짓과 현실의 경계는 이상하게 뒤틀린다. 계획은 여전히 거짓이지만 그 계획 때문에 죽은 사람의 죽음까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지도라도 누군가가 그것을 믿고 절벽을 향해 걸어간다면, 지도 속의 길은 허구인 채로 현실의 추락을 만들어낼 수 있다. 기호가 현실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그 기호를 따라 움직이는 순간 기호는 현실에 힘을 가하기 시작한다.
벨보가 결국 푸코의 진자에 매달려 죽는 장면에서 나는 그 모든 사유가 갑자기 물질의 세계로 추락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전까지 소설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은 끝없이 다른 것을 가리키는 기호들이었다. 숫자는 다른 숫자로 넘어가고, 이름은 또 다른 이름을 호출하며, 하나의 사건은 더 깊은 사건의 징후가 된다. 무엇 하나 자기 자신으로 머물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 바깥을 가리킨다. 그런데 벨보의 몸이 진자에 매달리는 순간, 그 무한한 기호의 연쇄 속으로 갑자기 한 인간의 실제 무게가 들어온다. 그의 몸은 무엇을 상징하기 전에 먼저 무겁고, 그 무게는 중력에 붙들린다.
나는 이 장면에서야 비로소 소설 속 물리학과 철학이 완전히 겹쳐진다고 느꼈다. 카소봉 일행의 해석은 현실의 중력을 잃어버린 채 끝없이 바깥으로 뻗어갔지만, 벨보의 몸은 끝내 중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이 만든 ‘계획’은 수백 년의 역사와 우주의 비밀까지 자유롭게 넘나들었지만, 마지막 순간 벨보를 죽이는 것은 어떤 상징적인 힘도 아니라 그의 목에 걸린 밧줄과 몸의 무게다. 의미가 가장 멀리 부풀어 오른 순간, 물질이 돌아와 그 모든 의미를 단숨에 끊어버린다. 존재하지 않는 비밀이 사람을 죽였지만, 죽음만큼은 은유가 아니다.
그래서 마지막의 “말쿠트는 말쿠트다”라는 문장은 그 뒤에 남은 잔해를 바라보는 말처럼 느껴졌다. 말쿠트는 가장 낮은 곳, 가장 물질적인 현실과 맞닿아 있는 세피라다. 처음에는 이 문장이 모든 신비주의적 탐색 끝에 도착한 허무한 동어반복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했다. 말쿠트가 말쿠트라는 것은 세계에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반드시 자기 바깥의 무엇인가를 의미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에 가깝다. 돌은 비밀을 숨긴 기호이기 전에 돌이고, 숫자는 암호가 되기 전에 숫자이며, 우연은 어떤 거대한 계획의 흔적이 되기 전에 그저 우연일 수 있다. 사물을 자기 자신으로 남겨두는 일은 사유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사유가 세계 전체를 삼켜버리지 못하도록 세계에게 마지막 저항권을 돌려주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푸코의 진자>는 해석을 경계하는 소설이 아니라 해석의 중력을 묻는 소설처럼 보인다. 생각은 얼마든지 멀리 흔들릴 수 있고, 하나의 기호에서 다른 기호로 건너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운동이 다시 현실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사유는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유하기 시작한다. 깊이는 계속 아래로 파내려가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삽 끝에 닿은 단단한 층을 인정하는 데서 생길 수도 있다. 무엇인가가 내 해석에 저항할 때 그 저항을 또 하나의 암호로 바꾸지 않고, 내가 틀렸을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 어쩌면 사유의 깊이는 의미를 얼마나 멀리 확장할 수 있는가보다 어디에서 자신의 확장을 멈출 수 있는가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푸코의 진자는 아무런 계시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하지도 않고, 모든 운동의 비밀을 품고 있다고 속삭이지도 않는다. 그저 제한된 법칙 안에서 흔들리면서 우리가 고정되어 있다고 믿었던 바닥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결국 진자가 보여주는 것은 세계의 비밀이라기보다 인간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의 한계다. 내가 세계를 읽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나는 이미 세계와 함께 움직이고 있으며, 내가 발견했다고 믿은 선 가운데 일부는 어쩌면 세계가 아니라 내 손이 그어놓은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을 덮고 난 뒤 내게 남은 것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계보다 자신의 해석을 먼저 의심해야 한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세계가 지나치게 완벽하게 설명되는 순간, 우연까지 하나의 의도로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모든 반박이 다시 믿음의 증거가 되는 순간에는 어쩌면 진실에 가까워진 것이 아니라 현실의 중력에서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 수도 있다.
말쿠트는 말쿠트다. 진자는 흔들리고, 지구는 돈다. 그리고 인간이 아무리 많은 의미를 그 위에 올려놓더라도 세계는 끝내 그 모든 해석보다 조금 더 무겁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