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이슬아 수필집>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의 이슬아 작가 에세이. 이슬아 작가가 글쓰기 교사로 일했던 글방들에서 그가 가르치고 또 배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 어때요?
Q&A
이 책의 한줄평
0
게시물
4
이 책이 담긴 책장
요약
부지런한 사랑 (몸과 마음을 탐구하는 이슬아 글방 | 이슬아 에세이) 내용 요약
《부지런한 사랑》(ISBN 9788954675352)은 이슬아가 2020년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에세이로, 글쓰기 교사로서 운영한 ‘글방’에서의 경험과 깨달음을 담은 작품이다.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간 이슬아 수필집》,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로 독자적 목소리를 낸 이슬아는, 2013년 단편소설 《상인들》로 데뷔한 후 연재 노동자이자 헤엄출판사 대표로 활동하며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다. 이 책은 그녀가 아파트 전단지로 시작한
p.6-7 그러자 우리의 마음이 바빠졌다. 주어를 늘려나갔을 뿐인데. 나에게서 남으로 시선을 옮겼을 뿐인데. 그가 있던 자리에 가봤을 뿐인데. 안 들리던 말들이 들리고 안 보이던 것들이 보였다. 슬프지 않았던 것들이 슬퍼지고 기쁘지 않았던 것이 기뻐졌다. 하루가 두 번씩 흐르는 것 같았다. 겪으면서 한 번, 해석하면서 한 번. 글을 쓰고 누우면 평소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든 채로 잠드는 듯했다.
p.7 글쓰기는 게으르고 이기적인 우리를 결코 가만히 두지 않았다. 다른 이의 눈으로도 세상을 보자고, 스스로에게 갇히지 말자고 글쓰기는 설득했다. 내 속에 나만 너무도 많지는 않도록. 내 속에 당신 쉴 곳도 있도록. 여러 편의 글을 쓰는 사이 우리에게는 체력이 붙었다.
p.16 그가 쓴 글 덕분에 나는 이야기의 속성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야기란 우리를 몇 번이고 다시 살게 할 수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볼 수도 있고, 현실에서는 엄두도 안 날 스릴을 잠깐 체험해볼 수도 있고, 가짜로 비극을 겪으며 마음의 근육을 키울 수도 있었다. 그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더 강해지기도 했다.
p.24 스물아홉 살인 지금은 더이상 재능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 지 오래다. 꾸준함 없는 재능이 어떻게 힘을 잃는지, 재능 없는 꾸준함이 의외로 얼마나 막강한지 알게 되어서다.
p.25 너는 커서 네가 될 거야. 아마도 최대한의 너일 거야.
p.47 10대들 앞에 글쓰기 교사로 서는 건 마음놓아도 되는 어른이 되는 연습 같다. 아이들이 비밀과 죄책감을 쌓으며 어른이 되어갈 때 정서적으로 비빌 언덕 중 하나일 수 있도록 말이다.
p.79 자기 모습이 어떻게 보이든 별 관심없던 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아이는 이제 자의식의 축복과 저주 속에서 한층 더 복잡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 눈에 비친 내 모습과 남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신경쓰며, 내가 바라는 나와 실제 나 사이의 괴리를 수없이 느끼며 자라날 것이다. 누구도 그 변화를 늦추거나 멈출 수 없다.
p.90 낭독을 하고 나면 종종 내가 좋아진다.
p.104 너의 사랑스러운 빈틈이 나는 좋아.
p.128 너의 글은 늘 얼마나 꼼꼼하고 알찬지! 그러니 스스로에게 훨씬 더 관대해지면 좋을 것 같아. 야무지고 부지런한 자신에 대해서 말이야. 사느라 수고가 많아. 혹시나 힘에 부치면 언제든 덜 열심히 살아도 된다는 걸 기억해줘.
p.143 외면하는 능력은 자동으로 길러지는 반면, 직면하는 능력은 애를 써서 훈련해야 얻어지기도 한다. 무엇을 보지 않을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인가.
p.169 새로운 일이 시작될 때마다 나는 자연스레 윤이를 떠올린다. 윤이야, 너는 다 알고 있었니. 무엇을 더 알고 있니. 이다음은 무엇이니. 이젠 보이지 않는 윤이의 뒷모습을 나는 아직도 바쁘게 쫓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p.171 구체적으로 고유해졌다.
p.229 좋은 글은 장면을 선물한다고.
이슬아는 참 잘 쓰는 사람이다. 매번 놀라워. ‘탁월하다’는 말이 나오게 하는 자극원들을 좋아하는데, 이슬아의 창작물은 거의 매번 나를 탄복하게 만든다. 그의 글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사용하는 형용사 때문이다. 무엇을 '잘' 형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게 되니까. 그건 나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여러 시선을 도입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부지런하게 사랑할 때.
부지런하게 사랑하는 일은, 부지런하게 읽고 쓰는 일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에 관해 쓰다가 그는 얼떨결에 나 아닌 다른 존재로 잠시 확장되었던 것이다.” (53쪽) 사랑과 글쓰기는 분리할 수 없는 한 몸인 것 같다. 이슬아가 ’세바시’에서 했던 강연을 종종 다시 보는데, 거기서 그는 ‘나’를 쓰는 일에서 ‘너’를 쓰는 일로 넘어가야 함을 말한다. 그건 더 많이 사랑하라는 말과 같다.
무엇이 더 어렵나. 사랑하는 일과 쓰는 일 중에.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나는 이슬아의 글을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이 나를 계속 읽고 쓰게 만들리라는 것.
