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 인 골드

앤 마리 오코너 지음 | 영림카디널 펴냄

우먼 인 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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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책

출간일

2015.7.23

페이지

456쪽

상세 정보

영화 <우먼 인 골드≶의 원작인 이 책은 영화에서 다 표현하지 못한 역사의 진실과 감동을 전한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활동하던 당시의 예술적 발자취와 여전히 베일에 싸인 그와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와의 관계, 나치 독일이 점령한 오스트리아에서 자행된 유대인 박해와 그림의 상속자인 마리아 알트만이 겪은 가슴 아픈 가족사, 그녀가 해외로 망명하여 힘겨운 삶을 이겨내고 결국 유산을 되찾아 명예를 회복하는 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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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무튼" 시리즈를 가볍고 재미있게 읽어서, 이번 책도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완독 했을때 내 마음은 1톤이었다. 왜 본인이 비건이 됐는지, 그리고 어떻게 시작하고 유지하고 있는지, 비건에 대해서 자주 받는 질문과 이에 대한 답변을 매우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쓴 책이다. 솔직히, 이 분의 말에 100% 동의하진 못 하겠지만, 본인의 생각과 주장을 명쾌하게 나열해줬고, 나도 여러가지 고민과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고마운 책이다. 육식 말고도 먹을게 풍부한 세상에서, 굳이 내 혀의 감각을 위해서 나랑 똑같이 고통을 느끼고 얼굴이 있는 다른 동물을 잔인하게 죽여서 먹을 필요가 있을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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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먼 인 골드≶의 원작인 이 책은 영화에서 다 표현하지 못한 역사의 진실과 감동을 전한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활동하던 당시의 예술적 발자취와 여전히 베일에 싸인 그와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와의 관계, 나치 독일이 점령한 오스트리아에서 자행된 유대인 박해와 그림의 상속자인 마리아 알트만이 겪은 가슴 아픈 가족사, 그녀가 해외로 망명하여 힘겨운 삶을 이겨내고 결국 유산을 되찾아 명예를 회복하는 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출판사 책 소개

영화 〈우먼 인 골드〉 원작!
'세상을 유혹한 화가' 클림트와 '팜므 파탈' 아델레의 베일에 싸인 이야기.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로 불린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에 숨겨진 진실은...


영화 〈우먼 인 골드〉의 원작인 이 책은 영화에서 다 표현하지 못한 역사의 진실과 감동을 전한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활동하던 당시의 예술적 발자취와 여전히 베일에 싸인 그와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와의 관계, 나치 독일이 점령한 오스트리아에서 자행된 유대인 박해와 그림의 상속자인 마리아 알트만이 겪은 가슴 아픈 가족사, 그녀가 해외로 망명하여 힘겨운 삶을 이겨내고 결국 유산을 되찾아 명예를 회복하는 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2013년 캘리포니아 도서상 논픽션 부문 은상 수상
2012년 마필드 상 수상
2012년〈라이브러리 저널〉 올해의 책 10선 선정
2012년〈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논픽션 부문 올해의 책 선정
2012년〈허핑턴 포스트〉 최고의 예술 도서 선정
2012년 이그재미너닷컴 논픽션 부문 올해의 책 12선 선정

[출판사 리뷰]

세계 최고가 1,500억원 초상화의 절도품 논란

세계적인 화장품회사 에스티 로더의 회장인 로널드 로더는 2006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세계 최고가인 1,500억 원에 초상화 한 점을 구입한다. 20세기 초 분리파의 천재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한때 <레이디 인 골드(황금의 여인)>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는 그림이다.
로더는 열네 살 때 오스트리아 비엔나 벨베데레 박물관에 들렀다가 벽에 걸려있던 이 그림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그는 막대한 재력이 있었기에 훗날 꿈에 그리던 초상화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림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1ㆍ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견뎌내고, 비엔나 출신의 실패한 예술가 히틀러의 야욕에 약탈당하고 이름이 바뀌는 곡절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유대인 상류사회의 '팜므파탈'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후손과 오스트리아 정부 간 8년에 걸친 오랜 법정공방. 후손들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어 히틀러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독일보다 더 잔인하게 자신들을 다뤘다며 분노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 정부가 소유한 아델레의 초상화는 두말 할 필요 없이 절도품이라고 주장하며, 히틀러 잔당들이 진실을 은폐하려고 작품의 이름을 <레이디 인 골드>로 바꿔놓은 사례까지 들어 오스트리아의 도덕성을 문제 삼았다.
국가가 절도품을 갖고 있다? 영국 런던의 대영 박물관이나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도 절도품은 숱하지 않은가? 그러나 법정은 후손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결국 벨베데레 박물관의 초상화를 그들에게 넘기게 된다. 오스트리아를 떠난 클림트의 작품들은 로더를 비롯한 애호가들에게 팔려나갔다. 로더는 누구나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게 해달라는 후손의 요구를 받아들여 아델레의 초상화를 뉴욕 노이어 갤러리에 전시해놓고 있다.
후손들에게는 정의를 실현해 과거의 상처를 씻어내고 용서를 받아내는 쾌거였다. 이와 함께, 자칫 역사의 건망증에 묻힐 뻔 했던 클림트의 걸작은 그렇게 해서 100여년 만에 새롭게 태어났다. 클림트의 예술혼이 재조명되고, 아델레는 '황금의 여인'으로 아로새겨지며 불멸의 신비를 펼치게 되었다. 예술의 힘이라는 게 이런 것 아니겠는가?

