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라

고미숙 지음 | 그린비 펴냄

이 영화를 보라 (인문학과 영화, 그 어울림과 맞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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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08.6.10

페이지

264쪽

상세 정보

지난 100년간 가족과 국가, 종교와 예술을 통해 한국인의 일상과 무의식을 지배해 온 근대성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여섯 편의 한국영화로 살피고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를 아우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한다. [밀양]에서는 가족과 신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등 영화를 통해 시대의 증상을 이야기한다.

영화 [괴물]을 볼 때는 “문명국가가 될수록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더욱 체계적으로 노예화되어 간다”는 이반 일리히의 주장과 나란히 놓고, 위생권력이 대중을 길들이는 교묘한 방법을 비판한다. 괴물이 엄청나게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것 같은 특단의 조치인 ‘에이전트 옐로우’ 말고, 고작 불화살에 의해 죽는 것은 결국 권력의 외부에 있는 야생성에 의해서만 타도될 수 있다는 위생권력에 대한 조롱이다.

[라디오스타]에서는 우리 안의 ‘디아스포라’를 본다. 자본주의 공리계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는 계급 바깥의 존재들, 비-계급, 이주민, 외부자들로 가득한 이 영화는,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지만,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삶 혹은 축제로서의 ‘코뮤니티’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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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라

고미숙 지음
그린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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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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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지난 100년간 가족과 국가, 종교와 예술을 통해 한국인의 일상과 무의식을 지배해 온 근대성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여섯 편의 한국영화로 살피고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를 아우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한다. [밀양]에서는 가족과 신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등 영화를 통해 시대의 증상을 이야기한다.

영화 [괴물]을 볼 때는 “문명국가가 될수록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더욱 체계적으로 노예화되어 간다”는 이반 일리히의 주장과 나란히 놓고, 위생권력이 대중을 길들이는 교묘한 방법을 비판한다. 괴물이 엄청나게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것 같은 특단의 조치인 ‘에이전트 옐로우’ 말고, 고작 불화살에 의해 죽는 것은 결국 권력의 외부에 있는 야생성에 의해서만 타도될 수 있다는 위생권력에 대한 조롱이다.

[라디오스타]에서는 우리 안의 ‘디아스포라’를 본다. 자본주의 공리계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는 계급 바깥의 존재들, 비-계급, 이주민, 외부자들로 가득한 이 영화는,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지만,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삶 혹은 축제로서의 ‘코뮤니티’를 그린다.

