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의 걸작 『파리의 노트르담』은 15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노트르담 대성당이라는 거대한 상징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인간의 욕망과 비극, 그리고 구원을 다룬 서사시입니다. 2권에서는 1권에서 쌓아 올린 갈등이 폭발하며 인물들의 운명이 비극적인 파국을 향해 치닫는 과정을 그립니다. 🔔
이야기의 중심에는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향한 광기 어린 집착에 사로잡힌 부주교 클로드 프롤로와, 그녀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꼽추 종지기 콰지모도가 있습니다. 프롤로는 자신의 신념과 성직자라는 지위마저
어느 외진 탑의 어두운 벽에 누군가 손으로 새겨놓은 단어가 있었다. 아낭케. 운명을 뜻하는 이 그리스어를 누가, 어떤 마음으로 새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위고는 그 글자에서 <파리의 노트르담>의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소설을 읽는 동안 자꾸 그 익명의 손을 떠올렸다. 단단한 돌에 글자를 새기려면 얼마간의 힘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을 견디며 그 벽 앞에 서 있었을까. 자기 삶을 짓누르는 힘에 이름을 붙이고 싶었을까, 아니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말을 자신보다 오래 남을 돌에 맡기고 싶었을까.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벽에 남은 단어를 바라보고 있으면 끝내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그 아래 깊이 묻혀 있을 것만 같았다.
성당이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라는 말도 그 손을 생각하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위고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가도 걸음을 멈추고 성당의 벽면과 파리의 지붕들을 오래 묘사한다. 처음에는 그가 다시 인물들의 이야기로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차츰 그 돌들에도 사람의 시간이 스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생의 한 시절을 바쳐 기둥을 세웠고, 누군가는 성당이 완성되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죽었을 것이다. 서로 얼굴조차 알지 못했을 사람들이 앞선 이의 손길 위에 자기 몫의 시간을 보태며 하나의 건물을 완성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성당을 올려다보는 일은, 이름을 잃은 수많은 생애가 얼마나 높이 쌓여 있는지 헤아려보는 일처럼 느껴졌다.
‘책이 건물을 죽이리라’는 말은 그래서 오래 마음에 남았다. 인류가 믿음과 지식을 건축에 새겨왔다는 위고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성당은 여러 세대가 함께 쓰고 읽은 거대한 책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 책을 읽기 위해 같은 장소에 모여 같은 벽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러나 종이에 인쇄된 문장은 먼 곳까지 옮겨져 저마다의 손에 들어간다. 사람은 이제 함께 올려다보던 것을 혼자 내려다보며 읽게 된 셈이다. 나는 그 시선의 변화 속에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의 변화도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각자의 손에 책이 놓이면서 사람들은 물려받은 믿음을 스스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지만, 무엇을 믿으며 살아갈지도 점점 자기 힘으로 결정해야 했을 것이다.
프롤로는 성당과 책 사이에 자기 삶을 세워놓은 사람이었다. 그는 신앙과 학문에 몰두했지만, 에스메랄다를 향한 욕망이 밀려들자 오랫동안 의지해온 것들로도 자신을 지탱하지 못했다. 나는 그가 평생 쌓아온 질서가 무너지는 모습보다, 그 무너짐의 책임을 한 사람에게 떠넘기는 과정이 더 두려웠다. 자신의 내부에서 시작된 균열을 견디지 못한 그는 에스메랄다가 자신을 무너뜨렸다고 여겼고, 이제는 그녀가 자신을 구해야 한다고 믿는 듯했다.
