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 민음사 펴냄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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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4.12.20

페이지

384쪽

상세 정보

과연 나는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는걸까?
만족과 행복에 대한 새로운 기준

출간 후 15만 부 돌파, 일본 주요 언론 일제히 보도된 문제작.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젊은이 담론’이 사실 매우 왜곡된 것이며, 더 나아가 근대 세계가 날조한 신화라고 주장한다. 가령 신분제 사회에서는 같은 나이의 ‘젊은이’라 해도 계급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따라서 단지 연령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계급 간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으며, 그렇게 ‘세대 집단’을 종합하려는 생각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화와 함께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출현하면서부터 ‘국민국가’를 발전시키고 먹여 살리는 자원으로서의 ‘젊은이’가 발명되기 시작했다. 근대화 초기에는 젊은이를 국가 발전의 역군으로 활용하기 위한 ‘젊은이 담론’이, 세계대전과 경제 고도성장기에는 병력과 노동력으로서의 ‘젊은이론(論)’이, 그리고 고도화된 자본주의 시장 내부에서는 소비자로서의 ‘젊은이 분석’ 등이 차례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젊은이 연구’는 젊은이의 실체에 직접 다가섰다기보다 기성세대의 불만과 필요에 의해 제멋대로 ‘상상’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근대화 이후, 실재하는 젊은이를 ‘있는 그대로’ 분석한 ‘젊은이 연구’는 단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20대의 젊은 사회학자가 밝혀낸 오늘날 ‘젊은이들’의 맨얼굴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금이야말로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찾아낸 ‘행복한 젊은이들’과 직접 대면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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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근

@se2zhus4ra1x


현재 일본 청년들은 무언가 높은 대상을 향해 분발하는 것이 아닌, 친구 관계 등 자기 자신과 가까운 세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컨서머토리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그러면서 국가와 정치에는 무관심 하지만 그들과 '사회' 사이에 마련되지 않는 어떤 구체적인 회로를 말하고 있고 최근 인터넷이나 SNS같은 매체가 대안이 되고 있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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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읽은 '피로사회'가 떠올랐다. 자기 자신이 성과주체 또는 경영자가 되어 스스로에 대한 착취자이자 피착취자가 되는 무한 긍정, 성과사회를 넘어 이제 뉴노멀(New Normal)시대, 저출산이 경제침체와 맞물리면서 자기가 원해서가 아닌 시스템에서 떨어진 자들이 강제적 셀프 컨서머토리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작은 우려가 든다. 일본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대조되는 최근 광화문 모습을 보니 조금이나마 한국이 밝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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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되지 않는 여러가치들을 말살시키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돈이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조금 더 찾아봐야 겠다. 호호홓.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민음사 펴냄

2018년 1월 22일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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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종

@hj5ylthlpd2m

희망을 잃은 일본사회에서 오히려 더 행복해진 젊은이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며 이야기한다. 이와 비슷하지만 더 암울한 미래가 우리 앞에 있는 듯하다.

#미래 #청년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민음사 펴냄

읽었어요
2016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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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블리♡

@p656wcajbwpn

젊은이에게 권리나 구체적인 혜택, 기회를 주지 않고, 그저 '노력하라.'고만 다그치는 행동은 무책임하기 짝이없는 발언이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민음사 펴냄