지금은 더이상 재능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 지 오래다. 꾸준함 없는 재능이 어떻게 힘을 잃는지, 재능 없는 꾸준함이 의외로 얼마나 막강한지 알게 되어서다.
재능과 꾸준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창작을 할 테지만 나는 타고나지 않은 것에 관해, 후천적인 노력 에 관해 더 열심히 말하고 싶다.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10년 전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랬다. 잘 쓰는 애도 매번 잘 쓰지는 않았다. 잘 못 쓰는 애도 매번 잘 못 쓰지는 않았다. 다들 잘 썼다 잘 못 썼다를 반복 하면서 수업에 나왔다. 꾸준히 출석하는 애는 어김없이 실력이 늘었다. 계속 쓰는데 나아지지않는 애는 없었다. (24p)
내 가슴팍 위 쇳덩이에 관해 솔직히 말해보려던 참에 상대방의 가슴팍 위 쇳덩이도 보여 입을 다물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건 어른이 되는 감각 같았다. 내 것 아닌 쇳덩이의 색깔과 모양과 무게도 알아 보는 안목, 서로 들어줄 수 없음을 알고 귀를 닫은 채 하는 포옹. (49p)
상철이가 선데이마켓을 알려줬을 때 순간적으로 내 마음의 벽이 허물어졌다. 그래서 같이 가자고 했고 즐겁게 쇼핑을 하고 놀았다.
그런데 상철이의 의사는 들어보지 않았다. 상철이가 ‘콜’하긴 했지만 당황스러워서 거부를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마켓에 있는 내내 나는 즐거웠어도 상철이는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지금은 아주 가깝게 지내는 친구지만 그때 상철이는 나와 다른 마음일 수도 있다는 걸 잊지 않는다.
나사는 아는 듯하다. 관계가 회복되어도 때로는 상처 부위가
아주 말끔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상대방이 “나와 다른 마 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그의 문장을 잊지 않고 싶다. (67p)
항상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우스워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 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어. 너의 주저함을 너무 좋아한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주저하고 눈치를 살피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이 있잖아. (92p)
앞서 언급한 영상에서의 슬픔은 시청자를 위협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보고 싶은 슬픔’이자 ‘소진되기 좋은 슬픔’이다. 시청자의 일상을 흔들지 않는 선에서 소비된다. 정신분석학자 백상현은 그의 책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위고, 2017)에서 스펙터클 사회가 미디어를 통해 제공하는 감정의 고양 상태에 관해 말한다.
텔레비전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웃음과 슬픔, 분노와 노스탤 지어의 감정을 자극하지만 정작 이것이 겨냥하는 것은 감정의 소진상태이다.
우리는 예능이나 드라마나 영화나 유튜브 영상 클립 등을 통해 여러 감정을 느끼지만, 극적인 비극을 본 뒤에도 대체로 별 탈 없이 일상으로 복귀한다. 숱한 미디어콘텐츠가 주는 카타르시스 기능은 어제의 내가 변함없이 오늘의 나로 살아갈 수 있도록 안 정화 역할을 한다. 라캉은 이런 안정화를 비난했다. 안정화란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면서 우리의 마음 을 고착시키는 부정적인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에서는 그걸 ‘살균된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진정한 슬픔과 분노는 우리의 존제를 뒤흔든다. 원래 자리한 위치에서 떨어져나가게 하고 방황의 여정을 시작하게 한다. 라캉은 말했다. ”만일 슬픔이 우리의 ‘감정‘에 진실한 효과를 불러일킬 수 있다면 그것은 ‘감동‘의 카타르시스가 아닌 ’흔들림’을 통 해서일 뿐“이라고.
감동적인 동물 영상들이 범람하는 한편에는 공장식 축산과 공장식 수산 현장이 있다. 그라인더에 갈리는 병아리와 살처분 당하는 돼지의 얼굴들도 있다. 그 현장 역시 마음만 먹으면 유튜브에서 시청 가능하다. 나는 이쪽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믿고 싶지 않지만 슬픔의 실체는 거기에 죄다 있다고 생각한다. 비교적 조회수가 높지는 않다. 우리의 일상을 흔드는 슬픔이기 때문이다. “망각을 위한 카타르시스의 기능”이 거기엔 없다. 그 슬픔은 너무도 불편하여 우리를 어제와 똑같은 존재로 남겨두 지 않는다. 비건이 아닌 이들에게도 분명히 어떤 영향을 미치고 야 마는 이미지들이다.
동물을 가장 많이 귀여워하는 시대이자 동물을 가장 많이 먹는 시대를 살고 있다. 외면하는 능력은 자동으로 길러지는 반면, 직원하는 능력은 애를 써서 훈련해야 얻어지기도 한다. 무엇을 보지 않을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인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이들 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며 수업에서 나온다. (142p)
도혜는 자신에게 부모가 있다는 것과 그들로부터 별 어려움 없이 용돈을 받는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그런 게 부끄러운 적은 난생처음 이었다.
내게 없는 것 말고 내게 있는 것이 부끄러운 경험 말이다. 염치 때문에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168p)
윤이 덕분에 도혜는 처음으로 자신의 ‘있음’이 부끄러워졌다.
결여된 것들을 통해 윤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일찌감치 배웠는 지 보았기 때문이다. (169p)
우리는 그리움을 동력으로 글을 쓰기도 한다.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글쓰기는 사랑하는 것들을 ’불멸화‘하려는 시도다. (17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