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우유의식'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홍희정의 장편소설로, 유려한 글쓰기로 풀어낸 우리 시대 청년들의 아릿한 성장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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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내용 요약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는 스물 중반의 청춘들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사랑과 우정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공 이레는 대학을 졸업한 뒤 뚜렷한 목표 없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녀는 오랜 친구 율이를 짝사랑하지만, 고백하면 관계가 깨질까 두려워 마음을 숨긴다. 이레는 율이가 어머니와 운영하는 동네 슈퍼에서 시간을 보내며, 유통기한 지난 우유를 마시거나 과자를 나눠 먹는다. 이 소소한 일상은 이레에게 위안이 되지만, 동시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격지심을 느끼게
넌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근본은 있지만 사랑만 받아서 기본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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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율이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우울한 목뼈가 툭 불거져 있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위로도 조언도 아닌, 말도 다 할 수 없는 것을 전해야 할 때 서로의 목뼈를 누르곤 했다. 술에 취한 어느 밤, 3세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동아리 방의 낡고 더러운 소파에 기대앉아 장난처럼 시작한 그 행동은 어느새 둘만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쓰다듬듯, 감싸안듯 가만가만 손을 가져가 상대를 보든는 행위. 서로에게 분명한 충고나 조언을 직구로 던져야 할 때조차도 아둔한 그 행위만 반복할 뿐이었다. 나는 율이의 목뼈를 검지로 지그시 눌렀다. 율이는 순한 아이처럼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우리는 보통 사람들보다 어른이 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타입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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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사랑하고 사랑받는 건 몇 살을 먹어도 좋은 법이야.
율이 때문에 애가 타던 나는 그때 속으로 오만한 생각을 했다. 사랑이란 감정은 새파랗게 젊을 때 다 소모해버리고 싶다고, 노인이 되어서까지 그런 건 겪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노년이란 내면의 피부가 아주 두꺼워서 무슨 일을 겪어도 흔들리지 않고 초연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나는 일생일대의 사랑 같은 건 젊은 시절에 모조리 다 겪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혈기왕성한 섹스를 젊은 시절 실컷 해버리고 몸속이 텅 빈, 어떤 감정에도 동요하지 않는 노인이 되겠다고 말이다. 아마도 그때 할머니가 내 생각을 알았다면 철모르는 소리라고 틀림없이 비웃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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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는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항상 갑자기 했다. 눈꼬리가 처진, 인상이 부드러워 보이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바람둥이처럼 보이는 웃음과 함께. 그런 율이를 보고 있으면 나는 허기가 졌다. 애정에 목말랐다. 걸신이 들린 것 같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하지만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율이는 나를 한순간에 들뜨게도 하고 한없이 무기력하게도 만들었다. 율이 앞에서 나는 그저 고분고분한 노예에 불과했다. 아니 거절당한 방문객이 된 기분이었다. 굳게 잠긴 문 앞에서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짖어대는 개가 된 느낌. 나는 율이의 싱글벙글하는 얼굴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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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빨지 않은 오래된 리바이스 청바지도 율이의 긴 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보는 눈을 즐겁게 애무하는 존재다. 나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단단히 홀렸군. 정말이지 속절없이 아름답다. 율이를 둘러싼 사소한 옷가지들조차 나를 황홀하게 만든다. 당장 율이와 몸을 꼭 붙이고 싶다. 열 손가락으로 율이의 몸 구석을 만지고 싶다. 얼굴과 목을, 어깨와 등, 허리를. 몸의 깊은 곳으로부터 콜타르처럼 끈적거리는 욕망이 자연스럽게 솟아오른다. 단지 율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의 중심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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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언젠간 나를 떠나겠지만. 하지만 내가 고백하지 않으면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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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침대에 누워 하루종일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오기를 기다려. 전화벨이 울리기를 기다리며 집안 곳곳을 걷다가, 시간이 지나면 발가락으로 걷다가, 발꿈치로 걷다가, 바닥에 닿지도 않는 발의 중심으로 걸어보려 하다가, 한참을 그러다가, 전화기가 있는 쪽으로 가서 수화기를 귀에 대보고, 아무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혹시 먼지가 많이 쌓여 고장이라도 난 걸까 싶어서, 베개의 한 귀퉁이를 찢어, 그것으로 수화기에 묻은 먼지를 닦다가, 이것만으로 안 되겠다 싶어 면봉에 세제를 묻혀서 꼼꼼히 닦다가, 말하는 곳 듣는 곳에 뚫린 구멍들도 하나하나 집요하게 닦아내다가, 문득 전화기에 달린 전선을 눈으로 쭉 따라가보고서야 플러그가 뽑혀 있다는 걸 깨닫고, 뽑힌 플러그를 이 분 정도 내려다보고는, 다시 침대로 가서, 귀퉁이가 찢어진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어린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울고는, 다음날이면 또다시 전화가 오기를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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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와 함께한 육 년간의 시간이 전생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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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있다면 마구 주먹질을 해주고 싶다. 날카로운 것으로 사정없이 찌르고 싶다. 억눌렸던 감정의 반발심일까. 율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다보니 어느새 기묘한 감정으로 숙성되고 있었다. 율이에게 아픔을 주고 싶다. 놀라서 나를 돌아보게 하고 싶다.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깊게 구덩이를 파서 율이를 빠뜨리고 그 사실을 나 혼자서만 알고 싶다. 내 감정에 냄새가 있다면 아주 시큼한 냄새이로구나 것이다. 음흉하고 야비한 냄새. 세상이 무대라면 그리고 내가 배우라면, 신은 나를 무슨 역할로 캐스팅한 걸까. 짝사랑 때문에 미쳐버린 음흉하고 야비한 단역 정도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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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가 저 얼굴에 반했다는 말이지. 그녀를 보며 나는 소름끼치는 외로움을 느꼈다. 마치 아랫도리가 다 젖은 채로 추위에 덜덜 떨며 따뜻한 기운이 넘치는 이웃집을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그 집으로 다가가기 위해 걸음을 옮길수록 물에 젖은 속옷이 다리에 척척 감기며 흘러내린다.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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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나는 율이에게 반쯤은 미쳐있다. 돈이 넘치게 많다면 율이에게 세상의 모든 문학전집을 사주고 금테를 두른 원고지와 블루사파이어가 박힌 최고급 몽블랑 만년필을 사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럴 돈도 없고 율이는 나에게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율이가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해준다. 율이의 여자친구가 함께한, 풀밭 위의 점심에 참석한 것도 다름아닌 율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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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다정하면서도 은밀한 태도에 나는 애정의 맨얼굴을 본 것 같아 명치가 조여왔다. 나긋나긋한 그녀의 손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율이의 여자친구를 보며 바짝바짝 애가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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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돌고래가 죽었을 때 그들이 대화하던 초음파의 세계는 사라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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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원하는 것을 자신의 공간에 단단히 붙잡아둘 수 있는 용기가 부럽네요.
