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한 장은진의 첫 장편소설. 절세가인인 한 여자와 그녀의 사랑을 걸고 내기를 벌이는 두 남자가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305호 여자 앨리스와 306호 남자 루이스의 치열한 러브 액추얼리 공방전이 펼쳐진다. 나란히 평행선을 달리는 듯 보였던 두 가지 이야기는 그들의 처절한 사랑과 복수가 얽히고설키며 어느 순간 서로 만나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며 폭발한다.
"앨리스."
"앨리스라, 맘에 들어요. 받았으니 저도 줘야죠?"
비밀번호를 주겠다는 뜻인 줄 알고 희뿌옇게 끼어 있던 머릿속 안개가 순간 걷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인터폰 렌즈를 뚫어벼라 쳐다봤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쓴 루이스 캐럴의 첫사랑 이름도 앨리스였다죠. 당신 닉네임 루이스, 어때요?" P.19-20
"왜 책을 읽어?"
지나가 난데없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나 또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지나를 쳐다봤다.
"왜라니? 이건 내 일의 연장이야. 무엇보다 책은 부족한 현실을 채워 줘."
"책이 아무리 훌륭하고 완벽해도 끔찍한 현실을 따라오진 못해. 진짜 완벽한 게 옆에 있는데 왜 가짜에 열광해야 되는데? 책을 읽는 건 자기 삶이 그럴듯하지 않다거나 격정적이지 않다거나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는 방증으로 느껴져. 책은 해결책이 못 돼."
지나는 마치 책에 결벽증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강지나의 현실은 부족한 게 없단 뜻이로군."
"책을 읽는 건 삶이 따분하기 때문이야. 얼마나 따분하면 그 따분한 걸 읽겠어."
"그럼 지금 나도 따분해?"
"꼭 나랑 있는 게 따분한 것처럼 보여. 그러니까 내 앞에서는 그딴 거 읽지 마. 난 남한테 따분한 사람이 되긴 싫어." P.72-73
그녀는 고개만 끄덕인다. J의 말대로 바람은 우편물처럼 어디든 소식을 날랐다. 그러나 빠르고 신속한 그 바람이 그녀에게 희소식을 배달해 준 적은 없었다. 그녀는, 음모(陰謀)란 소리 없이 자라나, 냄새도 없는 바람을 타고, 씨앗처럼 퍼져 나간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씨앗은 올바르게 자라지 못했고 늘 변종을 낳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몰고 왔기 때문인지 음모는 축축하기만 할 뿐 실체가 없었다. P.100
"저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에요. 누님의 삶은 마치 연극 같아요. 연극에서는 어떤 상황이든 납득되고 가능하잖아요. 저건 연극이야, 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그게 현실이 되면 아무도 납득하지 않아요."
"연극은 이해 안 되는 걸 이해하게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해 안 되는 걸 이해해야만 할 때가 있지. 벌어져 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연극은 끝나지만 삶은 계속되는 거니까." P.140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야. 진짜는 안 보이는 곳에도 있어. 눈에 보이는 당신 애인, 그게 전부일까?"
"말 같지 않은 소리 집어치워요. 당신 말이 진실이면 진실이고 거짓이면 거짓이겠죠! 애먼 남의 애인 물고 늘어지지 마요. 진실이면 무엇으로 그걸 증명할 거죠?"
"아무리 얘기해도 당신은 내 말을 믿지 않아. 보이지 않으니 믿지 않는 거라고. 당신은 벌써 증명을 요구하고 있잖아. 진실에는 증명이 필요 없어. 그 자체가 증명이니까. 증명은 거짓에나 필요해. 당신은 믿어야 하는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을 구분 못 하고 있어." P.153-154
번역 문장을 써야 할 워드 창에 같은 문장만 반복해 적고 있다. 내게는 버릇이 하나 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나 고민이 생길 때 글로 적어 보는 것이다. 생각하거나 사색하거나 말로 중얼거리면 실체 없는 그것은 발화 순간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실체 있는 글은 문제의 본질을 보여 주고, 생각의 논리적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실마리를 찾게 도와준다. 말하기의 순간성을 사람을 격분케 하지만, 글쓰의 진중성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흩어진 질서를 잡아 준다. 무엇보다 글쓰기는 먼 훗날 지금의 내가 어떤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는지 알려 주는 흔적이 된다. 인간의 기억이란 늘 보잘것없고 오류투성이어서 그러한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사건과 그 사건이 발생한 날짜를 잘 연결 짓지 못하는 나 같은 경우라면 특히. 사람들은 그래서 일기를 쓰고 메모를 한다. 글은 말보다 더 위대하다. P.173-174
"불가능에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도전할 가치가 있느냐, 없는냐가 문제죠."
"그 가치는 내가 판단해."
"죽음이 닥쳐도 피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죽음은 두려운 게 아니야."
"그럼 뭐가 두려운데요?"
