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남긴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 톨스토이 자신의 신념, 종교나 농민 문제 등에 대한 그의 고민이 잘 드러나있는 소설이다. 동시대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완벽한 예술 작품'이라는 평가와, 러시아 출신 소설가인 나보코프로부터 '톨스토이 스타일의 정점'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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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안나 카레니나 3 (세계문학전집 221) 내용 요약
톨스토이의 대작인 『안나 카레니나』 3권은 안나의 파멸과 레빈의 내적 성숙이라는 두 줄기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소설의 결말을 향해 치닫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 안나는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위해 가정을 버리고 사교계에서 고립되었지만, 그 사랑마저도 점차 집착과 의심으로 변해가며 정신적으로 피폐해집니다. 그녀는 브론스키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어 하는 욕망과, 그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감 사이에서 고통받습니다. 특히 모스크바와 시골 생활을 오가며 겪는 심리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를 여는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처음부터 조금 의심했다. 정말 행복은 서로 닮아 있고 불행만이 저마다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런데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오히려 이 문장을 거꾸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이 단순해서 비슷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대개 행복 앞에서는 그 내부를 굳이 해부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잘 돌아가는 시계의 톱니를 하나씩 들여다보는 사람은 드물지만, 시계가 멈추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뚜껑을 열고 무엇이 어긋났는지 살핀다. 불행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불행은 삶의 표면에 금을 내고, 그 틈으로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욕망과 두려움, 사랑과 권태, 책임과 고독의 결을 드러낸다. 그러니 불행한 가정들이 저마다 다르게 보이는 것은 불행이라는 것이 특별히 더 복잡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불행 앞에서야 비로소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에서 안나와 레빈의 이야기가 나란히 흐른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서로 정반대의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안나는 사교계의 한가운데에서 브론스키와의 사랑이라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레빈은 도시에서 멀어진 들판에서 농부들과 낫을 휘두르며 노동과 가족, 신앙 속에서 삶의 의미를 더듬어간다. 한 사람의 삶은 점점 빠르게 타오르다가 소진되고, 다른 사람의 삶은 흙 위에 한 겹씩 천천히 쌓인다. 그러나 조금 더 오래 바라보면 두 사람은 사실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무엇이 내 삶을 견디게 할 것인가. 안나는 그 대답을 사랑이라는 하나의 강렬한 감정에서 찾았고, 레빈은 노동과 가족과 타인, 그리고 자신보다 오래 존재해온 어떤 질서 속에서 찾으려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차이는 행복과 불행의 차이라기보다 삶의 공백을 채우는 방식의 차이에 가까워 보였다. 안나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는 불꽃을 원했고, 레빈은 어둠 속에서도 오래 꺼지지 않는 작은 등불들을 하나씩 켜나갔다.
안나의 비극이 유독 서늘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브론스키를 사랑할수록 그녀의 세계는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좁아진다. 처음에 사랑은 답답했던 삶의 벽을 무너뜨리고 바깥으로 나아가는 문처럼 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문은 오직 브론스키에게로만 이어지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남편과 아들, 사회적 관계와 자신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간 뒤, 그녀는 점차 사랑 하나에 자기 존재의 거의 모든 무게를 싣는다. 그러자 사랑은 더 이상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감정이 아니라 삶 전체를 지탱해야 하는 기둥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한 사랑이라도 한 인간의 삶 전체를 혼자 떠받칠 수는 없다. 기둥이 하나뿐인 집은 그 기둥에 작은 균열만 생겨도 건물 전체가 흔들린다. 브론스키의 무심한 표정 하나, 늦은 귀가 하나,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작은 의심 하나가 안나에게는 단순한 연인의 갈등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곧 자신의 존재가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랑을 잃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잃는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안나의 비극을 사랑을 선택한 사람에게 내려진 벌처럼 읽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비극은 인간이 단 하나의 존재나 감정에게 자기 삶을 증명해달라고 요구할 때 생기는 위험에 가까워 보였다. 사랑은 한 사람의 삶을 밝혀줄 수는 있어도 그 사람 대신 삶 전체가 되어줄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이 너무 강렬할 때 자꾸만 그것을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 착각한다. 마치 태양이 너무 밝아서 그 빛 아래 다른 별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하나의 감정이 지나치게 커지면 그 밖에 자신을 붙들고 있던 것들이 모두 사라진 듯 느껴진다. 그러나 별들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된 것뿐이다. 안나는 결국 사랑 이외의 빛을 거의 볼 수 없는 곳까지 걸어갔고, 그 하나의 빛마저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자신에게 남은 세계 전체가 어두워졌다고 믿게 된다.
