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의 역사

테오 W. 무디 외 1명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펴냄

아일랜드의 역사 (도전과 투쟁 부활과 희망의 대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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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30

페이지

5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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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빛

@saebyeokbit

2부에선 여성 빨치산이었던 이옥남의 생애가 주된 이야기다.
사회주의자였던 남편을 따라 해방 이후 여맹지도자가 되었다가 잔인하게 탄압하는 서북청년단을 피해 산으로 들어갔다. 쫓겨났던 빈집에 들어가 아기를 낳은 이후로 처절하고 고난한 생활이 쉼없이 이어진다.
지리산, 낙동강, 양양, 덕유산, 다시 지리산을 다 헤집으며 쫓고 쫓기는 빨치산들의 투쟁이 전개되는데 여자 몸으로 어찌 버텼을까 싶기도 하고 전투 속에서 여성들의 생활을 이러했구나, 하고 새로 알기도 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간구했는데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대한민국이 지금 이나마 복지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은 이들이 내린 뿌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여기서 정치적으로 뭐가 옳다 그르다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알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이 좌익을 얼마나 가혹하게 탄압했었는가와 좌익은 정말 정신력으로 철통같이 무장한 투사였다는 점이다.

이들의 해묵은 갈등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정치권은 갈등을 악용하여 표를 모은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좌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방적인 '빨갱이', '북한 간첩'으로 매도하는 태도는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오늘 아침 기사를 보니 미국 대학에서 일어난 반유대주의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였고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는 시위대를 '나치의 반유대주의적 흥분 상태'라 규정했다. 이 나라나 저 나라나 예나 지금이나 반대 세력을 억누르는 데엔 꼬리표 붙이기만한 것이 없는 모양이다. 이렇게 선동하는 측이 세계 질서를 뒤흔들고 있지는 않은 걸까.

민주주의가 투표권을 행사해서 국가의 지도자를 뽑는 방식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국민은 비판적으로 권력자의 주장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열린 자세로 많이 배우고 알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래된 적대적 감정은 뒤로 했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처럼.

빨치산의 딸 2

정지아 지음
필맥 펴냄

읽었어요
1시간 전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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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근재

@yebbiuncle

  • 송근재님의 낯선 기억들 게시물 이미지

낯선 기억들

김진영 (지은이)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1시간 전
0
🌝님의 프로필 이미지

🌝

@ocdulbnidszv

라디오 피디님의 이야기 초대.
6가지의 발명을 주제로 다양한 실제 사건을 엮어 전개하기 때문에
부담없이 읽기 좋다.

중간에서는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신건지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책의 초입과 끝의 두 단원이 참 좋았다.

‘한 번 사는 인생, 더 나은 삶을 발명해(살아)야지.’를 마음에 남긴 책.

삶의 발명

정혜윤 지음
위고 펴냄

👍 동기부여가 필요할 때 추천!
6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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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 소개

아일랜드 역사에 대한 가장 대중적이며 도전적인 입문서
2,000년에 걸친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의 ‘우여곡절’


이 책은 아일랜드의 1916년 부활절 봉기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립 아일랜드 방송국이 제작한 영상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으로 1967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1984년, 1994년, 2001년 세 차례에 걸쳐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영상 이미지에서 읽히기 위한 책으로 보완하고 재구성하여, 시대적 사건들을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압축하여 엮었다는 점에서 내용의 전문성과 함께 대중성에 크게 기여한 책으로 꼽힌다. 그동안 세 번에 걸친 보완을 통해 현대사에서 획기적인 사건들이 발생한 현재 시점까지 기술하고 있다.

