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소통, 참여가 만들어낸 ‘멋진 신세계’. 연결시킬 뿐 책임지지 않는다! 소셜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위험하고도 양극화된 현재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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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온난화 (더 많은 사람들이 연결될수록 세상이 나아진다는 실체와 착각) 내용 요약
우리는 지금 전례 없는 '연결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손안의 스마트폰 하나로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 세상은 더욱 평화로워지고 정보의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던 초기 인터넷의 낙관론은 오늘날 어떤 현실을 마주하고 있을까요? 저자 찰스 아서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연결될수록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사실은 거대한 착각이었음을 날카롭게 파헤칩
소셜미디어는 실제 세상과 닮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담겨 있는 왜곡을 우리는 보려 하지 않습니다. 인터넷 콘텐츠와 댓글들이 다투는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진부해져버린 측정값이 있는데요, 1:9:90 법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명이 콘텐츠를 만들고 아홉 명이 거기에 댓글을 달면 아흔 명은 보기만 합니다. 댓글만 다는 사람들의 비율이 실제로는 더 높지만(1:9:9990에 좀 더 가깝습니다.) 우리가 온라인에서 목격하는 논의들이 얼마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수치입니다. 뭔가를 읽거나 본 사람들 모두가 저마다 댓글을 단다면 모든 사이트가 엄청나게 많은 댓글을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댓글들은 대개 시시한 견해 아니면 극단적인 견해로 채워지고 사람들은 시시한 댓글은 대충 보고 넘어갑니다. 그 결과 우리 눈앞엣는 극단적인인 내용이 한가득 펼져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극단적인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이 책에서 설명하겠지만, 극적인 내용에 끌리는 것도, 그런 콘텐츠가 실제 세상보다 온라인에 더 흔해 보이는 것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뉴스피드는 그 창조자들이 바라던 바를 이루어냈다. 즉 사람들이 원하는 콘텐츠를 찾는 일이 훨씬 더 쉬워졌다. 하지만 2006년 9월에 에지랭크가 도입되면서 대부분의 페이스북 사용자들은 익숙해져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불만을 가졌던 것들이 확 바뀌었다. 친구들의 활동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눈에 띄었다. 이전보다 더 침범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두 사람이 방금 페이스북 친구를 맺으면 둘 중 하나가 어떤 tv 프로그램을 좋아한다거나 다른 하나가 결혼/연애 상태를 ‘싱글’로 바꾸자마자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초기 사용자들이 이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사회학자 대너 보이드는 이 변화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페이스북은 내게 무한대의 가십이라는 ‘선물’을 건네고 있지만 나는 그 선물을 받고 싶지 않다. (중략) 페이스북은 뉴스피드가 생활의 일부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서글퍼진다. 나는 그들이 왜 그걸 제공하고 싶어하는지 알겠고, 어떤 사용자들이 솔깃해하는지도 알겠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유해하고 [또한] 사회적인 갈등을 일으킨다. (중략) 그게 조작 될 거라는 생각도 든다.”
“트위터의 관점에서 보면 ‘참여’는 좋은 겁니다.” 매클루어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트윗에 코멘트를 달아 리트윗을 하고 답글을 달고 또 다른 반응을 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 사이트를 이용하는 사람들, 그리고 아마도 즐겨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테니까요. [하지만] 바이럴되는 트윗을 직접 올린 사람에게는 지랄맞은 일이죠.”
매클루어가 찾아낸 바에 따르면 답글 약 100개라는 문턱이 있는 것 같았다. 일단 어떤 트윗이 많은 반응을 얻었다면 “트위터의 어떤 알고리듬이 나타나서 ‘내가 이 트윗을 더 많은 사람들이게 보여줘야겠어!’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트윗을 보여줍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 당신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죠.” 매클루어의 트윗이 어떤 내용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상해보라. 매클루어의 말대로 정치적인 이야기를 했거나 남성 아이돌에 대한 의견을 냈다면 어땠을지. “그렇게 보면 트위터가 완전히 무관한 사람들 보라고 트윗을 끌어올리는 건 집단 괴롭힘이나 다름없죠.” 매클루어의 말이다. “오로지 부정적으로 참여할 커뮤니티에서만 인용 리트윗이 퍼져 나간다는 뜻이니까요.”