반대로 레빈이 삶의 의미에 가까워지는 순간들은 이상하리만큼 소박하다. 나는 그가 농부들과 함께 밭에서 낫을 휘두르는 장면을 읽으며, 톨스토이가 왜 하필 사유가 아니라 노동 속에서 그에게 잠깐의 평화를 허락했는지를 생각했다. 레빈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만, 죽음을 앞둔 형의 몸 앞에서는 그 모든 질문과 논리가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죽음은 사유로 풀어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설명이 끝나는 자리처럼 그 앞에 놓인다. 그런데 들판에서 몸을 움직일 때, 땀이 흐르고 낫이 일정한 간격으로 풀을 베어낼 때, 그는 잠시 질문하는 자신을 잊는다. 그 순간 삶은 설명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살아지고 있는 하나의 리듬이 된다. 나는 여기서 의미라는 것이 우리가 끝끝내 발견해야 할 문장이라기보다, 때로는 질문을 잊을 만큼 무언가에 온전히 몸을 맡기는 순간에 잠깐 나타나는 감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어느 순간 의미가 뒤늦게 우리를 따라잡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나가 마지막으로 기차역을 향해 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 거리의 풍경을 하나같이 추하고 악의적으로 받아들이는 장면도 오래 남았다. 그 순간 그녀에게 세상은 갑자기 견딜 수 없이 천박하고 비열한 장소가 된다. 그러나 변한 것이 정말 세상이었을까.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며 절망이라는 감정에는 자기 자신을 세계 전체로 확대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슬픈 사람에게 세상은 슬퍼 보이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모든 우연은 위협의 징조로 읽힌다. 마음은 투명한 유리창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색으로 바깥을 물들이는 스테인드글라스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안나의 마지막 세계가 그토록 어두웠던 것은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녀 안에서 이미 너무 많은 빛이 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불행과 세계의 본질을 더 이상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느새 세상에는 절망밖에 없다는 명제로 바뀌는 순간 말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소설의 첫 문장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행복한 가정이 모두 비슷해 보이는 까닭은 어쩌면 행복이 어떤 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것들이 서로의 무게를 조금씩 나누어 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족과 일, 사랑과 우정, 습관과 책임, 신념과 사소한 기쁨들이 서로 기대어 있기 때문에 하나가 흔들려도 삶 전체가 곧바로 쓰러지지 않는 것이다. 행복은 하나의 거대한 기둥 위에 세워진 궁전이 아니라, 얼핏 보기에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수많은 들보와 못이 서로의 무게를 조금씩 나눠 가진 집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래서 <안나 카레니나>를 덮고 나서 나는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보다 무엇들이 나를 붙들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됐다. 나는 지금 내 삶의 무게를 어디에 싣고 있는지, 혹시 하나의 사랑이나 하나의 성공, 한 사람의 인정 같은 것에 너무 많은 무게를 몰아주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됐다. 안나와 레빈의 삶은 결국 나에게 서로 다른 대답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경고처럼 남았다. 하나는 삶 전체를 단 하나의 불꽃에 맡겼을 때 인간이 얼마나 쉽게 그 불길 속에서 자기 모습을 잃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삶이란 거대한 의미 하나를 찾아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작고 평범한 것들에게 조금씩 자신의 무게를 나눠주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삶은 어쩌면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견딜 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무너질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유를 만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흔들릴 때는 일이, 일이 무너질 때는 사람이, 믿음이 희미해질 때는 아주 사소한 하루의 습관이 우리를 붙잡아주는 것. 그렇게 서로 다른 작은 기둥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서로의 균열을 대신 견디고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의 상실이 자신의 전부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어쩌면 톨스토이가 그토록 많은 인물과 관계와 일상을 이 거대한 소설 안에 밀어 넣은 이유도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한 인간의 삶은 결코 하나의 사랑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단 하나의 절대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수많은 불완전한 의미들 사이에 조금씩 자신의 무게를 나누어 싣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기쁨으로, 증오로, 파멸로.
