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류학자 송병기가 터부와 혐오를 넘어 우리의 일상과 공동체를 ‘죽음’이라는 렌즈로 들여다본다. 노화·돌봄·죽음을 연구하는 의료인류학자로 생애 말기 현장 연구를 해온 저자는 《각자도사 사회》에서 집, 노인 돌봄, 호스피스, 콧줄, 말기 의료결정에 이르기까지 생애 말기와 죽음의 경로를 추적한다.
죽음과 관련한 현재의 복지 정책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내놓는 책이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행정주의식 제도들과 현장에서 고생하는 공무원들의 수고로움(사실상 애처로움)을 생생하게 담아두었다.
그러나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다양한 키워드(제사, 현충원, 웰다잉, 냉동 인간, 영화관 등)를 중심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만한, 아니 생각해 보아야 할 죽음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제시한다. 그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개념들을 읽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뒤로 갈수록 재미있는 사회학 책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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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어머니를 사망 직후 냉동 인간으로 만든 아들, 어머니는 이미 사회적으로 사망한 존재이다. 100년 뒤에 어머니가 정말로 깨어 난다면 사회 속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 어머니의 나이는 80세인가, 180세인가. 어머니는 살고 싶어 했으나 냉동 인간이 되겠다 한 적은 없다. 그녀의 삶에 대한 의지는 100년 뒤 가족이나 지인 한명 없이 혼자 깨어 살아가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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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6.25 전쟁 당시 사망한 국군의 유해의 가족을 찾아주고, 경건하게 예를 갖추어 현충원에 안치한다. 그러나 사실상 전쟁 당시 민간인 피해가 몇 배로 많았다는 사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어째서 우리는 군인의 유해만을 국방부를 통해 찾는 것일까?
고인에 대한 극진한 공경을 의하는 현충원마저 계급에 따라 면적을 할당한다는 것을 알고 껄끄러워졌다. 살아서 누린 혜택으로도 충분하지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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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마음에 드는 사회학 책은 꼭 보면 어크로스 책인 듯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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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기 의료결정은 선언적 가치, 의료 윤리, 소통 기술 등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병원의 운영체계, 한국의 의료 다양성, 의료진의 태도, 보호자의 돌봄, 가족 삶의 조건, 환자의 몸 상태 및 인식 등이 뒤얽혀 협상을 벌이는 ‘정치적 행위’에 가까웠다. 요컨대 말기 의료결정은 환자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환자가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일이었다. 환자, 보호자, 의료진은 저마다의 이유로 ‘죽음의 타이밍’을 고민했다. 죽음은 타이밍의 문제였다. (p.115~116)
#틈새독서챌린지
황정은 작가와 저자와의 팟캐스트를 듣고 읽게 되었다.
죽음은 점점 삶의 화두가 되어 간다. 돌봄과 존엄사에 대한 생각들은 또래 친구들의 대화의 주제로 자주 오르내린다.
돌봄을 하는 주실행자로서 살아가면서도 나의 돌봄과 죽음에 대해서는 현시점의 모습들이 과히 마음에 들지 않을뿐더러 다른 생의 마감을 꿈꿔보고 싶기에 더 이상 미루어 생각할 문제들은 아니구나 싶어진다. 그러한 까닭에 이런 주제들의 책을 읽게 된다.
팟캐스트에서 인상적이었던 말은 '상상력'이었다. 죽음에 대한 다른 상상력을 가지고 논의해야 한다고.
다른 상상력이란 지금의 죽음에 관한 모습에 대한 아연함으로 새로운 상상력으로 존엄의 개인성을 구현되는 나의 미래를 꿈꿔보고 싶기 때문에 더욱 귀에 새겨진다.
주사위 놀이는 얼핏 보기에는 평등한 것 같지만 사실은 불평등한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주사위 놀이의 인기 비결은 불평등함에 있다.