읽었어요
2015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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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출간 후 15만 부 돌파, 일본 주요 언론 일제히 보도된 문제작.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젊은이 담론’이 사실 매우 왜곡된 것이며, 더 나아가 근대 세계가 날조한 신화라고 주장한다. 가령 신분제 사회에서는 같은 나이의 ‘젊은이’라 해도 계급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따라서 단지 연령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계급 간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으며, 그렇게 ‘세대 집단’을 종합하려는 생각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화와 함께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출현하면서부터 ‘국민국가’를 발전시키고 먹여 살리는 자원으로서의 ‘젊은이’가 발명되기 시작했다. 근대화 초기에는 젊은이를 국가 발전의 역군으로 활용하기 위한 ‘젊은이 담론’이, 세계대전과 경제 고도성장기에는 병력과 노동력으로서의 ‘젊은이론(論)’이, 그리고 고도화된 자본주의 시장 내부에서는 소비자로서의 ‘젊은이 분석’ 등이 차례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젊은이 연구’는 젊은이의 실체에 직접 다가섰다기보다 기성세대의 불만과 필요에 의해 제멋대로 ‘상상’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근대화 이후, 실재하는 젊은이를 ‘있는 그대로’ 분석한 ‘젊은이 연구’는 단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20대의 젊은 사회학자가 밝혀낸 오늘날 ‘젊은이들’의 맨얼굴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금이야말로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찾아낸 ‘행복한 젊은이들’과 직접 대면해야 할 때다.

출판사 책 소개

요즘 젊은이는 발칙하다, 최근 청년들은 근성이 부족하다…… “전부 틀렸다!”
20대 사회학자가 직접 밝혀낸 ‘젊은이 연구’의 최전선, 드디어 한국 상륙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담벼락 낙서에서부터 주변 어른들의 입버릇까지 ‘젊은이’를 둘러싼 담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즘 젊은이는 버릇이 없다.”라든가 “요즘 애들은 끈기가 부족하다.”라는 식의 비난 혹은 비판은 가장 흔한 예다. 그런데 스물여섯 살(발표 당시)의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젊은이 담론’이 사실 매우 왜곡된 것이며, 더 나아가 근대 세계가 날조한 신화라고 주장한다. 가령 신분제 사회에서는 같은 나이의 ‘젊은이’라 해도 계급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따라서 단지 연령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계급 간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으며, 그렇게 ‘세대 집단’을 종합하려는 생각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화와 함께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출현하면서부터 ‘국민국가’를 발전시키고 먹여 살리는 자원으로서의 ‘젊은이’가 발명되기 시작했다. 근대화 초기에는 젊은이를 국가 발전의 역군으로 활용하기 위한 ‘젊은이 담론’이, 세계대전과 경제 고도성장기에는 병력과 노동력으로서의 ‘젊은이론(論)’이, 그리고 고도화된 자본주의 시장 내부에서는 소비자로서의 ‘젊은이 분석’ 등이 차례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젊은이 연구’는 젊은이의 실체에 직접 다가섰다기보다 기성세대의 불만과 필요에 의해 제멋대로 ‘상상’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근대화 이후, 실재하는 젊은이를 ‘있는 그대로’ 분석한 ‘젊은이 연구’는 단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20대의 젊은 사회학자가 밝혀낸 오늘날 ‘젊은이들’의 맨얼굴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금이야말로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찾아낸 ‘행복한 젊은이들’과 직접 대면해야 할 때다.

누군가가 “요즘 젊은이는 발칙하다.”라고 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자기 스스로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힌 셈이다. 그것과 동시에 자신은 ‘발칙하고 이질적인’ 젊은이와는 다른 장소, 즉 ‘성실한’ 사회의 성원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젊은이는 발칙하다.”라는 식으로 젊은이를 ‘이질적인 타자’로 간주하는 지적은, 이미 젊은이가 아닌 중?장년층의 ‘자기 긍정’이자 ‘자아 찾기’의 일종인 것이다. 한편 ‘젊은이가 희망이다.’라는 주장은 이것과 반대다. 젊은이를 ‘편리한 협력자’로 간주함으로써, 자신과 사회의 연결 고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도 자신과 같은 ‘이쪽’에 속해 있으니까, 자기를 포함한 이 사회는 걱정 없다는 것이다. (……) 어쩌면 ‘젊은이론’은 젊은이라는 이름을 빌려 쏟아 낸 사회 비판이 아니었을까? 본래 ‘젊은이’는 그 실체가 있는 듯하면서 또 없는 듯한 존재, 즉 애매한 대상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젊은이는 쉴 새 없이 교체된다. 따라서 젊은이론이 바뀐다고 해도, 아무도 이 점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식의 ‘교체’를 환영한다. “이것이 새로운 젊은이다.”라고 하면서 말이다. _본문에서

