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중년이 될 때까지 체험한 사랑, 구름, 바람, 나무 빗방울, 쓴 소설과 읽은 책, 예술과 사람 등에 관한 이야기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궁극에는 삶의 기쁨과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문학적으로 더 깊고 넓어진 사유의 문장들, 그의 소설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워진 문장을 읽게 된다.
작가의 모습이나 취향에서 하루키가 많이 느껴진다. 취향에 관한 이야기나 문화적 성장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같은 세대로 묶어지는 시대적 공감의 요소가 있다. 그런 까닭에 더 재미있게 읽었다. 또한 이 책에서는 마라톤에 대한 작가의 찬양은 정말 마라톤과 글쓰기의 무게 추를 동률로 말하는 모습이 마치 친밀했던 진지한 선배와의 어느 정도의 시점이 지난 후 만나서 나누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대화처럼 들렸다.
여하튼 국내 작가 중 김연수 작가만큼 마라톤 예찬론자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이를 들어감에 따라 삶에 겸손과 경건함을 주는 것들에 관한 시선이나 이야기들에 끌리는 것 또한 삶의 또 다른 변화이자 흐름인 것 같다. 또한 겸손과 경의, 경건 같은 감정에 대해서 젊은 시절과는 다른 마음의 상태에 이르를 수 있다는 것이 나이가 주는 좋은 방향성 중 하나가 아닐까!
'지지 않는다는 말'이라는 제목도 단호함의 느낌보다는 조용하지만 삶을 놓지 않는 단단함과 담백함의 느낌이 전해져서 좋았다. 또한 작가의 유머러스한 이야기에서는 여전히 킥킥거리는 웃음이 나와서, 김연수 작가의 에세이의 유머로 오랜만에 책을 읽으면서 웃었다. 아이가 왜 웃냐면 와서 묻고 내가 읽던 문장을 읽고 같이 웃었다. 그 문장들이 누군가를 조롱하거나 괴롭힘이 아닌 자신의 상태를 객관화하면서도 유머로서 환기시켜주는 글들이라서 더 좋았다.
작가의 작품을 최근 발표작부터 거꾸로 읽은 경우지만 작가의 경향이라고 할까, 작가의 글에서 느껴지는 사유의 바탕을 되짚어 본 느낌이다.
40대를 넘어서 20대와 30대의 지난 시절의 이야기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지금 현재의 충실함과 기쁨, 연대와 공감의 정서가 흐르는 글들이 유머와 문학적 문장들의 담백한 조합이다.
맑은 날에는 맑은 날을, 흐린 날에는 흐린 날을 겪는다.
마찬가지로 매 순간 달라지는 세계에서는 우리 역시 변할 때 가장 건강하다. 단단할 때가 아니라 여릴 때.
여리다는 건 과거나 미래의 날씨 속에서 살지 않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약한 것들은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여리고, 쉽게 상처 받고, 금방 지치는 사람이다. 다행히도 원래 우리는 모두 그렇게 태어났다.
_하늘을 힐끔 쳐다보는 것만으로
고독은 뭐랄까, 나는 영원히 살 수 없는데 이 우주는 영원히 반짝일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의 감정 같은 것이다.
_도시에 공급하는 고독의 가격을 낮춰 주기를
아름다움과 시간은 상호보완적이었다. 곧 사라질 것이 아니라면 아름답지 않다. 한편으로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삶이 결국 아름다워질 수밖에 없는 건 결국 우리는 모두 죽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_2009년 하늘의 목록
오래 산 사람과 그보다 덜 산 사람이 서로 뒤엉켜 살아가되 오래 산 사람은 덜 산 사람처럼 사려 깊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_롤러블레이드 할아버지, 에스프레소 할머니
두번째로 달린다면 아마도 고통보다는 다른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고 관찰하고 경험할 것이다. 그걸 아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고통에게 끌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 더 달리면 그 정도로 집중해야만 하는 고통은 많지 않다는 걸, 사실 고통이란 내가 얼마나 많이 달렸는가를 알려 주는 신호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 고통은 우리의 자원을 완전히 점유하고서는 모든 게 소진될 때까지 빨아들인다. 고통이 생기면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해진다.
_한번 더 읽기를 바라며 쓰는 글
누군가 우리 곁을 떠나고 난 뒤에 우리가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해 기댈 곳은 오직 추억뿐이다. 추억으로 우리는 죽음과 맞설수도 있다.
혼자서 고독하게 뭔가를 해내는 일은 멋지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결국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_혼자에겐 기억, 둘에겐 추억
왜 20대에는 제대로 산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고, 모든 게 갑자기 부질없어 보이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20대에는 결과는 없고 원인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도 20대란 씨 뿌리는 시기이지 거두는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청춘이라는 단어에 '봄'의 뜻이 들어가는 건 그 때문이겠지. 20대에 우리가 원할 수 있는 건 결과가 아니라, 원인뿐이니까.
하지만 매일 달리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다.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때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때, 우주는 우리를 돕는다. 설명하기 무척 힘들지만, 경험상 나는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다.
_어쨌든 우주도 나를 돕겠지
우리가 고통과 슬픔을 참아 내는 것은 오직 인간으로서의 관용 덕택이다. 그렇지만 삶은 고급예술이다.
_호수가 얼어붙은 날의 문장들
그렇다면 젖지 않는 방법은, 쓰러지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나 자신이 너무나 투명해지는 일이었다. 물방울처럼, 유리처럼 투명해지는 일이었다. 스스로 속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봐 겁내지 않는 상태. 아닌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말하는 상태.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건 대단히 가슴이 떨린다. 왜냐하면 거기까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이기 때문이다.
_물방울처럼, 유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