출판사 책 소개

한국의 근대성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유머러스하면서도 심도있게 풀어내고 있는 이 책 『이 영화를 보라』는 인문학자 고미숙이 시원하게 써내려간 유쾌한 영화-인문서이다. 영화 [괴물]에서는 위생권력의 실체를, [밀양]에서는 가족과 신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등, 사람들이 열광했던 영화들 속에서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시대의 증상들을 이야기한다. 지난 100년간 가족과 국가, 종교와 예술을 통해 한국인의 일상과 무의식을 지배해 온 근대성은 과연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여섯 편의 한국영화로 살피고 있는 이 책은 우리의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를 두루 아우르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문학의 눈, 영화의 입으로 시대를 말한다!
고미숙의 한국사회 쾌도난평,『이 영화를 보라』!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진지하고 유머러스한 고찰
바야흐로 ‘근대적’이란 말이 부정에 더 가까워진 시절이다. 탈근대가 유행이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근대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화두다. 그런데 잠깐. 한국의 근대성이란 건 도대체 무엇이던가? 근대적 주체가 생산되던 한국적 메커니즘은 무엇이던가? 100년 전 그때 그 시절 한국에선 무슨 일이 생겼기에 지금까지도 민족, 역사, 언어, 가족, 섹슈얼리티 등은 한국인의 일상과 무의식을 사로잡아 버렸던가를 내내 탐구하던 저자는 마침내 영화와 접속하기에 이른다. 한국영화로 시도해 보는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진지하고 유머러스한 고찰은, 영화와 인문학이 보여 주는 그 환상적인 상생의 리듬을 통해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불후의 고전 『열하일기』를 전파하던 고미숙은 과거의 고전에서 우리의 ‘미-래’를 보았다. 이제 그는 근대라는 키워드를 통해 ‘지금-여기’의 증상과 근원을 낱낱이 파헤친다. “근대는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말해 준다면, 고전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고 말하고 있는 저자는 이 책 『이 영화를 보라』를 통해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되는 현재 속에서 현재의 문제로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제안하고 있다.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답과 동시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끊임없이 불화하고 사회에 만성적인 불만을 가진 인문학자 고미숙이 펼쳐 놓은 한국사회 쾌도난평은 시종일관 웃음을 터뜨리게 하지만 동시에 진지하고 사려깊다. 흑백영화 속에서 채플린이 우리에게 선사해 주었던 그 ‘웃음’처럼 말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젠 체하지 않는 고미숙의 글에는 그래서 ‘뭔가’ 있다. 인문학자가 내뿜는 영화보기의 괴력. 그녀가 ‘이 영화를 보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코드명 : 탈코드- 표상을 전복하라!
세상엔 마땅히 그러려니 하는 것들이 있다. 월드컵 경기에선 ‘우리’나라를 응원하고, 같은 나라 사람끼리는 ‘민족’이란 이름 아래 묘한 연대감을 갖는다. 예술하는 데 한(恨)은 필수고, 가족끼리는 응당 화목한 웃음꽃이 피어야 하며, 고향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곳이어야 한다. 자주 씻는 것은 결코 흠이 되지 않고, 교회에 가서 부모자식 잘 되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에 대해 물음표를 붙인다면 오히려 “그게 왜 문제가 되냐”는 반문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고 익숙한 것을 뒤엎는 것이 특기인 저자 고미숙에게 그런 예상되는 반문은 맥을 못 추고 스러진다.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이듯이 가족 역시 근대국민국가의 상징”이라고 소리 높여 민족과 가족에 딴죽을 걸고 있는 이 책은 ‘탈코드’를 코드로 내세워 기존의 근대적 표상체계들을 비판한다. 교회와 조폭에서 동일하게 사용되는 “형제, 자매”라는 가족의 담화방식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살피고, 고향은 고정된 시간성과 장소성을 갖는 곳이 아니라 ‘욕망’이 닿는 곳임을 영화를 통해 밝히고 있는 것이다.
[괴물]에서 [라디오스타]까지 여섯 편의 한국영화를 관통하는 코드는 다름아닌 ‘탈코드’고, 기존의 통념들을 완벽하게 ‘깨는’ 이 책은 한국사회와 영화를 가볍게 거스르며 쾌속질주한다. 2000년대보다 조선시대에 오히려 더 활발했던 성담론들을 고시조에서 끌고 와 섹슈얼리티가 억압받은 역사는 사실 근대 이후임을 알려 주고([음란서생]),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한(恨)의 정서에 대해서는 반미(反美)주의자로 커밍아웃하면서까지 강력하게 비판하며([서편제]), 일상과 네트워킹하는 예술론을 설파한다.
지금 혹시,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는 국가와 가족과 민족 등등을 받아들일까 말까 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책을 보라. 그리고 이 영화를 보라!

