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대표하는 생물학자이자, 인기 에세이스트인 저자는 해박한 지식과 솔직하고 통쾌한 문체를 통해 다수결을 맹신하는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낱낱이 드러낸다. 또한 사회학, 생물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상황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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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다수결은 위험하다 (다수결이 세상을 망친다) 내용 요약 🧐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결이 곧 정의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다수의 의견이 곧 민의이며, 그것을 따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공정한 결정 방식이라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물학자이자 평론가인 이케다 기요히코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맹신하는 다수결의 시스템이 사실은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저자는 자연계의 생태를 관찰하는 과학자의 시선으로, 인간 사회가 다수결이라는 도구에 어떻게 사로잡혀 자멸의 길을 걷고 있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욕망을 개방시킬 자유는 타인이 가진 자의성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최대한 보호되어야 한다. 다만, 이러한 권리는 능동적인 것에 한한다.”
간단히 말해사람은 누구든지 바보처럼 굴 권리, 타인을 사랑할 권리, 타인을 바보 취급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사람은 타인에게 사랑받을 권리, 타인에게 칭찬받을 권리, 또는 타인에게 이해받을 권리 같은 건 없다는 것이다.
간혹 나의 진정성을 알아달라거나 나의 본심을 이해해달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이해할 의무가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에게는 타인을 동정하거나 공감을 표현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당신의 요구나 부탁을 들어줄 사람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이해를 구할 자유는 있어도, 이해해 주기를 강요할 권리는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반대로 당신이 아무리 불쾌하더라도, 그리고 이해가 불가능하더라도 타인이 가진 자의성의 권리를 방해할 권리는 없다. 예를 들어 안경 쓴 사람을 보는 게 불쾌하다고 해서 안경 착용을 금지하는 법률을 요구하는 게 어리석은 짓인 것처럼, 동성끼리 결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것을 금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 또한 어리석은 짓이다. 누구와 파트너가 될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할 일이지 사회가 통제해서는 안 된다.
누구라도 타인의 삶을 통제하거나 간섭할 권리는 없다.
서로 상이한 사함들이 가진 자의성의 권리가 모두 함께 인정되고 지켜져야 하는데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다수가 서 있는 쪽의 권리만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즉 앞서 말했듯이, 민주주의가 소수를 억압하는 제도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과반수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다가 자신이 소수가 되고 나서야 세상이 소수를 차별하는 제도로 넘쳐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술을 마시는 사람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5퍼센트를 밑돌게 된다면 다수의 의견에 따라 금주령이 발동될지도 모른다. 그럼 술을 마신다는 이유만으로 곧장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리 이해할 수 없더라도 소수자가 가진 자의성의 권리를 옹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다른 사람이 가진 자의성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인정을 베풀면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말이 있듯이 소수자들을 옹호하는 일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될 것이다. 누구나 항상 과반수에 속해 있을 수만은 없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타인을 욕하는 것은 인간의 생리적 행동 중 하나이기 때문에 차단하기가 어렵다. 그럼 왜 사람들은 욕을 하는 것일까? 이를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상대의 지우를 낮추고, 자신은 높이고 싶기 때문이다.
작은 집단 속에서 상대방의 지위가 낮아지면 상대적으로 자기의 지위가 올라가서 먹이를 손에 넣거나 좋은 잠자리를 정하는 게 유리해지도, 그러면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진다.
특히 자신을 앞에 드러내지 않아도 상대방이 낮아지면 나 자신은 올라가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익명으로 욕을 하거나 타인을 멸시하는 데 거침이 없다.
더구나 익명으로 하면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생길 확률이 적기 때문에 편하다. 사실 이 전략은 확실한 경쟁자가 있을 때 더 큰 효과를 얻는다. 국회의원 선거 중에 운동원들에 의해 괴문서가 나도는 이유도 경쟁하는 후보에게 상처를 입혀 그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내가 지지하는 후보자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높이기 위해서다.
다만, 이 전략은 경쟁 상대가 소수일 때만 성립한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경쟁 상대가 많을수록 특정 인물에 대한 욕을 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불특정 다수 속에서 특정 인물을 헐뜯는다고 해도 자신의 지위가 오를 일은 없으니 말이다.
익명으로 내뱉는 욕은 더 이상 욕을 하는 본인에게 유효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단순한 자위행위가 되어버린다. 어느 평론가는 인터넷 시대의 최대 특징을 두고 “아무나 의견을 말하게 되었다”고 했다.
물론 누구에게나 의견을 말할 자유는 있다. 단, 그와 동시에 나에게는 아무한테나 함부로 욕을 해대며 동조세력을 얻으려는 사람들을 경멸할 자유도 있다.
차별을 하지 않는다면서, 실은 노골적으로 행하는 차별도 존재한다. 외모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차별을 한다. 가령 방송국의 여자 아나운서를 채용할 때 용모를 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우리 사회에는 엄연히 학력 차별이 존재하는데, 이는 공공연히 용인되고 있다. 그러니 학력은 차별해도 용모는 안 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따름이다.
인간이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하면 평등하게 될 거라는 말은 완전히 거짓으로,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리 교육을 받는다고 해도 똑똑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표면적인 평등사회에서는 이런 차별들을 우선적으로 금지시키고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직업에서도 차별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정규직이 있고, 계약직이 있고, 아르바이트가 있고, 백수가 있어서 하나하나가 차별 대상이 된다. 같은 조직 안에서도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차별하거나 괴롭혀서 쾌감을 느끼는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차별함으로써 자신이 차별받을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차별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억지로 법으로 막으려 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세상에는 타인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그들은 어떤 규칙이나 표준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지키는 게 정의라고 말한다.
그들은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도 않고, 그럴 용기조차 없으면서 타인을 통제하는 일에만 열정을 쏟아 붓는다. 예를 들어 대학 강의에 모범적인 매뉴얼을 만들어 교수들이 그것을 따르도록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로 멍청한 짓이다. 표준적인 것을 정해서 그것만 가르친 다는 것은 그 시점에서 알 수 있는 최신 지식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 표준을 부정하는 최신 학설이라도 나오면 큰일이다.
언론 자유라는 이름하에 주로 익명으로 무책임한 담론들이 형성되는데, 이러한 담론 중에는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것과 그저 아무 말이나 마구잡이로 떠들어대는 게 있다. 이 두 가지를 혼용한 것들이 인터넷 공간에 떠돌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근거가 확실한 정치적 발언이라면 실명으로 해도 좋을 텐데, 그런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저질스러운 담론을 무분별하게 쏘아내는 공격을 보면 단순히 스트레스 해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표적이 된 사람이 입는 피해는 막대하고도 혹독하다. 대체로 표적이 되는 사람은 스캔들에 휘말린 유명인이나 실언을 한 일반인들이 많은데, 이들을 향해 쏟아지는 ‘아무 말 대잔치’같은 증오의 막말들은 독화살보다 무서울 때가 많다.
게다가 비난받는 사람을 옹호하면 비난의 화살이 다음엔 그를 향할 수 있다. 실명이면 처음으로 말을 꺼내는 것부터 어렵지만, 익명이기에 아무리 심한 담론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맹목적인 비난도 모두가 함께 동참하면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