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영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이언 매큐언의 최고작이자 전 세계적인 메가셀러 『속죄』를 새롭게 선보인다. 출간 20년 만에 새롭게 펴내며 보다 세심하게 다듬어진 번역을 통해 이언 매큐언의 작품세계를 더욱 완성도 높은 판본으로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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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내용 요약
《속죄》(Atonement)는 이언 매큐언(Ian McEwan)의 대표작으로, 문학동네에서 2023년 2월 한정아 번역으로 재출간되었다. 📖 ISBN 9788954690799를 가진 이 소설은 2001년 출간 이래 부커상 최종 후보, 타임 ‘20세기 100대 영문소설’에 선정되며 세계적 찬사를 받았다. 2007년 키이라 나이틀리, 제임스 맥어보이 주연의 영화 《어톤먼트》로도 각색되어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음악상을 수상했다. 488쪽 분량의 이 작품은 1935년 영국 시골 저택을 배경으로, 열세 살 소녀 브리
이 소설에서 주인공 브라이어니가 지은 진짜 죄는 두 가지다.
첫째, '내가 본 것이 전부'라는 오만함이다.
어린 브라이어니는 어른들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자신이 상황을 전부 파악했다고 착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어낸 억측을 사실이라 믿으며 로비를 성폭행범으로 고발했다. 이 고발 하나로 로비와 세실리아의 인생은 완전히 망가졌다. 타인의 삶을 자기 맘대로 쉽게 판단하고 결론 내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둘째, 자기만족에 불과한 거짓 속죄다. 소설 후반부에 밝혀지는 진짜 현실은 참혹하다. 이미 로비는 전쟁터에서 병으로 죽었고, 세실리아 또한 폭격으로 죽었다. 두 사람은 브라이어니의 사과조차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늙은 브라이어니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 소설을 쓴다. 그리고 그 소설 속에서 로비와 세실리아가 다시 만나 행복해지는 결말을 만든다.
사람들은 이것을 숭고한 속죄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 냉정하게 보면 이건 살아남은 가해자의 자기위안일 뿐이다. 정작 피해자들은 죽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데, 가해자가 펜을 쥐고 "소설 속에서나마 행복하게 만들어줬으니 나는 할 일을 다 했다"라며 스스로 죄책감을 덜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이의 삶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 또 다른 폭력인 셈이다.
작가 이언 매큐언은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한번 망가뜨린 타인의 삶은 그 어떤 행동이나 아름다운 글귀로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 즉 진정한 속죄란 불가능하다는 점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속죄>는 슬프거나 아름다운 소설이 아니다. 내가 타인을 다 안다고 착각하는 순간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리고 남에게 상처를 준 뒤 스스로 위안을 삼는 행위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아주 서늘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member
그 일이 벌어진 것은 1935년 영국의, 기록적인 폭염이 내려앉은 단 하루였다. <속죄>를 읽으면서 나는 이 더위가 단순히 비극의 배경을 장식하는 날씨가 아니라, 비극을 천천히 숙성시키는 하나의 힘처럼 느껴졌다. 뜨거운 공기는 사람을 한순간에 무너뜨리지 않는다. 대신 생각과 감정 사이의 경계를 조금씩 흐리고, 평소라면 한 번 더 의심했을 판단을 너무 쉽게 확신으로 굳힌다. 돋보기가 흩어진 햇빛을 한 점에 모아 마침내 종이에 불을 붙이듯, 그날의 열기도 저택 안에 떠돌던 질투와 욕망과 오해를 서서히 한곳으로 모은다. 그리고 그 초점 한가운데에 열세 살의 브라이오니가 있었다. 그녀가 내뱉은 결정적인 증언은 어쩌면 갑자기 생겨난 악의라기보다, 하루 종일 달아오른 세계 속에서 상상과 현실의 경계가 끝내 뒤틀린 결과에 가까웠다. 불은 한순간에 붙었지만, 그 불을 만들기 위해 빛은 하루 종일 모이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의 가장 잔인한 비극이 거짓말 자체보다도 인간의 이해에 존재하는 시차라고 생각했다. 브라이오니는 열세 살이었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세상의 문법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판단을 유예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모르는 부분을 상상으로 메우고, 불완전한 이야기에 스스로 결말을 붙인 뒤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어버리기도 한다. 브라이오니 역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세계의 빈칸을 이야기로 채웠고, 그 이야기는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할 만큼 단단한 현실이 되었다. 정작 그녀가 자신이 무엇을 잘못 읽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이해는 늘 사건보다 몇 걸음 늦게 도착한다. 어떤 순간의 의미를 그 순간에 온전히 알아차리는 일은 거의 없다. 사랑하는 동안에는 그 사랑의 크기를 모르고, 누군가를 상처 입힐 때에는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이 남을지 알지 못하며, 무언가가 끝난 뒤에야 지나온 장면들의 의미가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다. 시간은 먼저 사건을 데리고 달아나고, 이해는 그 뒤를 한참 늦게 따라간다. 