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로서의 자기 인식이 확실하고 출판계의 부조리에 대해서 일침을 가하는 태도나 말들이 잘 들어온다.
번역가를 ‘언어 하인’으로 대하는 세간이 태도에 대해서도 굴하지 않고 독자의 입장에서 시작되는 번역가의 본질에 대해서 위트 있는 말들과 자신의 경험에서 느낀 점과 위치성에 대한 글이 잘 읽혔다.
3부로 나누어진 구성으로 1부는 한국문학 번역가에 대해서 2부는 번역가에 대한 궁금증과 직업적 위상에 관해서 3부는 번역가로 강연을 했던 강연 글이 실렸다.
1부 나는 한국문학 번역가다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한영문학번역가가 전 세계적으로 통틀어 다섯 사람이 안 된다는 내용에서는 한국문학과 한국어가 세계 출판에서는 여전히 변방임을 그리고 노벨문학상 시상 때가 되면 매스컴에서 한국 문학이 수상하길 바라는 보도들이 나오는 게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 아닌가 싶다. 문학성에 대해서는 차치하더라도 너무 변방이고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는데 수여하는 측이 읽어 본 적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의 내용 곳곳에 백인주의와 유럽어, 남성 중심이 여전히 우세적인 문학, 출판계에서 한국 문학이 얼마나 읽힐지 생각해 보면 확률이 너무 낮다는 생각이 든다.
영미권 독자는 번역문학을 읽지 않는다라는 인식이 만연한 상황이라는 부분에서는 문화에도 권력과 우위의 인식이 있음이 새삼 확인한다.
‘불타는 쓰레기 수거통’편을 읽다 보면 번역에 대한 한국 출판계의 인식과 태도들을 엿볼 수 있는데, 한국문학번역원이라는 곳이 한국 학생에게는 어떤 지원도 없고, 외국인 학생에게만 지원이 있다는 부분에서 사대주의적 시스템이라고 느껴졌다. 외국인이 한국문학을 번역한다는 점에서만 우대해 주고 정작, 자국민에게는 알아서 하라는 분위기라는 게 당사자들에게 차별과 문화 착취라고 인식된다.
대학교수들이 생각하는 번역에 대한 일화를 들여다보면 너무나 그들만의 사고관에 갇힌 그들이 심사위원으로서 번역가를 선정하는 시스템에서는 지나친 직업 차별, 우리 사회에 교수에 대한 묻지 마 우대 의식이 보인다.
문학번역은 두 언어의 피상적 이해를 뛰어넘어 출발어의 문학 전통과 도착어의 문학 전통을 잘 파악한 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무슨 배짱으로 중에서
‘죽음의 계곡’편은 어느 직업군이나 힘든 시절이 있을 터인데, 번역가로서의 어려운 시기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첫 문학번역 단행본을 펴내는 데 9년이나 걸렸다는 점, 문학번역원의 ‘번역 대회’에서 입상하거나 대학원을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한국 출판계의 현실도 알게 된다.
번역가들은 육체가 어디에 거주하든 항상 자신이 언어 속에서 살아간다. 번역가에게 언어란 항상 돌아갈 수 있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느 고장과도 같다. 죽음의 계곡에서 우리는 이 고장의 지리를 익히며 과연 내가 오랜 시간 이곳에서 살고 싶은지,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즉 달리 은유하면 죽음의 계곡은 일종의 ‘영혼의 어두운 밤’이기도 하다. 이 어두운 밤이 지나면 언어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진리를 발견한다.
문학번역가 지망생의 ‘죽음의 계곡’ 중에서
번역가 케이트 브릭스의 ‘이 작은 예술’이라는 에세이에서 에어로빅댄스를 번역에 대한 행위, 의미를 푼 이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원작자를 따라 하지만 투박한 나의 몸짓으로 전달하는 행위에서 동일성을 발견한다는 해석이 연결하지 못했던 해석을 듣고 동의하게 된다.
원작자가 아니지만 죽어도 안 뻗어지는 언어로 열심히 원작자를 따라가려 애쓰며 번역을 한다. 원작자를 따라 번역하는 느낌 그리고 그런 춤과 그런 번역이 주는 즐거움. 독자들에게 내 투박한 글만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원작자의 아름다운 안무가 나의 투박함을 통해 전해지기 바라는 마음…
몸으로 하는 일 중에서
안톤 허의 자기 고집과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이, 자기 삶을 스스로 이끌고 가는 이의 모습으로 읽혔다. 부모의 관심과 애정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 지혜로운 부모의 태도와 자녀의 독립을 지켜봐 줄 수 있는 인식과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 되새김질하게 해주는 문장이기도 하다. 부모 입장과 자녀의 두 입장을 오가는 마음. 그저 저자 자신의 입장에서 하는 말일 텐데, 듣는 나는 이중의 입장으로 들려 생각도 두 가지의 물결로 흐른다.
부모임 말은 절대 들어서도, 믿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자기 인생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실수를 해도 자신의 실수를 하는 것이 낫다. 인생을 망쳐도 내 손으로 망쳐야 한다.
문학소년, 전공을 살리다 중에서
2부 이 순간을 어떻게 옮겨야 할까?
작가님과는 자주 소통 하세요에서 작가와 번역가의 관계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이야기는 어떤 일이든 함께 일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와 예의, 자신의 일에 대한 실력에 대한 자긍심이 밑바탕이 될 때 행해질 수 있고, 일을 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 역시 무례함을 기본으로 하는 이와 일을 함께 할 필요는 없다는 걸 새삼 확인한다. 갑과 을의 위치에 끌려다니지 않는 위치도 중요하고, 상식이 상식일 수 있는 직업의 장도 필요하고.