칸트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ㅡ 결국,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만 일어설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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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어깨가 참 멋져요.
그 말을 하고 얼굴이 좀 달아올랐다.
ㅡ 별명이 많았죠. 떡대, 왕패드, 크레인, 아놀드.
ㅡ 아놀드?
의아한 표정을 짓다 칸트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ㅡ 아놀드 슈왈제네거.
ㅡ 딱히 근육질은 아닌 거 같은데요?
ㅡ 면박, 준 건가요.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찡긋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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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참으로 오랜만이었지.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편안하게 구덩이 얘기를 한 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이렇게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감하고 오해하고 다시 화해를 하고 싶다고. 무엇보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좋았어. 초승달을 떠올리게 하는 웃음이랄까. 구름이 스르르 비켜나면서 살며시 드러나듯 애틋하게 빛나는 미소 말이야. 그래서 얘기했지.
ㅡ 뭐라고요?
ㅡ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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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이레씨는 다음 세상에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다음 세상 같은 거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ㅡ 엄마요.
ㅡ 그건 현생에서도 가능하지 않나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ㅡ 그 사람 엄마요.
ㅡ 좋아하는 사람?
ㅡ 네, 물고 빨고, 잘해줄 거예요.
한층 낮은 목소리로 칸트가 중얼거렸다.
ㅡ 어쩐지 야하다.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 2018.12.1~12.2
■30권/2018년
언제, 어떻게 알게되었는지도 잊은 카트에 넣어두었던 책이다.
'제목'에 끌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끌렸으니 기대를 갖고 12월 첫 주말 함께했다.
할머니의 여러 말들에, 주인공이 하는 일의 특성 때문에, 뜬금없는 말들을 하는 남자사람친구 때문에, 몇되지 않는 등장 인물들의 사연들에 나의 마음이 동화되기도 하고, 답답해지지만, 그를 만나러 떠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응원해본다.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달라고 한 사람은 정작 '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는 '이레'의 고객 중 '구덩이' 말만 주구장창 하던 남자였다.
그 고객의 - 그가 만난 여성에게 한 - 고백에 '이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라도 치고 싶고, 진심으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건 아마 '이레' 자신의 마음도 그래였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을 일찍 여위고 할머니와 살고 있는 '이레'. 할머니마저 암이라는 말을 듣고 망연자실하나, 할머니는 책에서나 나올 만한 말들과 행동으로 '이레'를 격려하고, 돌봐주며, 본인도 열심히 산다.
육남매 중 막내이건만, 한창 가족들에게 한없는 사랑과 귀여움을 받을 시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에 대한 기묘한 애정결핍을 느끼고 있는 남자사람친구인 '율이'를 '이레'는 좋아하면서도 말도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리기만 한다.
'이레'는 '들어주는 사람'이란 곳에서 전화로 고객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하게 되는데, 얼마 전에 읽은 '삼귀'의 '오치카'도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는데, 어쩌다 보니 비슷한 내용을 담았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일인지도 몰랐다. p.131
'율이'는 예전에도 그랬듯, 새로 사귄 여자 친구를 '이레'에게 소개해주고,
'이레'는 그런 '율이'를 고백하면 다시는 못볼까 두려워 차라리 내 남자인 것보다 이렇게 친구로 곁에 영원히 있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로 사라진 '율이'.
'들어주는 일'을 지속하면서 웬지 모를 답답함을 느끼고.
그러던 중 고객 중 한명의 평소와는 달랐던 그의 얘기에 너무나 기쁘고.
다음 생이 있다면 그의 엄마로 태어나 물고 빨고 잘해주고 싶다는 '이레'.
그렇게 한동안 연락없던 '율이'에게 전화가 온다.
'이레'는 할머니에게 당신이 말해줬던 '그런 느낌에 흠뻑 젖는 시절을 마음껏 누리러' 간다며 쪽지를 남기고 '율이'를 만나러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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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에겐 너무나 보편적인 일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세상에는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는 사람들이 있어. 그런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 p.51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하지만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율이는 나를 한순간에 들뜨게도 하고 한없이 무기력하게도 만들었다. p.54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워요.'
'사랑은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 못지않게 많은 문제를 일으키지.' p.67
억눌렀던 감정의 반발심일까. 율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다보니 어느새 기묘한 감정으로 숙성되고 있었다. 율이에게 아픔을 주고 싶다. 놀라서 나를 돌아보게 하고 싶다. p.78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달라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라도 취고 싶은 심정이었다. p.127
그런 느낌에 흠뻑 젖은 시절을 마음껏 누려야 돼.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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