(스포 왕 많음)
안나의 감정이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7부가 되면 차라리 안나가 이런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타깝다. 브론스키를 쫓아가기 위해 출발한 기차역에서 느낀 인간들에 대한 혐오, 자신과 브론스키에 대한 증오, 절망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안나의 독백 부분은 특히 좋다. 러시아의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부분. 초반 젊은 남자의 기차사고를 보며 매우 큰 충격을 받았던 안나가 기차 밑으로 기어들어가며 삶을 회개하는 것을 보면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아이러니라는 것이 느껴진다.
다른 주인공인 레빈이 후반에 돌고 돌아 결국 종교로 회귀하는 것이 매우 의외였는데, 농부든 귀족이든 차르든, 누구든 선을 향해 나아가며 이를 살도록 이끄는 것이 그리스도이다… 이성적인 레빈이 유일하게 이성적 이해를 포기하고 드디어 3권에 걸친 죽음과 삶에 대한 괴로운 사색에서 벗어나는 장면은 정말 명장면 그 자체.
'안나 카레니나' 완독은 2020년 새해 목표였는데, 2021년 3월이 돼서야 끝났다. 굳이 변명하자면, 1권에서 폭주하던 전개가 2권에서 갑자기 느려지더니 3권에서는 급기야 정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안나와 브론스키 사이의 갈등은 곪고 곪아 어떤 식으로든 파국을 기다리고 있었고, 각종 모임에서 전개되는 여러 논쟁들은 당시 러시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는 몰입하기 힘들었다. 레빈의 고민과 번민은 또 어떤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왜 사는지에 대한 그의 끝없는 고민에 한편으로는 공감하면서도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고 재촉하게 되는 답답함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이런저런 이유로 3권을 읽는데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결말이 담긴 '7부'로 끝이 날 만도 한데, 톨스토이는 8부로 끝을 맺는다. 심지어 안나의 죽음에 대한 브론스키나 카레닌의 반응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안나의 죽음 뒤에도 그저 자연스럽고 마땅히 흘러가는 세상사와 레빈의 머릿속을(또!) 보여줄 뿐이다. 오히려 동생의 죽음에도 예의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은 스티바를 보며 - 가족의 죽음 뒤에도 삶은 계속되는 것이므로 이해가 되면서도 - '으휴 인간아….'라는 낮은 탄성을 뱉게 된다. 신에게도, 인간에게도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안나는 죽음을 선택하고, 그 죽음을 통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톨스토이가 굳이 8부를 붙인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사실 안나 자체가 권선징악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복잡한 인물이긴 하지만, 브론스키나 카레닌 또한 마땅히 처벌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7부로 끝나는 것은 '불륜한 자, 벌 받을지어다' 러는 권선징악의 가르침이 될 뿐인데, 그렇게 결론 지을 만큼 삶은 단순하지 않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는 걸까? 그녀는 살고 싶은 거야. 하느님이 우리의 영혼에 그것을 불어넣었잖아. 어쩌면 나도 그녀와 똑같이 행동했을지도 몰라. _ 126쪽(돌리의 생각)
8부 전체를 거쳐 보여주는 레빈의 사색 속에 톨스토이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압축된 것 같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삶과 체험으로 얻은 것만이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우리가 필요한 것은 이미 가지고 태어났다는 발견' 말이다. 그 발견 또는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 내면의 힘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조언이다. 그렇게 결심하더라도 또 실수하고 번민하고 좌충우돌할 거라고 한 발 빼면서도, 그래도 그런 삶에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이 새로운 감정은 나를 바꾸지도, 나를 행복하게 하지도 않아. 그리고 내가 상상하던 것처럼 갑자기 나를 계몽시키지도 않아. 아들에 대한 감정과 마찬가지지. 역시 뜻밖의 선물은 없었어. 믿음인지 아닌지, 난 이게 무엇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이 감정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을 통해 들어와 내 영혼 속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렸어. 