[괴물]에 주목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좀 깨는 책, 『이 영화를 보라』가 [괴물]을 주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1200만 명이라는 한국영화 최고 흥행기록 때문에? [살인의 추억] 봉준호와 송강호가 다시 만나서? 민족정서 살짝 건드려 주시는 ‘반미코드’ 때문에? 아니다. 이 책에서 [괴물]이 선택된 이유, 혹은 주목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위생권력의 정치적 실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멜로 코드가 없다는 특장점과 함께.
지금까지 있었던 [괴물]에 대한 논의는 누가 보더라도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가 자명한 정치적 커밍아웃이었다는 것이 주가 됐었더랬다. 그러나 고미숙은 이 영화를 “문명국가가 될수록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더욱 체계적으로 노예화되어 간다”는 이반 일리히의 주장과 나란히 놓고, 위생권력이 대중을 길들이는 교묘한 방법을 비판한다. 괴물이 엄청나게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것 같은 특단의 조치인 ‘에이전트 옐로우’ 말고, 고작 불화살에 의해 죽는 것은 결국 권력의 외부에 있는 야생성에 의해서만 타도될 수 있다는 위생권력에 대한 조롱이다. 고미숙은 [괴물] 속 미 군의관이 “먼지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면서 독극물을 한강에 방류하여 보이지 않게끔 하는 것에서 시각적인 것을 특권화하면서 도래하는 ‘근대성’을 본다. 뒷간과 논밭이 이어져 있던 것만큼이나 우리의 일상과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던 똥오줌은 근대 이후 보기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갑작스레 타도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갑자기 위생을 따지며 도래한 우리의 근대는, 아토피와 같은 ‘지나친’ 위생의 부작용을 낳으며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영화에서 다소 과장되어 보이긴 했지만 실제로 ‘사스’가 중국을 휩쓸었을 때, 근대권력은 바이러스와 테러리스트를 동일하게 간주하여 특수부대와 쾌속정을 투입했다. 문제의 본질은 해결하지도 못한 채 경계령을 선포하고 대중들을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국가가 보여 주는 위생권력의 스펙터클이란 이렇듯 허황하기 그지없다. 따라서 [괴물]은 위생권력과 접속했을 때 충분히 다르게 볼 수 있는 영화다. 그냥 초대형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위생권력과 정치에 한껏 비웃음과 메롱을 날리는 그야말로 ‘깨는’ 영화가 되는 것이다.

[라디오스타]에는 이주민들이 산다
왕년에 잘나가던 가수 최곤의 좌충우돌 재기스토리를 다룬 [라디오스타]는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말랑말랑한 휴먼드라마로 기억된다. 실제로, 이준익 감독은 자기의 영화를 보면서 감동하고 거침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꽤 유명하다. 촌스럽고 노골적이긴 하지만 감독이 의도하는 ‘감동’은 여지없이 사람들에게 적중하고, 관객은 함께 그 감동의 도가니에서 눈물을 찍어낸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라』에서는 [라디오스타]를 마냥 감동스럽게만 그릴 리 만무하다. 저자는 이 영화에서 우리 안의 ‘디아스포라’를 본다. 자본주의 공리계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는 계급 바깥의 존재들, 비-계급, 이주민, 외부자들로 가득한 이 영화는,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지만,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삶 혹은 축제로서의 ‘코뮤니티’를 그리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좁아 터진 영월 구석에서 록밴드를 하면서 사회에서 부여한 거의 모든 코드를 무시하며 살아가는 이스트리버(동강)는 산골에 살면서도 정착민의 궤도에서 이탈한 존재들이며, 청록다방 김양과 매니저 박민수는 가출한 상태고, 동강순대집 꼬마네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신기할 정도로 가족과 가족주의에 무심한 영화 속에서, 탈코드화된 이 이질적 존재들은 각자의 삶을 새롭게 구성하고 또 새로운 코뮤니티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주인공 최곤은 자신을 다시 무대에 서게 해줄 스타팩토리 사장(=자본!)의 멱살을 잡고, 매니저 박민수는 가족, 혹은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지방방송국의 오후 방송은 디제이와 청취자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세탁소와 철물점 주인한테 외상값 독촉멘트를 날리고, 집나간 아버지를 애타게 찾는 ‘무규칙적 사건’이 된다. 또한 이스트리버와 접속된 이 사건은 대중에게 인터넷으로 전파된다. 가는 곳마다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내는 최곤과 그의 무리들은 이렇게 탈주에서 생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책과 영화의 동사(動詞)적 전환!
한 사람에게서 풍겨 오는 느낌이란 것은 비단 얼굴이나 외양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세상에 대한 태도가 그 느낌을 결정한다. 사람들은 고미숙을 참 ‘비판’적인 사람이라고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세상과 사람에 대해 꽤나 투덜거리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무한한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찡그린 그의 표정은 사실 호모 에로스의 얼굴이다.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 것인가, 즐겁게 공부할 것인가를 늘 치열하게 고민하기에 그의 책은 다른 어떤 책들보다 강한 생명력과 설득력을 갖는다. 그리고 다른 어떤 책들과도 ‘다르다’. 영화책이면서도 평소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다는 저자의 고백으로 시작하는 만큼,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다르다’. 그리고 그 다름의 중심에는 고미숙이 있다.
이 책은 내 얘기, 우리 모두의 얘기를 하고 있다. 내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한국과 한국사회, 그리고 한국인의 일상과 무의식을 진단하고 그 기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시대의 인문학자 고미숙은, “이 사회에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나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하며 우리 모두가 놓지 못하고 있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의문과 공포를 보듬으며 명쾌하게 진단을 내려준다. 욕망의 배치를 바꾸지 않는 한 새로운 시작은 불가능하다고. 그렇게 저자는 좀 ‘깨는’ 책 『이 영화를 보라』를 가지고 사람들과 한국사회에 대한 수다를 시작하며 책과 영화를 동사(動詞)로 만들려 한다.
책이 명사(名詞)에서 동사(動詞)로, 즉 액션으로 전환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삶과 직결되어 있을 때다. 미친 소고기를 먹게 될지도 모른다는 삶과 직결된 두려움과 공포가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듯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바꾸는 것은 각자의 일상에 보다 가까운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사람들은 요가 책을 사서 몸을 건강히 하고, 컴퓨터 책을 사서 기술을 익힌다. 뭐니뭐니 해도 실용이 대세인 이때 책에서 실천을 끌어내는 일은 그것이 ‘내 (현실의) 문제’일 때 비로소 가능하다. 고미숙은 자신의 책을 읽은 독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파워를 가진 사람이다.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문제를 고민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이 영화를 보라”는 말은 마치 친구의 권유처럼 다가와 어느새 본 영화도 다시 보게 만든다. 친구가 들려주는 영화이야기는 따라서, 각자의 세계를 증식시키며 오래도록 퇴색하지 않는 영화-인문서로 기억될 것이다.