기획의도 및 출간 의의
어떤 나라든지 역사의 과정이란 국내문제와 외세와의 관계로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어 단순하고 명쾌하게 해명되거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저 시간에 따라 기술하면서 인과관계나 그 영향력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아일랜드는 외부세계와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서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정치 분야에서는 법을 제정하는 자와 시행하는 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그 속내가 복잡하다.
따라서 우리는 아일랜드나 아일랜드인을 이해하기 위해 아일랜드의 복잡한 역사와 이들의 정신(psyche)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일랜드인의 섬세하고 복잡한 기질은 예술에서 잘 나타나 있다. 가령 ‘켈스의 서’에 묘사된 오묘한 디자인과 화려한 색채의 대비는 차치하고라도 매우 제한된 공간 안에 빽빽하고 치밀하게 들어찬 선의 움직임들은 아일랜드인의 복잡한 사고의 결정체이다.
아일랜드를 침략과 분단이라는 정치 중심의 역사로만 각인하는 것은 공평치 못할 것이다. 바이킹과 노르만인의 침입과 동화 과정 이후 중세기는 수도원 체제를 중심으로 기독교 학문과 켈트예술 및 문학을 꽃 피운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다. 과거의 전통과 뿌리에 그렇게 가까이 연결된 사람들, 아무리 경제적으로 부유해졌어도 ‘본래로 돌아가는 사람들(go back to basics)’. 이는 오늘날 뿌리를 잃은 채 물질만능에 사로잡힌 우리들의 모습에 신선함과 품위를 상기시켜준다. 1970년대 켈트문화의 부활과 21세기 ‘켈트 타이거’의 상징을 통해 이 책은 우리에게 이들 문화와 사람들에 대한 일견과 매혹적인 상상력을 제공해줄 것이다.

내용소개
기원전 9세기경 중앙 유럽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켈트인이 철로 만든 무기를 가지고 최초로 영국을 침략했고, 그 후 아일랜드를 침략하여 정착했다. 5세기 말경 성 패트릭이 기독교를 아일랜드에 전파하면서 로마 가톨릭교 국가가 되었다. 가톨릭교는 켈트의 이교도 문화와 예술을 차용하여 독자적으로 발전된 종교가 되었고, 오랜 기간 영국의 압박을 거친 후 오늘날까지도 국교로 자리 잡았다. 중세시대에는 수도원을 기반으로 고도로 발전된 기독교 학문과 예술이 황금기를 맞으면서 유럽대륙에 전파했으며 현재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그 자취를 볼 수 있다.

중세기에 켈트 아일랜드는 다른 민족과 문화로 융합되었는데, 이들은 북구유럽인인 바이킹과 프랑스계 잉글랜드인인 노르만인이었다. 9~10세기 바이킹은 여러 차례 아일랜드를 침입하여 원주민인 켈트인과 정착하여 동화되었다. 잉글랜드가 아일랜드를 침공한 최초의 시기는 1155~1156년으로(헨리 2세 치하), 1171년 강력한 무기들과 전사들을 데리고 침입한 스트롱보가 동부에 자리를 잡으면서 해안가의 도시들 및 타운을 건설했고 이들 문화와 생활방식을 정착시켰다. 이들 영국인 선조들은 페일지역이라 불린 지역에 정착하면서 아일랜드의 원주민인 게일인의 문화를 수용하였고 가톨릭교를 믿었다. 튜더왕조(1485~1603년)는 아일랜드가 자신들의 적인 프랑스와 스페인 등으로부터 안보의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아일랜드를 통치할 정책을 세웠다. 식민지의 첫걸음은 아일랜드의 강산을 정리하는 지도제작과 토지정리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게일인의 저항으로 잉글랜드 정부는 회유정책을 사용했다. 이후 1641~1653년에 걸친 ‘아일랜드인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나 아일랜드 게일인 사회의 완전한 몰락과 함께 얼스터를 포함한 아일랜드 전역을 본격적으로 식민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잉글랜드 식민지자들은 더블린 성에 행정부를 세우고 왕의 대리인인 총독이나 부총독을 두어 아일랜드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일랜드는 의회를 통해 잉글랜드 정세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더블린에 정착한 잉글랜드 행정부는 새 정착민인 신교도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1695년부터 일련의 형법(Penal Laws)을 시행했다. 이는 아일랜드인은 총독/부총독 직을 포함하여 투표권은 물론이고 장군, 고위관직, 법률가, 의원, 교사 등의 직을 금지하는 법이었다. 1778년 이의 폐지까지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은 모든 측면에서 박해를 받고 통제 당했다.

