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 시인선' 451권. 박진성의 세번째 시집. 첫 시집 <목숨>, 두번째 시집 <아라리> 이후 6년 만이다. 그간 온 힘을 다해 시로써 자신을 증명하는 숨소리를 내어왔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자기 증명을 넘어 타인의 통증 곁에까지 당도하려 시도한다.
꽃잎에 수천 톤 욕망이 앉아 있다
육중한 신체가 타오르고 있다
여름의 한가운데 여린 불기둥
아서라, 꽃잎에는 아무것도 없다
쪼그리고 앉아 한 잎 먹으면
피가 잘 돌겠다
가까스로 사랑의 입구에 서 있다
- ‘제라늄’, 박진성
잠 속이에요
비가 옵니다
감각이 젖었습니다
건기를 지나며
불면은 새의 뼈를 얻었습니다
감정이 있을까요
감각으로 움직이는 새의 공중,
잠 속이에요
신체와 느낌이 가장 멀어지는 운동
외가와 친가가 섞여 난투극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멀리 있는 그들
나는 없어요
벚나무에서 은행잎이 떨어집니다
야구장 매표소 직원이
티켓 대신 손목을 나누어 줍니다
감정은 지난여름 인조 잔디에 버렸고
감각은 전지훈련 중입니다
애인이 사고로 죽어
유언을 듣지 못했어요
유언을 들을 수 있는
악기를 고용해야 해요
그리고 기근의 이유를 물어야 합니다
잠 속이에요 꿈에,
감정이 있을 리가요
투명한 비닐우산에
빗방울의 근육이 달라붙습니다
빗속에서, 빗속에서
가까스로 잠 한 채를 지었습니다
- ‘11월’, 박진성
광기는 이제 지친 것 같다
발아래, 말 아래 꽃들이 핀 적이 있는 것 같다
강요된 용서로 길고양이를 품고 집에 온 것 같다
여기로 상류가 흘러오고 저기로 하류의 문이 열리고,
같다, 그림자가 쓰러져야 그림자 속인 것처럼
마음을 버려봐야 마음 안인 것처럼
안과 밖이 없는 것 같다
노래가 응고된 리듬만 들고서 심장에 박힌 것 같다
같은 평화는 같은 계쩔은 없는 것 같다
처음 우는 아이는 처음 우는 게 아닌 것 같다
그 모든 나뭇잎은 우리들의 혓바닥 같다
아픈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나와 화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너와 같아지는 게 두려운 것 같다
- ‘처음 우는 아이는’, 박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