[저자 고미숙 인터뷰]

프리온과 히스테리의 시대. 출구는?

Q. 책을 [괴물]로 시작하고 있다. 특별히 위생권력을 다룬 이유가 있나.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괴물]을 ‘위생권력’에 대한 영화로 보았다. 이야기할 게 너무 많았는데 [괴물]에 대한 담론은 반미나 가족뿐, 위생권력의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참을 수 없게 말을 하도록 부추긴 것이 바로 [괴물]이다. 광우병에 대해 덧달기를 한 것도 위생권력에 쭉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2003년 사스가 휩쓸었을 때도 흥미로웠다. 사스 계엄령이 내린 중국에서, 위생권력이 작동하는 현장을 봤다. 지금(광우병)은 그 반대의 경우다. 사스 때는 우리나라에 환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다는 듯이 굴었다. 그건 ‘히스테리’였다. 그랬던 한국정부가! 지금 광우병에 대한 엄청난 증거와 전문가들에 제시하는 과학적 자료를 보고도 안전하다고, 안전하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어쩌면 이토록 가식적이고 대중을 이중적으로 속이고 있는가.
바이러스는 막을 수 없는 건데도 막을 수 있는 듯. 이건 명백히 막을 수 있는 건데도 안 막고. 이건 뭐지? 이 정치체제는? 위생권력이 과학을 빌미로 대중을 통제한다. 사실 그 뒤에는 자본이 있다. 아무리 전문가가 이야기해도 자본이 엄청나니까 어쩔 수 없다. 사실상 이건 프리온에 대한 편애다. 세상에 이렇게 관대하게 대할 수 있는가? 한국 안에서도 지금 한우도 이런 방식으로 생산하면 광우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민 없이 위험덩어리를 들여오는 것. 그게 바로 과학 뒤에 자본이 있음을 명백히 보여 준다. 과학이 바로 근대인의 신체를 움직이는 생체권력의 핵심이다. 자본과 생체권력이 바로 만나니까 트러블(광우병 촛불집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존재를 보호해 달라는 대중의 목소리. 근데 자본은 이득 채취가 중요하지 대중을 보호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 사스 때도 인간과 자연 사이에 문명론적인 질문이 던져졌었다. 그건 우리의 삶의 방식과 관계가 있다는 메시지다. 그런데 질문하지 않고 무조건 막는다.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먹어도 되는가, 착취해도 되는가. 육식 없이 인간이 살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기 때문에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지금 광우병 정국이 어떻게 튈지는 모르겠으나 문제는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근본적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질문들이 던져지지 않는다면 광우병보다 더 ‘쎈’ 게 오겠지.