우리 삶이 불평등하면 할수록 주사위 놀이는 '아찔한 모험'이자 '합리적 투기'가 되어 세간의 관심을 끈다. 반면, 어떤 주사위를 던져도 누구나 존엄하게 살고, 늙고, 아프고, 죽을 수 있다면 그 놀이는 시시한 장난에 그칠 것이다.
들어가며 중에서
<들어가며>에서 저자는 오늘날의 죽음을 마치 주사위 놀이와 같다고 한다. 주사위 놀이는 양면적 성격으로 하나는 우연, 운, 기회,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투기, 모험, 위험, 사행성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대단히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그렇기에 죽음에 대한 금기와 공포가 커진다. 뽑기운이 임종의 모습을 가늠하게 하는 까닭에 소수의 죽음만이 호상이라는 말로 불리운다.
1부 각자 알아서 살고, 각자 알아서 죽는 사회
생애 말기 돌봄이 환자와 돌봄 제공자의 '삶의 조건'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생애 말기 돌봄의 형성 과정(젠더화와 시장화)은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돌봄 수혜자의 삶 또한 취약하게 만든다. 언론에서 고발하는 시설 내 노인 학대나 환자 소외의 본질을 노동자의 도덕성이나 전문성 결여가 아니라 흔들리는 삶의 조건에서 찾아야 한다. 존엄한 돌봄과 임종을 희망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운(가족운, 간병인운 등등)이 좋아야 한다. 생애 말기 돌봄 앞에서 그렇게 사람들은 각자도생 혹은 각자도사하고 있다.
그렇게 집 안의 구체적 목소리들은 '사적'이라는 이유로 힘을 잃었고, 집 밖의 특정한 기준들은 '공적'이라는 이유로 활개를 쳤다.
존엄한 죽음 집 그 자체가 아니라 공적 세계에 울려 퍼지는 '집 안의 목소리들'에 달려 있다.
1.집_ 좋은 죽음을 보장하는 장소인가?
_첫 장에서부터 책의 핵심 주제를 짚는 느낌이었다. 매스컴을 통해서 접하고 주위에서 듣는 돌봄과 간병, 임종에 관한 현실의 풍경을 건조하게 말하고 있는데, 그 건조함이 객관성과 대안적 방법에 대한 시선이 전해졌다. 저자가 생애 말기 돌봄에 관해서 밀도 있는 연구를 하고 있다는 점이 더 읽는 힘을 주었다.
돌봄과 의료는 요양원과 요양병원 사이에서 뒤죽박죽이 되고 있다. 환자, 보호자, 의료진, 돌봄 노동자가 현행 제도에 만족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국가는 '정상 가족'을 기대하기 힘든 시대를 위기로 상정했고, 발전에 쓸모 있는 인구와 쓸모없는 인구를 분류했다. 의존적 노인은 이러한 정치적 상상과 인식 속에서 선별되고 의료적, 생물학적 차원으로 규정된 '인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의존적인데, 마치 노인만 의존적인 존재인 것처럼 딱지를 붙인 셈이다.
한국의 노인 돌봄은 여러 각도로 검토해야 하는 주제다. 그 논의는 노인을 자유롭고 평등한 동료 시민으로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2. 노인돌봄 _노인은 국가의 짐인가?
_흔히들 너도 늙어봐라, 너는 늙지 않을 것 같니?라는 말들의 울림이 비로소 체감된다. 아이의 양육과 달리 노인의 돌봄은 더 큰 부담감과 균형점을 찾기 쉽지 않다. 그러면서도 나 역시 늙는 존재인데, 이런 현실의 모순과 사회, 문화적 인식이 불편하고 서글픈데도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아서 답답할 따름이다. 저자가 말하는 동료 시민으로서의 인정이 실현되는 한국 사회가 도래할 수 있을까?
