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지옥편을 읽게 된 건, 한창 천국이나 지옥 같은 사후세계에 관심이 많던 시기였다. 죽음 이후에 뭐가 있을지 혼자 막연히 궁금해하기만 했는데, 이걸 700년 전에 이렇게까지 정교하게 그려놓은 사람이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지옥이 아홉 개 원으로 나뉘어 있고 죄의 무게에 따라 순서가 정해져 있는데, 그중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건 폭력보다 기만과 배신을 훨씬 무겁게 다룬다는 점이었다. 처음엔 좀 의아했다.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보다 속이는 게 더 나쁘다니. 근데 곱씹어보니 이해가 갔다. 폭력은 순간적인 충동으로도 일어나지만, 기만은 이성을 써서 상대의 신뢰를 계획적으로 무너뜨리는 일이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는 게 결국 이성이라는 건데, 그 이성을 남을 속이는 데 쓴다는 건 결국 인간다움 그 자체를 스스로 배신하는 셈이다.
각 층의 벌이 그 죄의 형태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도 계속 마음에 걸렸다. 욕망에 휩쓸리던 사람들은 사후에도 폭풍에 끝없이 휩쓸리고, 남을 속이던 사람들은 오물 속에서 자기가 뱉었던 더러운 말을 그대로 되돌려 받는다. 폭력은 눈에 보이는 상처를 남기지만, 기만은 그 사람이 세상을 믿는 방식 자체를 무너뜨린다. 상처는 아물어도 한번 깨진 신뢰는 잘 안 돌아온다. 요즘 보이스피싱이나 각종 사기 사건들을 봐도 그렇다. 몸엔 흉터 하나 안 남지만, 그 이후로는 낯선 전화 한 통에도 심장이 내려앉고, 가까운 사람의 호의마저 한 번 더 의심하게 되는 식으로 삶 전체의 태도가 바뀌어버린다.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그렇게 조용히 사람을 갉아먹는 쪽이 오히려 더 오래, 더 깊이 남는 거 같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도 스스로를 좀 돌아보게 됐다. 결국 기만이라는 게 남을 속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부터 속여야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렸을 때 엄마한테 했던 사소한 거짓말들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 보면 별것도 아닌 일들인데, 크게 혼났던 기억들은 오히려 흐릿해진 반면 그런 거짓말의 찜찜함만은 시간이 이렇게 지나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아마 그때도 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게 들키면 안 된다는 걸, 그리고 그게 엄마의 믿음을 이용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태연하게 넘겼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마음 한켠에 남아있는 이유인 것 같다. 남을 속이려면 그 전에 나부터 그 사실을 외면해야 하니까, 결국 오래가는 건 혼났던 순간이 아니라 스스로를 속였던 그 자각이다. 단테가 기만을 폭력보다 무거운 죄로 다룬 이유도, 어쩌면 이 지점과 맞닿아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결국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단테가 이 방대한 지옥을 설계한 진짜 이유가 사후세계 자체를 보여주려던 게 아니라 지금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되묻기 위해서였다는 거였다. 나도 한때 사후세계가 정말 있는지 궁금해서 이것저것 찾아본 적이 있는데, 결국 그 질문이 향하는 곳은 늘 죽음 이후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내가 매일 반복하는 선택들이었다. 사후세계에 대한 상상이라는 게 사실은 지금의 나를 더 정직하게 들여다보라는, 아주 오래된 장치였다는 걸 이 책을 읽고 나서 새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