내가 사랑한 한국문학편에서 한국이 유독 시집이 많이 출간되는 문화권이고, 소비된다는 게 신기하게 인식되었다. 영미권이 더 시집을 읽는 독서 문화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한국의 출판 시장이 시집에 있어서는 더 많이 출간되고 있다는 말에서 등장한 시인들의 이름과 시집들을 또 한 번 찾아보게 된다.
문학번역가의 멸종편에서 한국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저자의 따끔한 일침이 들어온다.
-한국 언론들은 종종 한국에서 왜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느냐며 번역가를 성토하곤 하는데 이런 풍토에서 제대로 된 문학번역가를 기대한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토록 문학을 멸시하는 나라에서 끊임없이 문학작품이 생산되는 것만도 신기한 일인데 노벨 문학상까지 바라다니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괴이한 욕심이다.
대학원에서 배운 것편에서 법대 출신인 리걸 마인드가 발동해서 시험 답안지에 대한 시험감독관의 지적에 대해서 응수하는 일화에서는 재치와 저자의 기질이 느껴져 웃음이 일었다. 그리고 그 일화를 통해서 역시 공적 문서나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야 한다는 너무나 평범한 진리(?)를 장착한다.
자신이 본질적인 독서에 이르지 못하는 걸 한국의 대학원을 다니면서 지도 교수로부터 진단받듯 인식했고, 그 이후 더 발전하게 되는 계기였다는 술회가 한국 교육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논하는 이야기라서 현장성이 느껴졌다.
-나는 ‘글을 잘 쓰지만 글을 못 읽는, 정말로 드문 학생’이었다(그 반대는 오히려 흔하다). 나의 경우 탁월한 영어 실력 덕분에 문장이 너무나도 쉽게 나오는 나머지 글에 대해 깊이 숙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수님은 혹시 책을 읽는 순간에는 모두 이해하지만 읽고 나면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지 물었다.
죽음이 계곡을 지나서 번역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차에 떠났던 영국의 노위치에서 인생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완벽한 번역가 생태계를 접할 수 있었던 이야기 역시 침체기에서 다시 상승기를 만드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가는 모습이 정체되지 않고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이, 환경의 변화가 주는 좋은 경험치를 본다.
부커상의 더블 롱리스팅이 된 과정의 이야기는 읽으면서 아주아주 어렵고 대단한 일이라는 걸 새삼 본다. 수상 조건이 소설이어야 하고, 살아 있는 작가의 작품으로, 영국에서 출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권이 다 이 조건에 부합되어서 선정되었다니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수상하지 못한 아쉬움보다는 선정작이 되어 그간의 번역에 대한 인정을 더없이 기쁘게 누리는 마음의 유연성이 전해진다.
3부 목소리에서 활자로
지식의 저주-옥스퍼드대학교편에서 성서의 이브를 ‘첫 번역자’라는 생각을 풀어가는 이야기들이 몹시 흥미로웠다. 기독교적인 개념의 의미가 있는 단어들을_루시퍼, 에덴, 바벨탑, 아담_기독교인이 아닌 입장에서 풀어내는 관점들이 유연하고 다층적인 해석이어서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기독교 문화의 기원을 둔 단어들에 대한 신선하고, 인간 중심의 해석이라서 좋았다.
-지식의 저주란 어떤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지식이 그 사물이나 대상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예측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작가 대 번역가-미들베리칼리지 브레드 로프 번역가 대회 강연편에서 번역가의 이름이 책에 기재되지 않아서 투쟁을 한다는 영미권의 상황은 무척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번역을 낮게 생각한다는 게, 생각보다도 더 낮은 사회적 인식과 차별이라는 게 번역가 안톤 허를 더 소리 내어서 인식의 전환과 현장에서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서 말하게끔 하는 바탕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출판계에서도 아직 번역 저작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창작자와 같은 분류의 일이라는 인식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번역자에 대한 고마움과 그들의 현실 분투기가 안타깝게 전해진다.
번역에서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질문에서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수상자 데이지 록웰이 말이 일침을 주는 답변이란 생각이다.
답변의 맥락은 번역가에 대한 번역에 대해서 낮은 인식과 그저 그대로 옳긴다는 인식에서 오는 차별이다.
-“왜 자꾸 번역에서 잃어버린 무언가에 집착하지? 번역에서 찾은 걸 생각해 보라고! 이 두꺼운 책 전체가 번역에서 찾은 거잖아!”
-우리는 번역서를 읽을 때 그 책의 문학성을 음미하기 위해 읽습니다. 그리고 문학성을 음미한다는 것은 그 책을 쓴 작가와 번역가의 노고에 집중한다는 얘기입니다.
번역 일에 대한 사랑, 자의식, 연대의식이 읽히는 문장들이었다. 안톤 허라는 사람은 번역에 진심인 사람이고, 굉장히 능동적이면서 주체적이 사람이라는 느낌이 짙게 느껴진 강연 글이었다.
주제 파악하기를 사양합니다: 프린스턴대학교 강연 중에서
-고로 번역은 단어에서가 아니라 단어 사이의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의미는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그 방향으로 손짓할 수밖에 없는 무엇입니다. 이런 절박한 손짓이 바로 번역입니다.
-저의 가장 중심적이고 근본적인 정체성은 독자로서의 정체성이고,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거기서 비롯됩니다. 제가 이런 번역가인 것, 이런 작가인 이유는 바로 독자로서의 자부심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번역가라는 타이틀을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가의 정체성이 독자로서의 정체성과 묶여 있기 때문에 번역 일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