복지 서비스는 돌봄의 내용이나 가족의 관계보다는 '빈곤의 측정'에 관심이 많다. 그러고 보면 포럼에서 공무원이 말한 '자기 결정권이 있는 노인과 그를 돌보는 가족'은 애당초 복지 서비스의 대상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현장에서 취약계층과 보건복지라는 개념은 상호작용하며 불평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정부의 정책은 할머니 삶의 조건보다는 할머니의 '취약함 그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 할머니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할머니가 취약한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커뮤니티 케어 정책은 '어려운 어르신들'을 샅샅이 찾아내 그 명단의 크기를 확대하는 일었다. 그 명단이 '노인 게토'만들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3. 커뮤니티 케어 — 누구나 말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정책
_어르신들이 나오는 고향 또는 시골 관련 프로그램을 보면 비슷한 불편 서사가 나온다. 패널들이 그 불편을 찾아가서 개선해 주지만 어르신들은 고향을 지키면서 여전히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서사들. 이 장에서는 이런 어르신 고향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젊은이들이 떠나 노인들만이 사는 지방 소도시의 모습. 생활이 불편해지는 곳에서 점점 더 힘들어지는 노인들의 모습에서 저자의 말처럼 커뮤니티 케어 정책이 무엇인지 끝내 알 수 없을 것 같다.
호스피스는 말기 돌봄이 의료 기술 및 제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들을 조합하고 활성화할 수 있는 돌봄 제공자의 삶의 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드러낸다.
치료가 아닌 돌봄과 관계가 있는 말기라는 시간은 지리멸렬에 빠지기 십상이다. 환자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면 그제야 '말기' 딱지를 붙인 채 호스피스 전원이 이뤄진다.
호스피스를 '죽으러 가는 장소'가 아니라 모든 환자를 위한 '환대와 돌봄의 시공간'으로 더 과감하게 상상해야 한다. 시민들이 호스피스를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는 사회라면 죽음의 풍경도 달라질 것이다.
4. 호스피스_왜 호스피스는 ‘임종 처리’ 기관이 되었나?
_조금 달라진 것이라면 근래에는 호스피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개인의 생각들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나 사회적 인식에 따르지 못하는 의료 현장과 시스템이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곳으로 안락사라는 이름의 죽음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자의 상태와 삶이 질을 '충분하게' 향상시키지 않고 수명만 연장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 시술은 무의미한 연명의료가 될 수 있다.
고령화사회가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된 문제를 윤리의 이름을 가족, 특히 여성(요양보호사, 간호사, 딸, 며느리 등) 책임으로 전가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존엄하지 못한 돌봄의 경험은 결국 존엄하지 못한 죽음으로 이어진다. 생애 말기 돌봄을 담당하는 주체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지 않으면서 의료적, 생물학적 돌봄만을 최선으로 여긴다.
5.콧줄_ 콧줄 단 채 생의 마지막을 맞아야 할까?
_저자의 통찰이 돋보이는 장이었다. 무의미한 연명의료가 문제이지만, 과연 자연사가 어떤 과정에 이른 자연사인지 존엄한 죽음의 질에 대한 밀도가 깊었다. 또한 돌봄 제공자의 경험이 존엄한 죽음으로 귀결되지 못한다는 논의에서 통찰이 보였다.
문제는 남성 환자의 특성과 보호자의 의료 집착이 말기 의료 결정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정확한 의료적 판단과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한 의사의 입장에서는 '좋은 죽음'이었을지도 몰라도 환자가 떠난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 보호자의 입장에서는 큰 상처이자 '나쁜 죽음'이었다.
보호자의 돌봄이 공론화되지 못하는 현실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의료 현장에서 남성 환자의 침묵에 대해서는 모두 관심을 가진 반면에, 여성의 돌봄은 논의 주제도 되지 못했다. 남편, 아들, 부모까지 돌보면서 주변화되는 보호자의 일상은 침묵에 잠겼다. 그는 의료진과 환자의 눈치를 봐가며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환자 치료에 전념하는 의료진에게 중요한 파트너였다. 의료진이 말기 의료결정 국면에서 그런 보호자를 두고 '가족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환자와 의료진 모두 보호자(여성)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환자의 목소리가 공적으로 울려 퍼지려면 '환자의 자율성'만 강조할 게 아니라 그의 일상을 떠받치는 '돌봄'을 정의롭고 평등한 방식으로 재배치해야 한다.
