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우리 쪽에 서 있다
우리와 함께 분노하고
발구르며 노래하고
저들을 향해 함께 돌팔매질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는 곳은
우리네의 산동네가 아니다
산비알에 위태롭게 붙은 누게집이 아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찌그러진 알루미늄 밥상 위의
퉁퉁 불은 라면과 누랑물든 단무지가 아니다
병든 아내와 집 나간 딸애의 편지가 아니다
온갖 안락과 행복이 김처럼 서린 식탁에서
그들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들의 불행과 가난을 탄식하지만
포도주 향기 그윽한 벽난로 위에
우리의 찌든 삶은
한 폭의 벽화가 되어 걸린다
그들의 아들딸이 박힌 위국의 풍경 옆에
초라한 한 폭 벽화가 되어 걸린다
그들은 우리 쪽에 서 있지만
함께 분노하고 발구르며 노래하지만
함께 노래하며 돌팔매질하지만
- ‘벽화’,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가난한 사랑노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신경림
이름은 그럴 듯해서 미니 슈퍼마켓
라면봉지와 화장지가 쌓인
진열대 위에는 먼지가 뽀얗다.
돈궤에서 천 원짜리 두어 장 들고 나가면
사내 저물도록 소식이 없고
아낙은 대낮부터 고스톱판을 벌인다.
가게 앞 빈터에는 진종일 손님 대신
싸구려외치는 어물차에 잡화차
그래도 정월이래서 돌산에서는
마당쇠 쇠가락소리 흥겹구나.
어두워져 아낙 판 치우고 나가보면
그때서야 언덕길 비틀대는 내 사내
한숨 같은 울음 같은 어깨 위로
쟁반 같은 놋쟁반 같은 달이 뜬다.
싸움질 사랑질로 얼룩진 산동네를
놀리면서 비웃으면서 대보름달이 뜬다.
- ‘망월’, 신경림
지금쯤 물거리 한 짐 해놓고
냇가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볼 시간••••••
시골에서 내몰리고 서울에서도 떠밀려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에겐 옛날밖에 없다
지금쯤 아이들 신작로에 몰려
갈갬질치며 고추잠자리 잡을 시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로 외쳐대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몸짓으로 발버둥치다
지친 다리 끄는 오르막에서 바라보면
너덜대는 지붕 위에 갈구렁달이 걸렸구나
시들고 찌든 우리들의 얼굴이 걸렸구나
- ‘갈구렁달’, 신경림
지난해와 또 지지난해와도 같은 얼굴들
오년 전 십년 전과도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
밖에는 모진 바람이 불고
창에 와 얼어붙는 영하 십오도의 추위
언 손들을 마주잡고
수수깡처럼 야윈 어깨들을 얼싸안고
우리는 이기리라 맹세하지만
똑같은 노래 똑같은 아우성으로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다고 다짐하지만
온몸에 달라붙을 찬바람이 두렵구나
손을 펴본다 달빛에 파랗게 언 손을
다시 주먹을 쥐어본다
마른 나뭇잎처럼 핏기 없는 두 주먹을
- ‘추운 날’, 신경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