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케 마리코는 ‘호러 소설의 명수’로 잘 알려져 있지만, 굵직굵직한 수상 이력이 증명하듯 장르를 넘나드는 노련한 작가이기도 하다. <달밤 숲속의 올빼미(月夜の森の梟)>는 국내 첫 소개되는 그의 에세이로, 암으로 투병한 배우자의 곁을 지킨 시간 그리고 이후 남겨진 자로서의 시간을 담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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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숲속의 올빼미 (상실의 계절을 보내는 이들에게 건네는 일흔 소설가의 애도 에세이) 내용 요약
달밤 숲속의 올빼미는 고이케 마리코가 쓰고 김난주가 번역한 에세이로, 2022년 시공사에서 출간되었다. 📖 일본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고이케 마리코는 70대에 접어들며 삶의 상실과 애도를 섬세한 문체로 풀어낸다. 이 책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건강의 쇠락, 삶의 덧없음을 마주한 저자가 ‘올빼미’라는 상징을 통해 고독과 치유의 시간을 그린다. 제목은 달밤 숲속에서 홀로 울부짖는 올빼미처럼, 상실의 계절을 보내는 이들
마치 소설 제목같은 <달밤 숲속의 올빼미>는 "상실의 계절을 보내는 이들에게 건네는 일흔 소설가의 애도 에세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아~! 이 두 제목을 읽는데 벌써부터 울컥한다. 아마 내가 가까운 이를 잃지 않았다면 결코 공감하지 못했을 제목에 감정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는 이유가 간접 경험을 위해서라지만 상실에 대한 경험은,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진짜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나처럼 이기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에게는.
서문을 읽어본다. "남편, 후지타 요시나가의 죽음을 애도하며"라는 제목의 작가의 글은 이 에세이를 쓰게 된 동기가 담담히 적혀 있다. 37년 전, 사랑에 빠져 소설가를 꿈꾸며 함께 살기로 한 두 사람.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자신들을 묶어놓고 싶지 않아 세간의 이목같은 건 상관하지 않고 함께 할 삶을 결정한다. 아이는 처음부터 낳지 않기로 했다고. 온전히 두 사람에게 집중하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하는데 이 두 사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든다. 그럼에도 11년 전에는 혼인신고를 했단다. 그리고 2018년, 남편에게 폐암이 발견됐다. 1년 10개월의 투병과 간병을 지나 두 사람은 이별하게 된다. 이 책은 그 이후, 고이케 마리코, 후지타 부인의 남편을 그리워하는 절절한 마음을 담은 책이다.
첫 글 "올빼미가 운다"를 읽는데 ... 작가의 상황이 너무나 눈에 선하게 보였다. 이제 남편이 없는 자리, 작년과 몇 해 전과 하나도 다름없이 내 주변의 풍경, 계절은 돌아오는데 남편만 없다. 그때 느꼈을 상실감이 너무나 크게 공감됐다.
"기억은 버릴 수가 없다. 버렸다고 생각해도 뜻하지 않은 곳에서 고개를 불쑥 내민다."...50p
"시간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히 흘러간다. 그제 밤에는 올 들어 처음으로 올빼미 우는 소리를 들었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떴고, 숲속 여기저기 울어대는 올빼미 소리에 문득 아득해지는 현실감을 느낀다. "...159p
신기하게도 누군가를 잃고 나면 그 사람과 나빴던 감정과 기억보다 좋고 행복하고 즐거웠던 감정과 기억이 훨씬 더 짙게 남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지는 것 같다. 무심하게 일상이 흘러가지만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런 공감의 순간을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아주 잘 드러낸 것 같다. 나 혼자만 그런 건 아니구나~ 하며 그렇게 다시, 일상과 함께 기억한다.
죽기 몇 주 전 남편이 내게 말했다. “나이 든 너를 보고 싶었어.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니 섭섭하다.”