Q. 위생권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일단 괴물을 보시고, 그 분석을 깊이 음미 하시고. 가장 근본적인 것은, 내 삶과 몸이 소외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충만하게 해주는 것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일상적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 한꺼번에 뭘 뒤집는 건 안 된다. 몸과 외부 사이 소통법을 익혀야 한다. 몸이 다 닫혀 있어서 부모자식과도 말이 안 통한다. [괴물]의 박강두처럼 진솔하고 욕심없고, 계산없는 것. 그는 자식과 친구되기만을 원한다. 중산층이 그런 관계만 맺어도 해피할 것. 그래서 괴물과도 싸울 수 있고. 위생권력과도 싸울 수 있다. 코드화되지 않은 신체, 마취주사 맞아도 마취가 안 되는 야생성, 매개 없이 직접 외부와 소통하고 직접 몸으로 표현하는 무리생명이 되는 것.

이준익 감독은 근대의 바깥에서 언어와 민족을 가지고 놀더라!

Q. 이준익 감독 영화가 두 개나 있다. 특별히 코드가 잘 통한다고 생각하는가.

[황산벌]과 [라디오스타]. 이준익 감독은 굉장히 무겁거나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데도 이미 근대 바깥에서 우리의 일상과 사유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황산벌]처럼 역사와 언어와 민족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사유는, 인문학에서는 상상하기가 어려운데 그것을 영상으로 보니까 굉장히 충격이었다. ‘고전평론가’로서 역사를 다룬 영화가 있다고 해서 봤는데, (왕의 남자 감독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어떤 관객들이 역사를 가볍게 희롱한다고 생각해서 불쾌감을 느끼기도 하더라. 이건 절대 안 좋은 의미의 가벼운 영화가 아니다. 지금까지 어떤 영화도 그렇게 전쟁을 진지하게 다룬 적이 없다. 이건 전쟁을 종식시키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영화다. 그런 의미에서 반전영화다. 또한 완벽하게 근대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있다. 그게 [라디오스타]에서도 드러난다. 가족, 멜로 등, 다른 영화에서는 고민고민하는 거를 그냥 훌쩍, 쉽게 넘어간다. 그런 식으로 서사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내공이다.

Q. 이준익 감독은 서사를 중요시하는 감독이다. 선생님도 늘 서사를 강조하는 사람 아닌가.

서사가 가장 중요하다. 내가 (수유 연구실에서) 직접 영화를 제작해 봐도 그렇다. 영상미, 미장센만으로는 영화에 몰입하기 힘들다.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여러 소외 중, 가장 중요한 게 이야기로부터의 소외다. 해줄 얘기도 없고 들을 얘기도 없다. 삶이 건조하고 메마르고 차가워진다.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타자와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이다. 『열하일기』에는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됐다. 이미지와 스펙터클은 이미 충분하다. 영화 밖에도 충분히 많다. 범람하고 있다. 영화관에서 또 봐야 한다는 것은 시각적인 테러다.

