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열음을 내며 나는 찢어졌지만
허공은 비명을 삼켜버렸다
찢긴 선을 따라 물과 기름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그 길고 가느다란 선이
고통의 성감대라고 믿는 편이다
나를 찢어버린 손은 누구의 것인가
2
나는 이제 해변의 모래가 아니다
누군가의 신발에 흘러들거나
기계에 끼어들어가 비명을 지른다
세계를 버석거리게 하고
덜컥거리게 하고
작은 흠집을 남기거나
때로 기계를 멈추게 할 수도 있다
한 알의 모래로서
3
투명함에서 조금씩 해방되는 중이다
흙먼지와 함께 보푸라기와 함께
하루하루 무디어지면서
한때 날카로운 칼날처럼 빛을 낼 때도 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
깨지지 않는다
아무도 유릿조각을 줍지 않는다
- ‘조각들’, 나희덕
거리에서 말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꼈던 니체처럼
자신이 왜 우는지도 알 수 없으면서
무작정 울고 싶을 때는
살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을 때는
삶이라는 마부의 채찍을 빼앗아 던져버리고 싶을 때는
어찌해야 하나
마부의 말을 듣지 않는 것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 것
탁한 물과 시든 먹이를 삼키지 않는 것
점점 정물에 가까워지는 것
그것만으로 부족할 때는
어찌해야 하나
뜨거운 감자알을 쪼개먹으며
나무좀이 운명을 갉아먹는 소리를 듣는 날에는
그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는 날에는
우물이 말라버리고
땔감과 기름이 떨어져버린 날에는
도무지 어찌해야 하나
바람 속 지푸라기처럼 떠나는 것
그러나 출구를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
점점 나빠지는 세상을 향해 문을 닫는 것
여섯째 날의 어둠을 받아들이는 것
어둠을 끝까지 응시하는 것
날감자를 쥐고
날감자를 쥐고
- ‘토리노의 말’, 나희덕
ㅡ누구를 기다리고 있나요?
ㅡ우리 아이요.
ㅡ이 차가운 바람 속에 언제까지 계시려고요?
ㅡ주검이라도 기다려야지요.
ㅡ이제는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을 텐데요.
ㅡ그래도 여길 떠날 수는 없어요.
제발, 아이 장례만이라도 치르고 싶어요.
사고 197일 만에 황지현 돌아옴.
14번의 수색 끝에 발견함.
4층 여자화장실.
18번째 생일.
255번째 장례식.
한 민간 잠수사는 손목에 자해를 했다
ㅡ문득문득 견딜 수가 없어요.
손목에 벌레가 스멀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구조를 도왔던 트럭 운전사는 자살을 시도했다
ㅡ눈,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라요.
배에 남아 있던 유리창 너머 눈동자가.
친구를 남겨둔 채 구조된 아이는 울면서 말했다
ㅡ내가 죽을 때까지•••••• 허제강 생일이 내 생일이에요.
ㅡ무엇을 잃었습니까?
ㅡ모든 걸 잃었어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요.
ㅡ아이를 기다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나요?
ㅡ울기만 했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밥을 먹고 출근을 했다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나희덕
방금 배달된 장미 한 다발
장미는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
설마 이 꽃들이 케냐에서부터 온 것은 아니겠지
장미 한 다발은
기나긴 탄소 발자국을 남겼다, 주로 고속도로에
장미를 자르고 다듬던 손목들을 떠나
냉동트럭에 실려오는 동안
피우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누르다
도매상가에 도착해서 서둘러 피어나는 꽃들
도시의 사람들은
장미 향기에 섞인 휘발유 냄새를 눈치채지 못한다
한 송이 장미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봄부터 소쩍새가 아니라
7에서 13리터의 물이 필요하단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휘발유가 필요하겠지
스무 송이의 자연
조각난 향기
피어나기가 무섭게 말라가는 꽃잎들
퇴비 더미가 아니라 소각장에 던져질 장미 한 다발
오늘은 보이지 않는 탄소 발자국을 따라가보자
한 다발의 장미가 피고 질 때까지
- ‘장미는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 나희덕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그렇다고 제가 나폴레옹처럼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불가능들로 넘쳐나지요
오죽하면 제가 가능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냈겠습니까
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이 시대에 말입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산산조각난 꿈들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하나요
부러진 척추를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이빨과 발톱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찢긴 살과 혈관 속에 남아 있는
이 핏기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
- ‘가능주의자’, 나희덕
언제 헤어졌느냐는 질문에
그들이 헤어진 시점을 정확히 말하기는 쉽지 않다
정말 헤어진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척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헤어진 척하다가 결국 헤어진 사람들도 있고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사람들도 있고
무심코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결혼에서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법원에 접수된 서류와
그가 마지막으로 열고 나간 문의 침묵 사이에는
꽤 긴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길에서 그와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못 본 척 스쳐가는 몇 초가 아주 길게 느껴졌다고
결코 무심할 수 없는 순간이었지만
아릿한 슬픔을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고
종이 위의 결별과
길 위의 결별 사이에는
또 얼마나 많은 밤들이 들어차 있는지
기억과 일치하지 않는 변명
때늦은 사과의 말
예의란 헤어진 뒤에 더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언제 헤어졌느냐는 질문에
손에서 으깨진 나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한다
찢긴 날개에 대해서는
진액과 인편으로 더러워진 손가락에 대해서는
그날의 나비와 오후의 햇빛에 대해서는
- ‘이별의 시점’, 나희덕
달력 속에서
마지막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몸이 반쯤 잠긴 물속에서
아니다
그는 물에서 걸어나오는 게 아니라
잠기고 있는 중이다
뜯어낸 열한 장의 시간이, 물이,
고통의 비등점을 지나 물이 된 기억들이 밀려와
방안에 울컥울컥 차오른다
두 다리가 지워지고 두 팔이 지워지고
마침내 물이 그를 삼킬 때까지
그는 물을 건너려 하지만 끝내 건너지 못한다
머지않아 찢겨나갈 뿐
멀리 방파제에 혼자 서 있는 사람
그가 건너려는 것은
방인지 바다인지 시간인지 끝내 죽음인지
물에서 걸어나오는,
물에 천천히 잠겨가는 그를 바라본다
아, 그는 춥지 않는가
- ‘건너다’, 나희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