난 여전히 마부 이반에게 화를 내겠지.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여전히 내 생각을 부적절하게 표현할 거야. 나의 지성소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심지어 아내와의 사이에도 여전히 벽이 존재할 거야. 난 여전히 나의 두려움 때문에 아내를 비난하고 그것을 후회하겠지. 나의 이성으로는 내가 왜 기도를 하는지 깨닫지 못할 테고, 그러면서도 난 여전히 기도를 할거야. 하지만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 모든 일에 상관없이, 이제 나의 삶은, 나의 모든 삶은, 삶의 매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의 명백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나에게는 그것을 삶의 매 순간 속에 불어넣을 힘이 있어!' _ 560쪽
끝으로, 톨스토이의 인간에 대한 이해, 감정의 묘사는 정말 탁월한 것 같다. 출산 후 아내의 무사함을 확인하고 아이를 처음 안았을 때, 아빠의 감정에 대해 이토록 적확한 묘사가 있을까. 안나와 브론스키의 갈등, 숱하게 묘사되는 부부싸움에 대한 묘사도 압권이다. 사소한 일로 인해 불거지는 갈등, 화해에 대한 시도, 하지만 질 수 없다는 의지, 불가피한(!) 양보, 그리고 이어지는 왠지 진 것 같다는 억울함, 자연스럽게 싸늘해지는 태도, 다시 이어지는 갈등, 이 모든 감정이 순서 없이 얽히고설키는 그 지난한 과정을 어쩜 이렇게 잘 그려냈을까. 이 책이 당대에도 그렇지만 후대에도 높이 평가받는 데는 감정을 현실적으로 잘 그려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만나면 반갑다고 뺨 때리고, 매회 고음 발성 없이는 전개되지 않는 어느 드라마와는 다르게 말이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 지금, 그는 그녀가 건강하게 살아 있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토록 절망적으로 울어 대는 존재가 그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사고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키티는 살아 있고 고통은 끝났다. 그리고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그는 그것을 이해했고 그것으로 인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하지만 아이는?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왔으며,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생각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아기는 그에게 불필요한 무언가로, 지나친 과잉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아기에게 익숙해질 수 없었다. _ 348쪽
안나카레니나/톨스토이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 은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사회소설이라고 격찬했으며 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완벽한 작품으로, 현대 유럽 문학 중에서 이 작품에 비견될 만한 것은 찾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저는 책장을 다 덮고서 한 줄 독서평을 쓴다면 이 작품은 '한국판 사랑과 전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쓰고 싶었습니다.
이 책 속에는 사람에 대한 위선, 잘못된 신념, 권력에 대한 욕망, 불타는 사랑 등 사랑과 전쟁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요소들이 다 포함되어 있으며 종교관, 결혼관, 계급사회에 대한 사회구조 등 사람이 살아가는데 겪는 모든 고민이 응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얼핏 보면 막장드라마 같은 이 작품이 세계문학사에 큰 획을 긋는 위대한 문학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안나 카레니나'라는 인물을 통해 그 모든 문제를 제시하고 사랑의 본질과 인간존재의 문제를 독자 자신들의 속마음을 투영해 볼 수 있는 잣대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처음과 끝, 그리고 두꺼운 책의 내용 속의 의미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이 한 문장에 다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행복한 가정의 사정은 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첫 문장의 의미를 통해 이미 안나의 행복이 어떤 불행으로 이어질지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열차에서 시작되어 공교롭게 열차에 몸을 던짐으로써 그 불행이 끝납니다.