6 말기 의료결정 — 누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까
_가장 힘들고 가늠하기 힘든 결정이 아닐까. 말기와 임종기의 혼용은 더욱 죽음의 타이밍에 대한 결정권을 갖게 하는 걸 힘들게 한다. 죽음은 타이밍의 문제라는 말이 깊이 박힌다.
환자의 건강은 '충분히' 증진되지 않은 한편, 보호자의 간병 부담은 '무한히'커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장기간 간병에 따른 낙담과 경제적 어려움은 이른바 '간병 살인'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안락사의 '효과'가 아니라 오늘날 안락사가 논의되는 '방식'이다. 안락사가 전제하는 고통은 왜 개인적 수준에서만 논의되는가? 개인의 고통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맥락은 어디로 증발했는가?
안락사에 대한 열망, 바꿔 말해 죽음이 존엄, 권리, 고통의 문제가 된 현상은 의미심장하다. 그 열망은 불평등하고 취약한 삶의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7 안락사 — 왜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죽음을 앞당기고 싶어 할까?
_이 장에서는 개인의 고통이 미치는 사회적 맥락에 대한 성찰과 보다 많은 논의가 일어나야 한다는 걸 강조하는 저자의 외침이 또렷이 들린다. 각 장마다 저자의 분석과 그 분석을 통한 논의들은 촘촘히 순도 높게 쌓여서 더 많은 말들과 정책, 시스템의 완성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2부 보편적이고 존엄한 죽음을 상상하다
제사편에서 제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았다. 해방 이후 제사가 갖는 함의를 저자의 이 글에서 알게 되었다. 그저 가부장제의 시스템 속에서 여성들을 억압하는 풍속일 뿐이라는 생각이 더 컸다. 자라면서 또 집안에서 내가 경험했던 제사에서 여성은 타자였고, 힘든 가사 노동의 추가일 뿐이었기에. 저자의 말처럼 '오늘의 신성한 의례'에 대한 말을 하면서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를 제시했던 점이 반가웠다. 나 역시 인상적으로 읽었던 소설이다.
무연고자편에서의 자기결정권은 또 그 의미가 복잡다단해서 개인의 죽음이 사회화로 넘어갈 때 개인성이 사라진 채 연명되다가 맞게 되는 죽음의 불평등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또한 정상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1인 가족과 동거가구 비혼 가구와 같은 형태의 가족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인정하는 사회체계와 규범의 필요성도 뚜렷이 인식했다. 생활동반자법은 언제 국회에서 통과되어 법적인 효력을 발생할 수 있을까?
현충원편에서 죽음의 기억조차도 국가 통치적 서사와 연결된 죽음만을 인정하는 씁쓸한 서사를 보았다.
웰다잉편에서는 능동적인 죽음 준비 과정이라는 담론으로 한국 사회에 정착되었지만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집고 있다. 불평등한 삶의 조건에 놓인 이들에게 웰다잉이란 또 다른 사회적 성공 담론이 아닐까?
냉동인간편에서는 영화<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서사를 가져와서 기술적으로 연장된 삶이 인간의 삶으로 수용될 수 있는지 묻는다. 이 영화를 보면서 벤자민의 인생에 관한 서사가 꽤 강렬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아기가 되어 죽음을 맞이한다는 설정과 가족들과의 관계의 변화가 꽤나 역설적이었다는 느낌이었다.
영화관편에서는 이런 생각으로 영화관이라는 문화적 공간에서 삶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고 함께 관람하면서 같이 공유해 본다는 생각이 다른 관점과 시선의 참신함을 느꼈다. 개인의 문화적 취향의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영화관에서 사회적 맥락과 논의를, 또한 죽음을 통해서 희망을 비추는 장소라고 말하는 저자의 생각의 폭이 다층적이고 신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