또 다른 문제는 톱니효과(시계태엽을 감는 톱니바퀴 장치가 한 쪽 방향으로만 회전하는 특징을 따서, 어떤 일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면 역방향을 되돌리기 어려워지는 상태를 말한다)였다. 즉 누군가가 토끼굴에 빠지고 나면 기어 올라올 가능성이 별로 없다. 일단 어떤 음모론을 믿기 시작한 사람은 바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사실이 아니라는 데 점점 더 설득된다. 유튜브에서 그런 견해를 강화하는 동영상을 점점 더 많이 보게 된다. 게다가 사람들 간의 거리를 허물어뜨리는 인터넷의 능력 때문에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서로 온라인에서 찾을 수 있고, 따라서 현실에 맞닥뜨려도 그 같은 믿음을 지탱할 수 있다. 인터넷 이전에는 음모론을 지속해나가기가 훨씬 더 어려웠다. 음모론 지지자들이 자기 생각에 동의하는 다른 사람들을 잘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온라인 세상에서는 - 양치기 개가 양떼를 몰고 가듯이 잘 속는 사람들을 한데 몰아넣는 알고리듬이 거들기 때문에 - 음모론을 피할 수 없다. 음모론에 대한 확신이 커지는 것 자체가 소셜 온난화, 즉 알고리듬 시스템이 가져온 달갑지 않은 부작용의 한 형태다.
온라인에서는 ‘화내기’가 쉽고 대개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온라인에서는 도널드 트럼프나 보리스 존슨을 바보 천치라고 부른다 한들 그들이 당신을 쫒아오겠는가? 크로켓이 언급한 대로,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실제로 화를 내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인적 없는 거리에서 낯선 사람에게 망신을 주는 건 트위터에서 수 천명의 군중에 합류하는 일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자동차 운전자는 가던 길을 되돌아와 당신에게 맞장을 뜰지도 모른다. 개를 산책시키던 사람이 공격적으로 돌변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소셜 네트워크에서 혼자가 아니다. 게다가 크로켓이 지적했듯이 “특정 지역, 시간대 [실제로] 범죄자들을 마주칠 가능성 등으로 제약을 받지도 않는다.” 또 그런 범죄자들의 반응을 걱정하지도 않는다. 특히 소셜미디어에서는 계정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드러나지 않는다. 아바타의 픽셀로 표현되는 누군가에게 망신을 주는 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망신시키는 것보다 감정적인 소모가 훨씬 적다.
그리하여 어떤 일이 일어날까? 도덕적 분노를 담은 콘텐츠를 공유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마음 놓고 “이것 좀 봐. 끔찍한 일도 다 있네!”라는 말로 자신의 순수성을 강조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뉴욕대학교의 한 연구팀은 미국인들이 양극화 성향을 보이는 세 가지 주제(총기 규제, 동성 결혼, 기후변화)에 관한 50만 개 이상의 트윗을 조사해서 2017년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싸움’ ‘탐욕’ ‘사악함’ ‘망신’ ‘호전적’ 같은 ‘도덕적-감정적’ 단어를 사용할 경우 단어 하나마다 30퍼센트씩 트윗이 멀리 퍼져 나갔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기 부족에서 사람들을 쫒아낼 필요가 거의 없는데도, 도덕적 분노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감정을 불러내려는 충동은 억제되지 않는다.
BBC 연구 조사에서는 왓츠앱 사용자들에게 어떻게 그리고 왜 끔찍한 콘텐츠를 사실 여부 확인도 없이 공유했는지 물었다. 연구자들이 기록한 답은 다음과 같았다. “이제 뉴스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을 알려주는지’보다 ‘어떤 기분이 들게 하는지’이다.” 더구나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중요한 뭔가를 찾았다면 그게 바로 뉴스였다.
사람들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부합하는 황당한 주장은 믿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주장은 불신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 “결국 시민들이 메신저 앱과 소셜미디어에서 주로 하는 일은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토론이 아니다.” BBC연구자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사실상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 체계가 타당하다는 걸 확인하려는 것이다.”
트위터는 초보적이지만 단호한 급습에 대비하지 못한 채로 점령되었다. 아랍의 봄 시위 참여자들이 중동 정부에 반기를 들 기회를 주었던 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이 이번에는 익명의 사용자들이 소수의 유명인이나 미디어(이들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적으로 열세인 격렬한 논쟁에 휘말렸다)를 저격하게 만들어주었다는 뜻이라고 MIT와 미시간 주립대학교 연구자들은 지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트위터는 속수무책이었다. 휘말린 사람들은 플랫폼을 떠날 수도 없었고 엄청난 시간을 들여서 사람들을 막아낼 수도 없었다. “자유발언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표현의 자유 편을 들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트위터는 성차별 학대가 벌어질 때 성차별 가해자 편에 이용될 가능성에 노출되었다.