전편에 흐르는 내용을 보면 불륜을 저지른 한 여인의 운명적 사랑과 그 사랑이 식어버렸을 때 그 여인이 받았을 충격은 어떤 비극적 결말을 향해 가는지 잘 보여주는 한 편의 막장 드라마 같은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정교사와 바람난 오빠를 화해시키기 위해 모스크바로 왔다가 오히려 자신이 무도회장에서 만난 젊은 백작 브론스키와 바람이 나게 되고 원래 불꽃같은 사랑은 활활 타올랐다가 불씨가 되는 사랑이 줄어들자 금방 사그라들게 마련이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브론스키의 사랑만 간절히 원한 안나는 결국 사회적 냉대와 브론스키와의 사소한 다툼 등으로 고뇌하다 결국 자신의 잘못을 용서 빌며 자살로 생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안나가 생각한 행복한 가정은 브론스키와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사랑, 그 사랑 이외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브론스키와 불행이 시작되고 파멸의 길을 앞에 두고선 수만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을 합리화하려 합니다.
안나가 생각한 불행은 스무 살이나 많은 남편과 사랑 없는 결혼을 한 것부터 시작합니다. 다른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자 8년 동안이나 부부로서 잘 살아왔던 그녀의 남편은 흉측하게 보이기 시작했으며 무엇이든지 마음에 들지 않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뭐든 좋게 보이지만 한 번 미워지기 시작하면 모든 게 싫은 거랑 같은 거겠죠. 연애를 해 본 사람들은 잘 알거에요.
여기서부터 불륜의 자기 합리화가 시작됩니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내 잘 못이 아니라 오히려 남편의 무관심과 사랑 없는 결혼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려 합니다.
그녀가 브론스키를 떠올린 그 순간, 그녀 마음 깊숙한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해 아주 따뜻해 타버릴 듯 뜨거워'
무도회에서 처음 마주한 브론스키를 생각하며 안나는 한 번의 만남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껴버립니다. 자신 스스로가 도덕적 순수함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 감정은 첫 만남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어버립니다.
브본스키는 안나에게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편의 근엄한 모습을 보면서 '루저의식'을 느끼며 젊은 수컷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그래,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거야. 사랑할 수 없겠지' 말하며 혼자 상상해버립니다.
'그녀의 감정은 그녀의 양심에 달린 것, 그리고 내 영역 밖의 일.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명확해진다'
안나의 남편은 안나가 브론스키와 만남을 의심하면서 안나에게 어떻게 이 상황을 말할지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소심한 남자의 전형인가요, 아님 아내에 대한 배려일까요.
안나의 남편은 불안과 걱정이 앞서면서도 아내의 사생활과 아내에 대한 믿음으로 질투와 의심은 아내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질투가 대단히 수치스러운 감정이며 아내를 믿는 것이 그가 해야 될 일이라며 감정을 자제합니다. 이 친구 착해도 너무 착한 것 같습니다. 부인을 정말 사랑하는 것 같네요.
'저 사람은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게 아니야. 오로지 사교계 사람들의 눈이 무서운 거지. 그래서 극도로 흥분한 거지'
어렵게 안나에게 꺼낸 한마디가 오히려 안나에게 오해를 사게 되는 계기가 되어버린 거네요.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안나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하려고 오히려 남편에게 뒤집에 쒸웁니다.
'어쩔 수 없어. 이미 너무 늦어버렸어'
안나의 마음은 이미 다른 남자에게 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남편이 사랑한다고 말하자 '사랑? 사랑? 그가 사랑을 알기나 알까? 마음속에 경멸을 담아 내뱉은 말을 보면 안나의 불타는 마음속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브론스키 어머니에 대한 생각에서부터 러시아 사교계의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브론스키 어머니는 아들의 불륜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기뻐했다. 그녀의 생각에 매력적인 청년으로 전성기를 맞는 일은 사교계에 불륜을 낳는 것밖에 없었다
'경멸 받아 마땅한 여자가 죄를 지은 것으로 내가 불행해질 수는 없지. 나는 그녀가 내게 넘긴 이 괴로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출구를 찾아내는 일만 하면 돼'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이 자식 완전 쓰레기 같은 놈이었군요. 처음엔 불륜을 의심하고도 가정을 지키려는 멋진 남자인 줄 알았더니 자신의 미래가 안나로 인해 걸림돌이 되자 이제 나 몰라라 하는군요.