Q. 한비야 씨와의 대담에서 서사 능력의 부재로 젊은이들이 연애를 못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어떤 경험을 했을 때 그 경험이 내 몸과 삶의 하나의 장면으로 접속이 되려면 서사의 틀을 가져야만 가능하다. 똑같이 굶주림과 고난을 겪어도 서사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타자와 소통할 수 있다. 그게 기본적으로 소설이나 예술이 세계와 만나는 방법이다. 모든 게 이미지와 스펙터클만을 따라가니까 서사의 생명이 짤막짤막해진다. 문자와 인터넷. 말이 잘리고, 사유가 지속이 안 된다. 삶 속에서 어떤 것을 경험해도 그것을 서사로 구성하는 게 불가능하다. 근대적 인식론으로 보면 몸과 삶이 소외된다.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서사적 연속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보는 시각이나 통찰이 없으면 별도의 정보로 처리될 뿐이다. 10대나 20대는 정보도 많고 체험학습 많이 하는데 이야기 이어가는 능력은 1분도 안 된다. 테크놀로지로 다 덧씌운다. 시선이 다 바깥이 있으니 자신의 욕망은 머리 아래로도 안 온다. 가슴까지도 안 오는데, 이때 가장 억압되는 게 에로스다. 일적으로 만나는 건 그래도 되지만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결과다.
내가 준비하는 다음 책『사랑의 달인』을 쓰며 느끼는 것은, 왜 다들 사랑을 원하는데 그걸로 행복해하는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이 더 많을까. 그게 그렇게 좋은 거면, 행복지수도 GDP처럼 올라가야 하는데 왜 주위 사람까지 괴롭나. 이건 뭔가 이상하다. 서사적 능력을 잃어버리고, 자기 삶 자체를 서사화하지 못한다. 예전엔 삶 자체가 서사인 애들이 많았다. 요즘엔 매너나 이미지로 자기를 포장하니까 언어가 빈곤해지고 틱틱거린다. 자기 삶을 서사화 하면 웃음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그러질 못하니 개그 프로그램처럼 조작되고 인위적인 웃음을 공급받아야 한다.

Q. 서사는 어떻게 에로스와 만나는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면 조르바는 만나는 여자마다, 그들을 기쁘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자기에게 일어났던 모든 사건을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책의 화자는 조르바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우주와 공명하는 경험을 한다. 사실,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사람들을 다 좋아한다. 만남의 능력은 곧 서사적인 능력이다.

책과 예술은 행복의 기술이어야 한다!

Q. [음란서생]과 [서편제]의 근대적 멜로와 한을 지적했다.

다른 작품들은 지금 내가 문제 설정하고 있는 근대 외부에 대한 출구를 보여 주고, 그로 인해 내가 지적인 촉발을 받았다. 반면에 그 둘은 작품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근대적 프레임 안에서 이루어진 근대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Q. 그렇다. 그 두 영화는 서사를 이끌어가는 게 결핍이다.

결핍과 비극, 한. 그것이 사건과 인물을 받치고 있다. 내가 벗어나고 싸워야 하는 미적인 기준들이 거기 담겨 있어서 부분적으로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서편제>는 전국민적 사랑을 받은 영화지만 ‘저런 걸 내면화 하면 곤란하다’하는 점에서 비판을 했다. 네루다는 이런 말을 했다. 왜 평론가들은 시인들이 행복한 꼴을 못 보는가, 우리도 행복할 수 있다, 왜 시가 시답기 위해서는 비참하고 괴로운 속에서 지어져야 하는 것인가. 네루다는 격동기 속에서 살았지만, “아무튼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고 마땅히 행복해야만 시가 민중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맞아, 그렇구나, 했다. 예술은 행복을 전파해야 한다. 행복의 기술을 미적으로 표현하는 게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음란서생]의 멜로와 [서편제]의 한이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썼다.

Q. 이 책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히길 바라나.

뭐라고 해야 호소력이 있을까? 다른 어떤 책들도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부처님 말씀이건 공자님 말씀이건 다 존재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삶의 기술로 써야 한다. 모든 책은 그렇게 읽혀야 한다. 우리가 어떤 이미지와 표상과 일상적 리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어떤 흐름에 갇혀 있는가. 이 책은 그것을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통해 분석을 하고 있는 거니까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둘러보고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는 출구가 되기를 바란다. 그걸 찾는 기술로서 이 책이 이용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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