각종 언론과 인터넷 포털을 뜨겁게 달군 ‘사토리 세대’(득도 세대)의 등장
절망적인 시대에 행복을 외치는 젊은이들의 전모가 밝혀지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은 거품경제의 붕괴와 함께 장기 불황의 늪에 빠져든다. 그때부터 젊은 세대를 동정하고, 그들의 불행한 처지를 걱정하는 ‘젊은이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88만 원 세대’, ‘이태백’, ‘삼포 세대’ 아니 ‘사포 세대’, ‘오포 세대’ 등의 용어가 널리 유행했다. 즉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난 일본(그리고 한국)의 ‘젊은이 담론’은 젊은 세대의 고통과 어려움을 지적하고 해명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2011년 「일본 국민 생활 만족도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일본 열도는 충격에 휩싸인다. 무려 20대의 75%가 ‘지금 나는 행복하다.’라고 응답한 것이다. 이것은 해당 조사가 실시된 이래 최고치이자 일본 경제가 악화 일로에 접어든 상태에서 나온 뜻밖의 결과였다. 취업난, 부조리한 사회 제도, 워킹푸어, 젊은이들에게 불리한 산업 구조…… 오직 ‘젊은이들의 불행’만을 떠들어 대던 매스컴은 일제히 술렁인다. 하지만 후루이치 노리토시를 비롯한 일본의 젊은이들은 ‘예상대로’의 결과라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한다. 어째서일까?

인간은 어느 순간에 “지금 불행하다.”, “지금 생활에 불만족을 느낀다.”라고 대답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다. 미래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 사람이나 장래의 인생에 ‘희망’이 있는 사람은 “지금 불행하다.”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 즉,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 혹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고도성장기나 거품경제 시기에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가 낮게 나타났던 이유가 설명된다. 말하자면, 그 시기의 젊은이들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고 믿었다. 더불어 자신들의 생활도 점차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은 불행하지만, 언젠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소박하게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저 ‘끝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_본문에서

경제 성장기나 부(富)가 넘쳐흐르던 거품경제 때는 젊은이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함으로써 그들을 훈계하거나 손이 큰 소비자로서 길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극단에 치달은 오늘날의 환경에서 ‘젊은이’에게 맹목적인 희생을 강요하거나 반대로 찬양하는 언설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됐다. 이젠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성공을 보장받을 수도, 심지어 당장 내일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조차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때 당연시되던 ‘대학교 진학, 대기업 입사, 중산층 가정’이라는 꿈같은 시나리오가 폐기 처분된 지금 시대에 과연 어느 누가 과로사를 각오하며 회사에 투신하고, 부조리한 사회 제도를 자신의 부족한 능력 탓이라 자해하며 버틸 수 있을까? 결국 이때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취할 수 있는 삶의 태도는 어려운 상황에 ‘안주’해 버리는 것이다. 먼 미래의 불투명한 성공에 현혹되기보다는 하루하루 일상에 만족하며 인생의 행복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배부른 젊은이들의 값싼 투정이 아니다. 오히려 생존하기 위해 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적응 방식’인 것이다.