결국 이 자식은 자신의 위신과 사회적 평판이 더 중요했던 거군요. 사랑은 개뿔
'난 결코 행복해질 수 없어. 그녀나, 그도 결코 행복해지면 안 되지'
이젠 남 주기는 더 아깝다는 심보 같은데요. 그래서 이혼도 못해주고 별거로 지내기로 한 건가 봐요. 정말 무서운 남자인 것 같습니다. 위선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 같네요. 안나와 결혼해서 그동안 지내왔던 8년의 세월은 위선과 자신의 안위 때문에 살아왔다는 걸 안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 생활은 지옥과도 같은 삶의 연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은 파멸시키고자 하는 사람을 먼저 미치게 한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자신이 원하던 직위 임용 소식의 편지를 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이 익숙해질 수 없는 환경이란 없다.
레닌은 아내가 사랑하는 남자와 말도 안 되는 우정을 나누고 타락한 여자의 집에 찾아가서 아내를 슬프게 하는 이런 상황들로 목적 없는 삶에 대해 많은 회의감을 느끼게 됩니다.
안나는 브론스키가 오직 자신만을 위한 사랑에 쏠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 생각에 브론스키는 이제 그녀에 대한 사랑이 식어있으며 사랑의 일부가 다른 여성에게 옮겨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나는 브론스키가 만나는 모든 여성에 대해 질투하기 시작하고 그에게 분노하게 됩니다. 안나는 자신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브론스키의 행동에서 조금씩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브론스키가 원인이 아니라 안나 자신이 선택한 불안과 초조와 분노가 뒤섞인 감정들이었습니다.
'난 오직 사랑만을 원해. 그런데 그 사랑이 없어졌어. 그러니 모든 게 끝난 것과 마찬가지야'
아마 브론스키도 자신에 대한 안나의 이러한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이 많이 부담되었을 것입니다. 안나는 육체의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정신적 지배를 통해서 주변의 시선을 통제하려 했던 것입니다.
젊은 브론스키는 처음엔 사랑이라 생각했지만 점점 자신에게만 너무 의존하는 안나를 보면서 사랑보단 집착과 애욕의 감정을 더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소설은 사랑과 쾌락에 대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에 대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람은 평생 온전한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사랑 이외에도 수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친인척뿐만 아니라 직장, 친구, 육아와 경제적 여건 등 수많은 관계 속에서 현실과 마주해야 합니다.
'사랑만으로 살 수 있다고요?'
행복한 결혼생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랑이라는 특징적인 것이 아닌 여러 구성요소들이 결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아이의 순진한 미소가 버텨주고 아이가 자라 부모 곁을 떠나면 '살아온 정'이라는 감성의 추억으로, 어느 한 가지 부족하면 나머지 부족분을 채워가는 부부생활이 되어야 그 결혼생활은 오래 유지될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안나와 브론스키, 키티, 레빈의 개인 심리 묘사를 감정 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안나가 보여준 의식의 흐름은 인간이 과연 진정한 사랑은 무엇을 갈구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가정을 버린 대가로 모든 원죄를 품에 안고 떠난 안나, 시대의 사회 규범을 버리고 오직 자신의 사랑을 찾고 싶어 감정에 충실한 안나, 우리는 안나의 도덕성과 불륜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성숙하지 못한 인간과 사회적 비난과 냉대보다는 이해와 믿음으로 성숙한 사랑을 지향할 수 있는 배려가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따뜻한 남쪽나라 통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