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트레버의 대표작 『루시 골트 이야기』. 줌파 라히리, 이윤리,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와 같은 현대 영문학을 이끄는 최고의 작가들이 사랑하는 작가이자 존경하는 작가로 꼽는 저자의 이 소설은 2002년 맨부커상, 휫브레드상 최종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명료하고 균형 잡힌 문장, 인간의 감정에 대한...
몇년전에 사두고 읽으려고 몇번 시도했다가 번번히 집중하지 못하고 포기하다 이번에 읽었다.
이상하게 이번에도 길을 잃듯 몇번 이야기를 놓쳤다.
세계문학 단편집 현대문학판으로 트레버를 읽은게 다였기에 그의 작품 세계를 잘 이해할 순 없었다.
아름다운 마을에서 우연한 불운으로 인해 이사를 가야하는 루시에게 운명이 송두리째 바뀌는 사건이 생긴다.
루시는 죽음과도 같은 시간을 지내다 살아난다.
절망과 쓸쓸함, 삶이 처연함이 질척거림 없이 건조하게 잘 전달 됐다.
하지만 자꾸 어딘가 집중력이 떨어졌다. 아마도 그 쓸쓸한 정서를 나 자신이 거부한건 아닐까.
어디로 가게 될지 궁금하면서도 상상할 수 없는 어딘가에 대한 생각을 견딜 수가 없었다. p.20
“너에게는 늘 지붕이 있을 거야, 루시” 아빠가 약속했다. “우리는 모두 새로운 것에 익숙해져야 해. 그래야 합니다, 레이디.” p.27
자신이 기억하는 것이 사실인지 스스로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날 아침 고립감을 느꼈다. p.128
스물한 살의 루시 골트에게 세상은 그 정도로, 네더필드에 가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p.137
내리긋기와 둥근 고리, 흐름과 필체에 관한 모든 지침을 따르는 묘하게 완벽한 글씨로 쓴 루시 골트의 편지가 마침내 도착했다. (중략) 세상의 모든 시로도 이 이름을 확인했을 때의 힘을 포착할 수는 없다. 레이프는 확신했다. 세상의 모든 시도 너도밤나무 잎이 무성한 가지들 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때 그가 느낀 행복감을 반영하지 못한다. (중략) 모든 것이 달라진 이 몇 시간 동안 짧은 몇 문장과 이름을 적은 필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은 무척이나 기쁜 일이었다. p.158
두 사람은 바다 가장자리에서 포옹했을 때 서로의 입술에서 소금기를 맛보았다. 흠뻑 젖은 루시의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헝클어지고 뭉쳤으며 레이프의 머리카락은 두피에 딱 달라붙었다. 폭풍우의 흥분이 그들의 사랑만큼이나 완전하게 그들을 속박했다. 평생 두 번 다시 이만한 행복이 있을까? 루시는 생각했다. p.199
대위는 이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지 않은 말이 너무 많았다. 서로 사랑했기에 직감이 발달했고, 직감에 의지하여 말을 절약하는 지름길로 가는 데 익숙해지면서 무심하게 너무 많은 것을 가슴속에 그대로 묻어두었다. p.241
레이프는 늘 제재소에 있는 것이 더 편했다. 실제적인 일들이 안도감을 주었다. 톱의 윙윙거리는 소리와 대패의 갈아내는 소리, 집중하고 조심하는 사람들, 땀과 송진과 먼지 냄새는 감정을 하찮게 만들었다. 그는 책임자였고,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나 기계와 사람들을 굽어보는 사무실로 통하는 사다리를 올라가면, 문을 닫아 소음이 꽤 잦아들었지만 그래도 작게는 남아 있을 때면, 그의 생각은 너무 쉽게 탈주해버렸다. p.279
“맬리의 비탈을 살까 생각 중이야.” 그가 어느 날 저녁 말했다.
“밭요?”
“그걸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사실 불모지에 가깝지.”
“불모지를 왜 갖고 싶은데요?”
“땅을 정리해서 물푸레나무를 기르려고. 아니면 단풍나무나.”
투자다, 그는 말했다. 뭔가 마음을 쏟을 만한 일이다, 하고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를 자신이 속한 곳에 붙들어 줄 일이라고. 실제로 벌어지기 전에 미래에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 내기를 거는 것이라고. p.282
그녀의 고요함이 그들에게는 놀라움이다. 그것 때문에 여기에 오고, 이런 평화가 있다는 데 다시 한 번 놀란다. 그들이 들은 모든 이야기, 그리고 지금도 듣고 있는 이야기는 그것을 기록하지 않는다. 오래전 우연이 아주 잔인했을 때 재난이 하나의 삶의 형태를 만들었다. 재난이 지금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의 형태를 만들고, 재난이 그런 이야기가 존재하는 이유다. 게다가 그들이 아는 것은 그런 불행에서 거둔 부드러운 열매가 아닌가?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녀는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이미 느꼈다. p.372
그녀는 창가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아 수국의 어둑한 푸른빛을 물끄러미 내다본다. 진입로는 어슬어슬해져 나무들의 윤곽이 하늘을 배경으로 또렷하다. 매일 저녁 이 시간이면 그러듯 떼까마귀들이 내려와 풀밭을 헤저으며, 하루가 희미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그녀의 벗이 되어준다. p.379
내맘대로 정하는 2017년 올해의 책 중 한 권.
어린 시절 자신의 섣부른 행동 때문에 자신과 가족이 겪어야 했던 불행.
스스로 행복해지기를 거부한 채 모든 불행이 자신의 탓인 듯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한 소녀
그 소녀를 외면하지 않고 돌보는 주위 사람들
종교는 다르지만 어우려져 가는 모습을 보며
결국 삶이라는 것이 치열한 전쟁이 아님을, 전쟁처럼 살지 않아도 꽤 괜찮은 삶임을 깨닫게 해준다.
반목했던 모든 것과의 화해, 그리고 용서를 통해 치유받고 위로받는 그런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