“청춘은 원래 아픈 거라고? 열정페이를 지불하라고? 웃기지 마!”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한 젊은이로 산다는 것,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그런데 과연 ‘일본이 끝났다.’라는 말은 어떠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까? 예컨대 국채 폭락 등의 계기로 일본이 경제 파탄에 이를 가능성이 제로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가령 일본이 IMF 관리 아래 들어가면, 사회보장비용이 크게 삭감되어 의료나 교육 등 공적 서비스의 질도 저하될 것이다. 기업의 도산이 이어지고, 실업률은 올라갈 것이다. 일본의 기업과 토지는 외국계 자본에 헐값으로 팔려 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다고 해도, 일본의 국민이 멸족당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켜야 할 것이 거의 없는 ‘젊은이’에게는 이런 사태가 기회일지도 모른다. 경직된 고용 제도는 무너지고, 오직 ‘실력’으로 경쟁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일찍이 지방에 사는 젊은이들이 꿈을 안고 상경했듯이, 요즘 젊은이들 또한 일확천금을 노리고 중국이나 인도로 ‘돈벌이’를 나서게 될지 누가 아는가. (……) ‘일본’이 사라지더라도, 일찍이 ‘일본’이었던 나라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여전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국가의 존속보다도, 국가의 역사보다도, 국가의 명예보다도,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_본문에서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찾아낸 ‘깨달음(사토리)’, 즉 그들이 발견한 ‘행복한 삶의 방식’을 자포자기 혹은 자기 파괴로 여기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의지박약한 일부 젊은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을 이토록 척박한 사회에 살게 만든 기성세대의 업보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성세대는 지속적으로 ‘엉뚱한 곳’에 투표함으로써 엄청난 격차사회, 비상식적인 고용 구조, 편견으로 가득 찬 가족 정책 등이 사회의 기틀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열세인 ‘젊은 세대’가 무슨 수로 저항하고, 사회를 바꿀 수 있겠는가? 당분간 기성세대는 ‘행복한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차고, 한심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 테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장래의 ‘사회 재생산 기능’을 고려해 본다면, 결국 기성세대는 엄청난 파국으로서 오늘날 자신들의 선택을 되돌려 받게 될 것이다. 이렇듯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21세기 젊은이들의 현주소를 보여 주는 동시에, 앞으로 기성세대가 겪게 될 곤란한 상황까지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권력을 쥔 사람들이 오직 자신의 밥그릇만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끝내 이 사회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물론 젊은이들로서는 밑지는 게임이 아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서 행복을 발견한 젊은이들에게 국가나 회사, 공공연하게 고통을 인내하라고 떠드는 기성세대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말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젊은이들이 일으킬 수 있는 ‘혁명’이자, 그들이 꿈꿀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이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사회적 관계에서 추론해 내지 못하면 기성세대는 이를 이용할 뿐이다. ‘상황은 좋지 않지만 열심히 일해라.’라는 어처구니없는 강요는 정규직이 되기 위해 인턴으로 몇 개월을 버티고, 다음은 수습사원으로 몇 개월을 버티고, 다음은 비정규직으로 몇 년을 버텨야 하는 끔찍한 과정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누구도 이것을 ‘문제’라고 가르쳐 주지 않는다. 절망적인 상황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현실에 만족하는 행복한 젊은이’조차 등장할 수 없다. ‘나는 할 만큼 했다, 하지만 사회가 이 모양인데 더 이상 뭘 하겠어? 이제 내 행복, 나 스스로 찾겠어!’라는 ‘행복한 젊은이들’이 일본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나마 자신을 사회적 관계 내의 ‘피해자’로서 볼 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 나라의 결정적 차이다. 그나마 일본은 한국에 비하면 유토피아였다. 부럽다. _「해제」에서

그렇다면 한국의 사정은 어떠할까? 이 책의 한국어판 해제를 쓴 오찬호(『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는 “한국은 일본에 비해 한층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라고 진단한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자기들 스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선택했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곤란한 상황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한국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적절한 도움을 주는 이정표, 또는 ‘불길한 예언’으로 읽힐 수 있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의 기회를 빼앗고 청춘의 고통을 세뇌시키면서 기득권층과 강자에게만 유리한 방향으로 사회 구조를 만들어 간다면 분명 파국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바다 건너 나라의 요원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위태로운 상황을 타계하는 데 꼭 필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앞으로 우리는 일본의 선례를 통해 각종 ‘세대 문제’와 젊음을 착취하는 사회 구조를 개혁하고,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하는 정치적 자각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국가 발전과 성장을 바란다면, 그리고 행복한 사람들이 행복한 나라에서 살길 원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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