트위터를 떠나고 나서 4년 동안 외부에서 지켜본 뒤어야 웨더렐은 리트윗 기능이 대응책 없는 무기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개인이 자신을 겨냥한 다른 누군가의 말이 리트윗되지 않도록 수백수천 개의 다른 계정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을 이해하려는 반응은 네트워크 전체에서 벌어지는 리트윗 반응에 파묻혀버릴 것이므로 대화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자신이 구축을 거들었던 기능 때문에 ‘집중 포화’ - 다른 생각을 잠재우려는 목적 또는 인터넷에 거짓을 요란하게 올려서 누군가의 평판을 망가뜨리려는 목적으로 일제히 나서는 행위 - 가 가능해졌다는 생각이 웨더렐을 괴롭혔다.
분노를 동반한 참여는 때로 걷잡을 수 없는 통제 불능 상태가 된다. 2017년에 ‘영 어덜트YA’ 분야의 데뷔 소설 한 편이 출간되기도 전에 트위터 폭풍에 휘말렸다. YA분야는 대단히 경쟁적인 시장으로, 거기서 히트를 치면 성인 독자에게도 관심을 끌면서 성공으로 이어진다. 해리포터와 시리즈도 처음에는 ‘YA’소설로 인기를 얻었다. 브루클린에서 활동하는 제시 싱걸이라는 기자는 트위터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집단 공격 - 하나의 트윗 또는 트위터리안이 공개 망신을 당하도록 내걸렸고 더욱 격렬한, 비유적 의미에서의 돌팔매질을 불러들였다 - 을 어이없이 지켜보고 문서로 기록했다.(그리고 자신도 집단 공격을 당했다) 비판적인 내용의 사전 서평이 어떤 블로그에 올라가면서 책의 작가인 로리 포리스트는 폭풍에 휩쓸렸다. 그 블로거는 “읽어본 책 중에서 가장 위험하고 공격적”이라며 작가를 비난했다. 책에서 지지하는 사상이 지나치게 과격하다는 뜻이 아니었는데도 인종에 따라 불평등하게 나뉜 사회를 공고히 하는 내용처럼 느껴졌다. 표면적으로는 마녀에 대한 이야기이긴 했다. (책 제목이 였다.) 분노의 바퀴가 돌아가자 600쪽 가까이 되는 책을 읽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작가가 표절을 했다고 비난했다. 싱걸이 그 사람에게 표절의 예를 들어달라고 요청하자 에서 한 문장을 가져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한 문장은 뭐였을까? “내가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가지마.” 단 일곱 어절이었다.
구소련 법정에서처럼 유죄가 확정되었고 오로지 범죄를 입증하기만 하면 되었다.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YA 트위터’는 자신들이 그 책을 싫어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부를 읽어볼 필요도 없었다. 더구나 그 책은 출간되어서는 안 되었으니까.
“이제 소셜미디어에는 문턱이 없습니다.” 윌슨의 말이다. “예전에는 수백만 명에게 소식을 전하려면 대형 언론사를 소유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히제는 트위터 계정만 있으면 되죠. 그리고 점점 극단적으로 행동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중도 입장은 온건파는 모두 이렇게 말하겠죠. ‘음, 내가 그걸 꼭 믿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윌슨이 제시한 핵심 문제는 온라인에 온건파 세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공개 토론회에 들어가려면 보통 일정 수준의 참가비가 있습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그것이 더 공정하고 더 합리적인 세상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가 들리게 하려고 아우성치는 세상을 만든다. 공정한 경우도 있지만 더 큰 세력의 명령을 따르는 경우도 있다. “극단주의, 가짜 뉴스, 선전선동, 그리고 온라인에서 뻔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졌을 뿐입니다.”
“사람들을 한데 모이게 하고, 목소리를 높이게 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효율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도달하고 특정인을 타깃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는 소셜미디어의 굉장한 능력은 올바르고 선한 활동에 활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개방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플랫폼이 덩치가 너무 커져서 사실상 효과적으로 스스로를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는 이들에게, 또 조작을 일삼는 세력에게도 엄청난 기회를 제공하게 됩니다.”
우리가 소셜네트워크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그 대신에 어떻게 하면 소셜네트워크에서 최대한의 가치를 얻어낼 수 있을지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상호의존성이 아주 높은 문명으로 우리를 이끌어온 모든 진보는 집단행동 덕분에 성취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우리 종족이 가장 위태로웠던 시기는 분열되거나 서로 반대하는 입장에 섰을 때였다. 소셜네트워크는 우리를 통합할 거라는 약속을 내세우지만 그 설계는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소셜네트워크는 우리가 바라는 통합을 방해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옛날에 도구를 만들던 우리 조상들은 필요에 맞게 작동하지 않는 도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았다. 바라는 결과에 맞춰 재설계하거나 개조했다. 우리는 본성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도구를 바꿀 수는 있다. 소셜온난화가 진행된 정도를 고려하면, 우리가 의존해왔던 고장 난 도구를 재설계하고 개조해야 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