'관능의 화가' 클림트와 '팜므파탈' 아델레의 운명적 만남
19세기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하지만 헝가리, 보헤미아 등지의 이민자들이 제국의 수도를 향해 몰려들면서 빈곤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모순의 도시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는 대결단을 내린다.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물결을 따라 개방과 자율의 물꼬를 트고 굳게 잠가놓았던 제국의 빗장을 느슨하게나마 풀기로 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행렬이 이어져 아델레의 바우어 집안을 비롯해 유대계 거부들이 상류사회의 한 축을 차지하기에 이른 것도 이때이다. 비엔나는 그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미술, 음악, 건축 등 예술은 물론, 철학, 심리학 등 정신적 역량이 충만해지면서 파리에 버금가는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자리 잡아 갔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금세공가였던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왕궁 등 비엔나의 주요 건축물을 화려하게 바꿔놓으면서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격찬을 받을 정도였으니 당시 천재 화가로서 클림트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젊은 클림트의 고민은 날로 커져만 갔다. 진보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정체되어 가던 비엔나의 예술에 번번이 좌절감을 맛봐야 했기 때문이다. 비엔나 미술가협회는 파리나 뮌헨에서 실험적인 작품들이 나와 갤러리에 걸리고 있는 현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 빈센트 반 고흐와 폴 세잔 같은 걸출한 화가들이 속속 출몰해 던져 놓은 큐비즘, 인상주의 같은 새롭고 파격적인 사조들을 못마땅해 했던 것이다.
클림트는 혁명을 시도했다. 동료 18명과 함께 미술가협회를 탈퇴해 '영혼의 예술'을 위해 싸우겠다고 선언하며 분리파(Sezession) 운동에 시동을 걸었다. 이들은 비엔나 곳곳에 스튜디오를 차려놓고 자신들의 예술을 만들어갔다. 성(sex)과 아름다움, 욕망, 육체의 표현을 통해 인간 정신의 내면을 파고들고자 했던 아르누보(Art Nouveau)의 여정에 올랐다.
분리파의 스튜디오에는 비엔나 상류사회의 여인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성애적 표현이나 퇴폐적인 여성상에 매료되어 스스로 모델을 청하는 여인들도 적지 않았다. 클림트를 필두로 한 분리파 운동이 비엔나 여성들의 반란을 유도한 셈이다. 클림트는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려가며, 그들의 잠재의식 속에 깔린 성적 욕망을 포착해 신화와 역사를 조합한 에로틱한 작품으로 표현해냈다.
이런 변혁의 배경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이 깔려 있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은 다 자라서도 자신의 성적 욕망을 무의식에 감춰놓아야 했던 여성들에게 공격 성향의 본능을 일깨워주었다. 여성의 성을 공공 담론으로 끌어 올려 진보적 여성관의 싹을 틔워놓았던 것이다.
남성을 죽음이나 고통 등 치명적 운명으로 몰아가는 악녀, 요부를 뜻하는 팜므파탈이 유행했던 것은 이때부터이다. 클림트는 자신의 작품에서 무절제와 방종을 즐기고, 매력을 잔뜩 품은 채 죄의식을 발산하며, 까탈스러운 이면에 달콤함을 드러내는 비엔나의 '팜므파탈'을 끌어내려 했다.
클림트와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만남은 이런 사회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여성의 몸을 통해 팜므파탈을 마음껏 표현하려 했던 클림트의 예술혼과 기꺼이 팜므파탈이 되고자 했던 아델레의 욕망의 조합은 그야말로 운명적이었다.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아델레는 어려서부터 지적 호기심이 많았고, 항상 무언가를 이루고자하는 야망이 있었다. 그녀가 훗날 클림트가 죽은 후에 사회주의자로 변신하고 공산당에 호의적인 입장을 견지한 것도 이런 성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사교계를 드나들며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녀는 18세의 어린 나이에 체코 태생인 부호 페르디난트 블로흐와 결혼한다. 아델레와 클림트를 연결한 인물은 남편인 페르디난트였다. 그는 클림트의 후원자로 나서며 자신의 아내를 모델로 작품을 부탁했다.
그렇게 나온 걸작이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이었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 그림과 모자이크를 엮어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점에서 파격적이었다. 주인공 아델레는 비잔틴 제국의 황녀 테오도라를 연상시킬 만큼 내면에 숨겨진 불멸성을 한껏 드러냈다. 이른바 황금을 이용한 모자이크 그림(Painted Mosaic)에 '항상 준비하고 있던 모델'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이다.
'황금의 여인' 아델레는 아이를 가질 수 없어 여성성에 상처를 입었지만 클림트와 함께 하는 시간에서 자신감을 되찾았다. 클림트도 아델레도 공개적으로는 친구 사이임을 강조했다. 아델레는 클림트가 세상을 떠난 뒤 7년을 더 살았는데 지인에게 '소중한 친구, 클림트'를 강조해 두 사람의 각별한 사이를 되새긴 바 있다.
여성 편력이 심했던 클림트와 아델레의 만남이 지속될수록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구설수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수많은 여성들과 스캔들을 일으켰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안식처를 찾지 못했던 클림트에게 아델레는 특별한 존재였다. 후원자이자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어준 뮤즈였으며, 치명적인 매력을 선사한 팜므파탈이었다. 몇몇 미술사가들은 클림트가 그린 〈유디트〉,〈키스〉,〈다나에〉의 모델 역시 아델레일 것이라고 말한다. <유디트>는 아델레가 결혼하기 전의 작품이라서 그런 추론이 맞으면 두 사람은 이미 깊은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클림트와 아델레의 관계를 미스터리라고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1918년 2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과 함께 클림트는 지병인 매독이 악화되고 스페인 독감까지 걸려 쇠잔해진 상태에서 죽음을 맞는다. 수많은 추종자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아델레 역시 '소중한 친구' 클림트가 사망한 후에도 후원자로서의 소임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녀는 벨베데레 박물관 관장과 함께 클림트의 유작들을 모아 전시하는 한편, 예술가들을 후원하다가 1925년 2월 세상을 떠난다.

