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애지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으로 작품성을 인정 받은 문태준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이후 삼 년 만의 신작 시집이자, 문학동네시인선이 100번을 지나 2018년 들어 처음으로 독자에게 건네는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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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내용 요약 🍃
문태준 시인의 산문집인 이 책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풍경과 관계 속에서 건져 올린 깊은 사유와 따스한 위로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 삶이 거창한 성취나 특별한 사건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찰나의 순간과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로 채워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책의 제목처럼 그가 '사모하는 일', 즉 삶을 대하는 정직하고 애틋한 태도는 독자들에게 무기력한 일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힘을 줍니다. 📖
내 어릴 적 어느 날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노랗게 익은 뭉뚝한 노각을 따서 밭에서 막 돌아오셨을 때였습니다
누나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헐렁하고 지루하고 긴 여름을 걷어 안고 있을 때였습니다
외할머니는 가슴속에서 맑고 푸르게 차오른 천수(泉水)를 떠내셨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곡식을 까부르듯이 키로 곡식을 까부르듯이 시를 외셨습니다
해마다 봄이면 외할머니의 밭에 자라 오르던 보리순 같은 노래였습니다
나는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가 울렁출렁하며 마당을 지나 삽작을 나서 뒷산으로 앞개울로 골목으로 하늘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니 석류꽃이 피어 있었고 뻐꾸기가 울고 있었고 저녁때의 햇빛이 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시를 절반쯤 외시곤 당신의 등 뒤에 낯선 누군가가 얄궂게 우뚝 서 있기라도 했을 때처럼 소스라치시며
남세스러워라, 남세스러워라
당신이 왼 시의 노래를 너른 치마에 주섬주섬 주워 담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몰래 들은 어머니와 누나와 석류꽃과 뻐꾸기와 햇빛과 내가 외할머니의 치마에 그만 함께 폭 싸였습니다
-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 문태준
당신의 호수에 무슨 끝이 있나요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한 바퀴 또 두 바퀴
호수에는 호숫가로 밀려 스러지는 연약한 잔물결
물위에서 어루만진 미로
이것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 ‘호수’, 문태준
바닷가는 밀려와 춤추는 파도들로 흥겨워요
나는 모래밭에 당신의 이름과 나의 질문을 묻었어요
나는 모래성을 하나 더 쌓아놓고 바닷새보다 멀리서 올라올 밀물을 기다려요
모래알에는 보리처럼 뿌린 별이 가득한데
모래알에는 초승의 달빛이 일렁이는데
우린 이 바닷가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우린 이 바닷가에서 다시 알아볼 수 있을까요
- ‘여름날의 마지막 바닷가’, 문태준
어쩌면 당신에겐 아직 소년의 얼굴이 남아 있습니까 물 아래 말갛고 조용한 모래들이 서로 반짝이듯이 하십니까
나는 멀리서 와서 당신의 잔잔하고 고운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내 종이배에 싣습니다 나의 생일과 어제 꺾은 칡꽃과 나의 걱정과 함께 당신의 깨끗한 시내를
나는 여기저기에 솟은 돌들 사이를 지나갑니다
나는 엉클어진 내 생각들의 사이를 지나갑니다 시작되는 밤을 지나갑니다
오늘밤엔 종이배에 젖니 같은 샛별과 너른 밤하늘이 가득합니다
나는 당신의 새벽을 지나갑니다 까마귀떼가 검은 빛들이 푸더덕거리며 사방으로 날아 흩어지는 것을 봅니다
당신의 새파란 앞가슴에 새잎 같은 초승달이 앳된 소년이 서 있는 것을 봅니다
나는 동이 트는 당신을 지나갑니다
- ‘종이배’, 문태준
누군가 언덕에 올라 트럼펫을 길게 부네
사잇길은 달고 나른한 낮잠의 한군데로 들어갔다 나오네
멀리서 종소리가 바람에 실려오네
산속에서 신록이 수줍어하며 웃는 소리를 듣네
봄이 돌아오니 어디에고 산맥이 일어서네
흰 배의 제비는 처마에 날아들고
이웃의 목소리는 흥이 나고 커지네
사람들은 무엇이든 새로이 하려 하네
심지어 여러 갈래 진 나뭇가지도
양옥집 마당의 묵은 화분도
- ‘다시 봄이 돌아오니’, 문태준
당신은 허리춤에 요란한 바람과 자욱한 안개를 넣어두었네
내부는 깊은 계곡처럼 매우 신비롭네
외출을 앞둔 당신은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을 거울 앞에서 큰 빗으로 오래 빗어 내리네, 장마처럼 저음으로 중얼거리면서
당신은 여름밤의 무수한 별들을 흩어버리네
촛불을 마지막까지 불태워버리네
밤마다 우리를 눈 감을 수 없게 하네
당신은 연륜 있는 의사들을 좌절시키네
지혜의 눈에 검은 안대를 씌우네
그러나 아이들의 꿈인 사과를 떨어뜨리지는 못하리
당신의 고백을 나는 기다리네
허공이 쏟아지기를 기다리는 절벽처럼
꽃을 기다리는 화병처럼
- ‘절망에게’, 문태준
겨울 바다에 오니
몸살이 난 듯
나는 내가 숨차다
파도는 나를 넘어간다
게으르고 느른한 나를
들판보다 거대한 파도는
전면적으로
나를 허물어뜨리고
나는 해변에 나를 펼쳐놓고
모래의 내면을 펼쳐놓고
여러 해가 되었군
격랑 아래 내면을 펼쳐놓은 지
해풍은 저 멀리서
매섭게 또 눈 뜨고
파도는 들고양이처럼
흰 이마를 길게 할퀸다
- ‘검은모래해변에서’, 문태준
나를 꺼내줘 단호한 틀과 상자로부터 탁상시계로부터 굳어버린 과거로부터 검은 관에서 끄집어내줘 신분증과 옷으로부터
흐르는 물속에 암자의 풍경 소리 속에 밤의 달무리 속에 자라는 식물 속에 그날그날의 구름 속에 저 가랑비와 실바람 속에 당신의 감탄사 속에 넣어줘
나는 다음 생(生)에 놓아줘 서른 세 개의 하늘에 풀어놓아줘
- ‘매일의 독백’, 문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