문제는 이해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이미 일어난 일을 추월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뒤늦게 도착한 깨달음은 과거를 비출 수는 있어도, 그 과거 속으로 들어가 손을 뻗을 수는 없다. 브라이오니가 평생 짊어진 죄책감도 바로 그 거리에서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된 순간에는 이미 아무것도 고칠 수 없다는 것. 어쩌면 후회란 모르던 사람이 아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 두 사람 사이에 생기는 시간의 틈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틈을 생각하다가 밤하늘의 별빛을 떠올렸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별은 언제나 현재의 별이 아니다. 수십 년, 수백 년 전에 출발한 빛이 이제야 우리의 눈에 닿는 것이고, 그 빛의 주인이었던 별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밤하늘은 어쩌면 현재의 풍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에 죽고 태어난 별들의 과거가 한꺼번에 겹쳐진 거대한 기억에 가깝다. 브라이오니가 뒤늦게 마주한 세실리아와 로비 역시 그런 별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온전히 이해했을 때 두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브라이오니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현재가 아니라 기억 속에 남은 빛뿐이었다. 아무리 오래 바라보고, 아무리 정확하게 그 빛의 근원을 헤아려도 사라진 별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세실리아와 로비가 실제로는 재회하지 못한 채 서로 다른 곳에서 죽었고, 우리가 읽었던 행복한 결말조차 늙은 브라이오니가 만들어낸 허구였다는 사실이 유난히 잔인하게 다가온다. 처음에는 그 결말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현실에서는 돌려주지 못한 삶을 소설 안에서 돌려주고,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화해를 허구 속에서 대신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바로 그 무력함 때문에 그것이 속죄에 가까운 행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라이오니의 소설은 죽은 별을 다시 살리는 힘이 아니라, 이미 사라진 별이 있었던 자리를 향해 끝없이 빛을 보내는 행위였다. 그 빛은 결코 그들에게 도착하지 않는다. 아무리 정교한 문장으로 두 사람을 되살려도 로비는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고, 세실리아 역시 물속에서 걸어 나오지 않는다. 문학은 죽은 사람에게 두 번째 삶을 건네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종이 위에 그 삶의 모양을 잠시 비춰볼 뿐이다.
나는 그래서 <속죄>가 속죄의 가능성보다 오히려 속죄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라고 느꼈다. 진정한 속죄라면 잘못을 없애야 할 것 같지만, 인간에게는 과거를 지우는 힘이 없다. 사과는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후회는 떠난 사람을 돌아오게 하지 않으며, 아무리 완전한 이해에 도달해도 이미 지나간 시간을 다시 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속죄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죄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끝까지 견디는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만든 상처를 시간이 희미하게 덮어주기를 기다리는 대신, 그 상처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 속에서 계속 바라보는 일. 브라이오니가 평생 글을 쓴 것도 자신을 무죄로 만들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이 유죄라는 사실에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책을 덮고 나니 문득 내 삶에도 이미 사라진 별들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하게 됐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야 이해되는 말, 떠난 뒤에야 비로소 알아들은 침묵, 너무 늦게 도착해 더 이상 건넬 곳이 없는 사과 같은 것들. 인간은 언제나 현재를 살고 있다고 믿지만, 어쩌면 우리의 마음은 대부분 뒤늦게 도착한 빛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거가 보내온 빛을 이제야 받아들고, 그 빛을 통해 이미 사라진 것들의 모양을 배운다. 그래서 깨달음은 고맙고도 잔인하다.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만큼 밝지만, 그 밝음으로도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속죄란 과거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 방향을 외면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브라이오니가 허구 속에서라도 세실리아와 로비를 다시 만나게 한 것은 그들의 삶을 구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는 평생 자신이 파괴한 삶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사라진 별에게 빛은 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 어둠을 향해 계속 빛을 보낸다. 아마 속죄란 바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용서받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라, 결코 닿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보내야 하는 빛. 그리고 인간은 어쩌면 그 빛이 목적지에 도착하는지가 아니라, 끝까지 그것을 보내는 방식으로 자신이 저지른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