사랑과 배신, 그리고 '황금의 여인'을 되찾기 위한 투쟁
블로흐 바우어 집안과 아델레는 오스트리아를 조국으로 알았고, 비엔나를 사랑하며 살았다. 그녀가 벨데베레 박물관에 클림트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것도 (미스터리라고 불리는) 두 사람의 관계가 비엔나에서 영원하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오스트리아는 아델레와 블로흐 바우어 집안을 처절하게 배신한다.
자녀가 없었던 아델레와 페르디난트는 조카인 마리아와 루이즈에게 애정과 관심을 쏟았고, 아델레가 죽고 난 후 페르디난트는 형인 구스타프의 가족과 함께 산다. 하지만 전운이 유럽 대륙을 휘감고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로 진격하고 있다는 전언, 나치 깃발을 흔들며 동조하는 비엔나 사람들, 곳곳에서 들려오는 유대인 학대 소식은 블로흐 바우어 집안에 닥칠 고난을 예고하고 있었다.
마리아는 음악가인 프리츠 알트만과 사랑에 빠져 그와 결혼하여 행복한 신혼생활을 꿈꾼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를 강제로 합병한 나치는 게슈타포를 앞세워 유대인을 탄압하기 시작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프리츠도 체포되어 투옥된다. 프리츠는 다하우 수용소까지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은 후, 아버지가 모든 재산을 나치에게 넘기고서야 겨우 풀려난다.
페르디난트는 합병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을 조직하지만 실패하고, 재산을 빼앗으려는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스위스로 피신하여 조카인 마리아와 루이즈에게 재산을 상속한다. 하지만 나치와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의 사업체와 저택, 미술품 등을 강탈하고, 이때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도 나치의 손에 넘어간다. 박해를 견딜 수 없었던 마리아 가족은 오스트리아를 탈출하여 망명의 길을 떠난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몰락한 가문의 영광을 뒤로 한 채 미국으로 이주해 로스앤젤리스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며 4명의 자녀를 낳고 살아간다.
과거를 잊고 지내던 마리아 알트만은 오스트리아 기자인 후베르투스가 전쟁 중에 나치가 유대인에게서 약탈한 예술품을 오스트리아 정부가 불법으로 취득하여 이익을 챙기고 이를 은폐해 비밀에 부친 사실을 폭로한 기사를 접한다. 그녀는 숙모의 초상화가 오스트리아의 벨베데레 박물관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잊고 싶었던 기억을 되살린다. 그리고 언니 루이즈가 운명하기 전에 소개해준 변호사 랜돌 쇤베르크와 함께 그림을 돌려받기 위한 기나긴 싸움을 시작한다.
마리아는 쇤베르크 변호사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방문해 그림의 반환을 요구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정부는 나치에 협력하며 저질렀던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술품 강탈에 앞장섰던 자들도 "아델레가 벨베데레 박물관에 그림을 기부했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정당한 소유물임을 주장한다. 마리아는 "아델레는 클림트와의 추억을 간직하고자 했던 것이지 박물관에 그림을 넘긴 것은 아니다"라며 반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워낙 완강하게 맞서자 마리아와 쇤베르크는 미국 법정에 소송을 제기한다. 법정에서는 유대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나치 지배 아래서 겪어야만 했던 바우어 집안의 고통의 역사가 낱낱이 파헤쳐진다. 결국 마리아 알트만은 길고 지루한 다툼 끝에 숙모와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유산을 되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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