18세기 식민정책에서 20세기의 분할과 자주국이 되기까지 과정에서 아일랜드인이 전개한 토지문제 해결과 자주독립을 향한 영국과의 투쟁은 크게 세 가지 방식에서 이해될 수 있다. ① 의회제도를 통한 합법적인 방식의 투쟁과 ② 사조직을 통한 무력행사, 그리고 ③ 19세기 후반부 민족주의자들이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역설한 게일문화의 부활이었다.

첫째, 의회제도를 통한 합법적인 절차로 기존의 악법을 철회하거나 개혁하는 움직임이었다. 이는 주로 급진적 사고를 지닌 신교도 민족주의자 법률가에 의해 시도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 가장 주목할 인물은 1820년대 다니엘 오코넬과 후반부의 찰스 파넬로 영국의회와 대중시위를 통해 투쟁을 벌였다. 둘째, 의회를 통한 합법적 투쟁에 반대한 급진적 혁명주의 사고를 지닌 집단은 조직들을 세워 물리적 힘을 사용하여 토지와 자주권을 해결하려고 했다. 이들은 특히 자체 조직 내의 신문이나 저널을 통해 정세의 이슈들을 기고하여 대중을 깨우치고 설득했다. 세 번째 방식은 자주독립을 위해 영국과의 투쟁을 무력이나 의회를 통한 정치적인 운동으로 이루기보다는 일상사에서 이제껏 ‘영국화’된 관습이나 제도 모두를 버리고 게일어와 게일 문화로의 복귀를 하자는 민족주의적 태도가 일어났다.

북아일랜드 분쟁
1921년 분단 후 북아일랜드의 서부 벨파스트를 거점으로 민족주의자 가톨릭교도 소수자가 완전독립을 위해 영국군과 시위를 통한 투쟁에 들어갔다. 신페인의 IRA(아일랜드공화군)는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가 아닌 아일랜드에 속해야 하며 이를 무력으로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무장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못해 준비단계에 있다가 1968년 이후 투쟁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신교도들도 오렌지 결사단을 중심으로 한 군사 사조직을 통해 IRA를 압박하고 보복을 취하는 전쟁으로 전환시켰다. 이 과정에서 1969년 IRA 중에 의견을 달리 한 성원이 급진파라 하여 분리되어 나왔다. 급진파 IRA는 북아일랜드 문제를 다르고 좀 더 간단하게 보았는데, 그것은 영국인과 싸워 그들을 아일랜드 자체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신페인의 당수인 게리 애덤스와 마틴 멕기네스는 정치적 수단으로 통일을 위한 작업을 계속하면서 아일랜드의 분단을 인정하는 역사적 타협을 할 시점이라고 결정했다. 이 타협은 결과적으로 북아일랜드 정당인 민주연합당(DUP)의 피터 로빈슨을 수석장관으로 하고 IRA의 전 사령관이었던 신페인의 마틴 멕기네스를 차관으로 하여 권력을 공유하는 정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이 획기적인 선언서는 미국의 중재노력과 사회민주노동당 당수의 노력의 결과로, 이후 IRA는 영국군과의 정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IRA의 모든 성원들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IRA에서 분리되어 나온 Real IRA(RIRA)가 얼마 전(2009년 3월 7일) 앤트림 주의 피자가게 앞에서 피자를 주문하던 영국군 2명을 사살하고 민간인 여러 명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은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독자대상
-아일랜드사, 영국사, 유럽사 전공 대학생, 연구자
-아일랜드의 역사에 관심 있는 일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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