그를 보며 나는 욕망이 어떻게 자신이 갈망하던 존재를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는지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곁에 있기만 하면 충분할 것 같지만, 욕망은 이내 상대의 마음까지 요구하고, 끝내 그 마음이 향할 곳마저 정하려 든다. 프롤로에게도 에스메랄다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살아야 했고, 자신의 갈망에 응답해야 했다. 그에게 그녀의 거절은 채워지지 않은 욕망을 넘어, 자기 존재 전체를 부정당하는 고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절실하다고 해서 그녀에게 그를 사랑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비극은 그가 자신의 괴로움을 그녀의 죄로 바꾸어놓는 순간 깊어진다. 그렇게 욕망은 자신이 세운 제단 위에서 경배하던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 나는 그 제단이 두려웠다. 누군가를 자기 삶의 전부로 삼겠다는 맹세 속에, 상대의 삶도 온전히 내 것이어야 한다는 요구가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를 향한 그의 갈망이 거세질수록, 그 곁에는 정작 그녀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자리가 남지 않았다.
콰지모도에게 성당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는 종소리 때문에 청력을 잃었지만, 자신을 세상에서 더 멀어지게 한 그 건물 안에서 살아갈 자리를 얻었다.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물러섰으나, 그는 성당의 계단과 난간과 종루를 제 몸처럼 익숙하게 오갔다. 그가 에스메랄다를 구해 성역을 외치는 장면에서는, 성당이 그의 팔을 빌려 한 사람을 품에 안는 것만 같았다. 그제야 나는 돌로 지은 건물이 어떻게 누군가에게 안식처가 되는지 알 것 같았다. 벽과 지붕 아래로 몸을 피한다고 해서 마음까지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 머물러도 된다는 믿음은 자신을 받아들이고 지켜주는 사람에게서 생겨났다. 에스메랄다에게 성당이 안식처가 되었던 것도, 그 안에서 콰지모도가 그녀의 편이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두꺼운 벽도 에스메랄다를 끝까지 지켜주지는 못한다. 이 대목에 이르자 성당을 덧없는 인간의 삶과 대비되는 영원의 상징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려워졌다. 건물은 사람보다 오래 남을 수 있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까지 오래 살게 해주지는 못한다. 성스러운 장소에도 집착과 폭력이 스며들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한 보호의 약속을 스스로 거두어들인다. 콰지모도는 에스메랄다를 구해 성당으로 데려올 수 있었으나,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세상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그가 할 수 있었던 일과 끝내 할 수 없었던 일 사이에서 오래 머물렀다. 한 사람을 살리고 싶다는 마음은 그토록 절실한데, 그 마음으로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은 너무 적었다.
책을 덮으며 실제 노트르담 성당의 첨탑이 불길 속에서 무너지던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는 오래된 건물을 바라보며, 적어도 무엇인가는 우리보다 오래 남으리라는 위안을 얻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고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서 있으리라는 생각만으로,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수 있다. 그러나 첨탑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그 믿음도 함께 흔들렸다. 자신보다 오래 견뎌주기를 바라며 인간이 세워놓은 것들 역시 언젠가는 무너질 수 있었다. 그제야 수백 년을 버텨온 건물 뒤로, 그 오랜 세월 동안 건물을 돌보고 고쳐온 사람들의 손이 떠올랐다. 우리가 영원하다고 느끼는 것들조차 누군가가 계속 보살펴왔기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위고의 서문에 따르면 아낭케라는 글자도 결국 벽에서 지워졌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소설의 시작이 다르게 읽혔다. 한 사람이 돌에 맡긴 말을 돌조차 끝까지 간직하지는 못했다. 다만 지워지기 전에 누군가가 그 글자를 읽었고, 그 앞에 멈춰 서서 알 수 없는 생애를 상상했으며, 그 상상을 다시 문장으로 남겼다. 기억은 그렇게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갔다. 우리가 남긴 것은 언젠가 우리의 이름을 잃고, 처음 의도했던 뜻에서도 멀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라진 뒤에도 반드시 나의 모습으로 남아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는다면, 그 변화를 소멸이라고만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벽에 새겨진 한 단어가 소설이 되고, 그 소설이 먼 훗날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듯, 한 생애는 자신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다른 생애에 스며들기도 한다. 나는 이제 그 벽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보다, 그가 남긴 말을 읽고 있는 내가 무엇을 오래 바라보게 되었는지를 생각한다. 그에게서 건너온 것은 이름도 얼굴도 아닌, 낯선 삶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는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