"기억." P.204-205
J는 그녀와 헤어진 다음 날 그녀에게 전화해 훌륭하고 완벽한 조력자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보다 더 그 일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처럼 J는 리스트 작성에도 도움을 주었다. 약속대로 J는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치밀했다. J가 없었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거나 많은 부분에서 허점을 노출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녀는 J가 손을 내민 순간부터 뒤에 숨어서 J의 이름으로 살기 시작했다. 이름이란 많은 사람들이 불러 줄 때만 그 가치와 효용이 있는 법이다. 그녀가 사라졌으니 이름의 가치 또한 사라지는 건 당연했다. J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은 포근하고 안정되었으며 정말로 이 세상에서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때 알았다. 어떤 방식이든, 살아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사람은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짝을 이루려 하고, 그 짝을 끝까지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혼자가 된다는 건 외롭다기 보다 무서운 것이다. p.239-240
새로운 삶은 꼼꼼한 군사전략처럼 지루하지 않게 흘러갔다. 한 권의 책에서는 지식과 지혜를, 음악에서는 풍부한 낭만을, 외국어에서는 언어의 경이로움을, 요가에서는 마음의 평화를, 요리에서는 맛의 아름다움을, 미용에서는 변신의 놀라움을, 그림에서는 잠재된 능력을, 인터넷에서는 진화된 세계를 얻었다. 그리고 306호에서는 삶의 조력자를 얻었다. p.254
여자는 바늘구멍 같은 틈도 보여 주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보여 주지 않은 전체가 곧바로 상상의 공간이 된다. 보여 주지 않기에 내 상상은 확인되지 않는다. 확인되지 않으므로 그 상상은 자가 증식하여 풍선처럼 한없이 부풀어 오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팡, 터져 버리고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면 아무것도 없다. 그럴 때는 다시 다른 색 풍선을 집어 들어 불어야 한다. 확인이 될 때까지 무어라 말할 수 없고 무어라 표현할 수 없다.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한다. 그야말로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마치 총부리 앞에 두 손 들고 서 있는 격이다. 여자는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책이다. 어려운 것보다 한없이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에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세헤라자데가 들려주는 이야기 같은 책이다. 다시 읽어도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그런 책이다. p.269-270
사람을 죽여 보지 않은 자가 있을까. 그녀는 수연의 얼굴에서 10년 전 자신을 봤다. 그 얼굴은 공포나 죄책감에 빠져 있는 얼굴이 아니다. 미안함이다. 그리고 혼자 살아가야 하는 자가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과 무서움이다. 사람이 숨 쉬며 살아간다는 건, 다른 사람이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빼앗는 것과 같다. 살기 위해서 내뱉는 한 번의 숨이 다른 사람의 숨을 10초 혹은 1분 동안 쉴 수 없게 할 수 있다. 10초의 살인, 혹은 1분의 살인. 누구도 살인이란 이름 앞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숨 쉬는 인간은 누구나 다 살인을 저지르며 살아간다. 단지 뻔뻔해서, 혹은 둔감해서 그 사실을 모른척하거나, 모르고 지나칠 뿐이다. 수연과 그녀는 불행하게도 그 사실을 알아 버린 것과 불과하다. 알아 버린 자가 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숨통을 움켜쥐는 것뿐이다. 타인의 숨통을 움켜쥐었던 시간만큼. p.283
-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철저한 준비 같은 건 닥쳐 온 이별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p.298
- 그러나 그녀 보다는 한 수 아래. 코끼리의 말과 행동이 없었다면 극은 너무 단조롭게 흘러갔을 것이다. 예상대로 흘러가는 극은 그녀에게도 그들에게도 재미없다. 기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에 따라 급수정되는 시나리오. 삶이란 원래가 예상할 수 없는 게 아니던가. p.303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작작해!
-보이지 않은 걸 볼 줄 아는 사람을 찾아. 어딘가에 분명 있어.
-불가능해.
-나도 첨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
-306호는 코끼리든 뭐든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코끼리가 누군데?
-나이기도 하면서 너이기도 한 사람.
-뭔 소리야?
-좋은 말이야. p.330-331
- 애증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사람을 죽이게도 해. p.345
고양이와 함께 하루에 2분의 1인치씩 바깥공기를 마시고 눈부신 햇살도 쬐면 무엇이든 금세 잊고 용서도 될 것이다. 하루에 한 발짝씩 한 발짝씩 움직이면 지구 반대편에도 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하루가 쌓이고 쌓여 태산이 되면 세상에 못 할 일이란 없을 것이다. p.367
모두를 감쪽같이 속였던 지나, 연극배우 수연, 텍스트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나의 글과 책들. 모두들 가짜 인생을 살아온 것 같았다. 어쩌면, 진짜 자기 삶을 살고 있었던 건 그녀인지도 모르겠다. 305호 그곳에서, 자기만의 존재 방식으로 살고 있는, 자기만의 생활 방식으로 소통하고 또 사랑하며 살고 있는 그녀, 앨리스. p.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