들을 때는 몰랐는데 눈물 나는 이야기를 했던 거구나,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영정 속 얼굴은 거기서 시간이 멈춘 채 영원히 변치 않는다. 이제부터는 나만 나이를 먹는다. 세월이 흘러, 아들의 영정 앞에 합장하는 노파로 보이는 날도 언젠가는 찾아오리라. 시간은 막무가내로 흘러간다.
삶과 죽음은,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보자면 아주 작은 점일 뿐이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커튼을 닫고, 외등을 켜고, 고양이와 나를 위한 식사 준비를 시작한다.
괴로움을 겪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도중에 말을 끊고 자기 의견을 낸다거나 흔한 격려의 말을 해 봤자 역효과만 난다. 깊은 우울감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무턱대고 힘내라고 한들, 그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예전의 나는 개를 더 좋아했고 고양이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런 내 앞에서 절절한 슬픔을 토로하며 한참을 울었던 친구가 있다. 사랑하는 반려묘를 떠나보낸 지 얼마 안 된 친구였다. ‘고양이가 아니라 개였다면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생각으로 안타까워하며 “얼른 힘을 내야지” 라며 바보 같은 소리나 했다.
부모님 두 분 다 무탈하시고 건강했을 때, 부모님 간병에 지쳐 괴로워하던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에 공감을 표했으나, 실은 아무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오만한가. 같은 경험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리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때로는 그게 몇 십 년 후의 일이 되기도 한다. 시간의 간격을 두고 겨우 알게 된 감정들. 그 감정에 허둥대면서도 먼저 겪어 낸 그들이 했던 말이 차례차례 떠오른다. 더 길게 살아 내고 있는 자들 사이에, 슬픔을 매개로 한 연대가 형성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힘내’라는 종류의 말도 최선을 다해 애쓴 말임에 틀림없다. 그 말 안에 악의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어떻게든 격려하려 애쓴다는 것을 알기에 그 말을 듣는 사람도 고맙게 받아들이는 척을 하게 된다.
‘수난’을 뜻하는 영어 단어 중에 ‘Passion(열정)’이라는 단어가 있다. 수난이란 본래 십자가에 묶여 책형에 처해진 그리스도의 고난을 뜻하는 단어로, 평소 우리가 쓰는 ‘열정, 격정’이라는 단어와 ‘수난’이라는 단어는 영어에서 그 어원이 같다.
꽤 오래전 이 사실을 알게 된 뒤로, 인생에서 겪는 수난을 뒤집어 보면 열정을 최대치로 쏟았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열정은 때로 깊은 고뇌로 그 모습을 바꾼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수난과 열정은 이질적인 것 같으면서도 실은 뿌리에서 서로 분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상실의 비탄이나 미칠 것 같은 절망 또한 치열한 Passion이다 남겨진 자의 고뇌는, 스스로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생명의 힘’과 등을 맞대고 있을 것이다.
새해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한쪽에 쌓아 둔 남편의 청바지가 우르르 무너졌다. 고양이들이 그 위를 뛰어다니다가 발톱에 걸려 바닥으로 쏟아진 모양이었다.
계기란 참 희한한 것이다. 유품 정리를 도무지 못할 것 같던 내가, 어느새 주방에 가서 쓰레기봉투를 챙기고 있었다. 마음은 놀랄 정도로 평온했다. 쓰레기봉투 세 장에 남편의 청바지를 나눠 담고 그대로 차를 몰아 근처 쓰레기 분리 배출소로 옮겼다.
날은 포근했고 겨울 오후의 가냘픈 햇살이 근방에 내리쬐고 있었다. 섣달그믐에 내려 단단하게 얼어붙은 눈이, 그 기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살아 있는 이상 사람은 누구나 자의식에 시달린다. 예외는 없다. 자의식은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것이며 막연한 불안과 방황, 분노와 슬픔, 끝내는 고독감마저 불러온다. 희만도 절망도, 모두 자의식의 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