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의 언론과 문학

정진석 지음 | 소명출판 펴냄

전쟁기의 언론과 문학

이 책을 읽은 사람

나의 별점

읽고싶어요
28,000원 10% 25,200원

책장에 담기

게시물 작성

문장 남기기

분량

보통인 책

출간일

2012.7.20

페이지

385쪽

상세 정보

언론과 문학은 경계를 긋기 어려울 정도로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 이후 6ㆍ25전쟁 시기에는 언론인이면서 문인, 문인이면서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사람이 많다. 광복 이후에 발행된 좌익신문과 남침 이후 서울에서 발행된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에 간여한 언론인 가운데도 문인이 많았다. 그래서 임화를 비롯하여 언론과 관련이 있는 여러 문인들이 북한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았던 사건도 언론역사 연구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상세 정보 더보기

추천 게시물

에린님의 프로필 이미지

에린

@erint56i

  • 에린님의 아무튼, 달리기 게시물 이미지

아무튼, 달리기

ㅅㅁㅅ 지음
위고 펴냄

40분 전
0
에린님의 프로필 이미지

에린

@erint56i

  • 에린님의 아무튼, 달리기 게시물 이미지

아무튼, 달리기

ㅅㅁㅅ 지음
위고 펴냄

42분 전
0
에린님의 프로필 이미지

에린

@erint56i

아무튼 시리즈 가볍게 읽어 볼 수 있어서 좋은데
스마트 도서관갔다가 발견해서 읽어봄
취미로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 것에 대한 고찰
뭔가 장비가 많이 필요하지 않고 몸과 신발과 운동복만 있으면 부담스럽지 않게 시작이 가능해서 좋다
작가가 혼자 달리기를 시작해서 러닝 크루에서 훈련하며 마라톤까지 도전하는 것에 뭔가 내가 성취감이 느껴졌다
나도 러닝 크루 한번 도전해봐야겠다!

아무튼, 달리기

ㅅㅁㅅ 지음
위고 펴냄

46분 전
0

이런 모임은 어때요?

대여하기
지금 첫 대여라면 배송비가 무료!

상세정보

언론과 문학은 경계를 긋기 어려울 정도로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 이후 6ㆍ25전쟁 시기에는 언론인이면서 문인, 문인이면서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사람이 많다. 광복 이후에 발행된 좌익신문과 남침 이후 서울에서 발행된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에 간여한 언론인 가운데도 문인이 많았다. 그래서 임화를 비롯하여 언론과 관련이 있는 여러 문인들이 북한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았던 사건도 언론역사 연구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출판사 책 소개

책머리에
언론과 문학과 정치의 함수관계

태평양 전쟁, 광복, 6ㆍ25전쟁

“전쟁은 설사 그것이 정의를 위한 불가피의 전쟁일 경우에 있어서도 문화의 두려운 파괴자인 것은 두말할 것이 없다”는 글이 필화가 되어 수필가 김진섭이 일본 헌병대에 불려가서 곤욕을 치렀던 사건은 1940년 1월에 일어났다. 소리 없이 진행된 필화였지만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편집 간부들이 신문사에서 연쇄적으로 물러나는 사태가 벌어지는 후유증이 뒤따랐다. 2차 대전의 불길이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고,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의 긴장된 국제정세였다.
전쟁시기의 언론과 문학은 정치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숙명에 처하게 된다. 전쟁은 언론과 문학에 통제를 가할 수 있는 강제력을 지닌다. 8ㆍ15 광복이라는 민족사의 대 변환점을 가운데 놓고 그 앞과 뒤에 태평양전쟁과 6ㆍ25전쟁이 있었다. 두 전쟁 기간의 언론과 문학은 적이 통치하는 지역에 남겨진 포로와 유사한 형태로 위축되고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 식민지 치하에서는 ‘친일’이 후유증으로 남았고, 6ㆍ25전쟁 시기에는 이념문제가 생과 사를 갈랐다.
언론인과 문인에게는 고난의 나날이었다. 언론의 자유, 표현과 창작의 자유 따위는 사치스러운 이야기였다. 신변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엄중한 시기였다. 남과 북이 치열한 이념논쟁으로 대립하면서 총부리를 맞대고 처절한 싸움을 벌이던 때에 잘못 선택한 길로 들어섰거나 순간적인 판단착오로 영원히 가족과 이별하고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언론인과 문인이 많았다.
제1부 '해방공간 6ㆍ25 전쟁기의 언론'은 광복 후 남한에서 발행된 좌익지를 개관하고 언론과 문학을 전쟁의 도구로 활용한 북한의 신문을 살펴보았다. 광복 이후 우리는 언론 자유가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이론을 신봉해 왔다. 언론은 독립불기(獨立不羈)의 자유로운 위치에서 사실보도와 함께 권력을 비판하고 환경을 감시하는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긴다. 언론과 문학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과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외부 세력에 저항하고 투쟁했다. 압도적인 권력의 힘에 굴종한 적도 있지만 언론과 문학은 사명을 망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론이 한쪽으로 쏠리는 집중화 현상을 경계하고 다양한 논의와 주장이 사회 발전의 요체라는 사실도 강조한다. 그래서 노무현정권 시절에는 개혁입법이라는 명분으로 이른바 메이저 신문의 시장 점유율을 규제하고 마이너 신문을 국고로 지원하는 법적 제도까지 만든 적이 있었다.
북한은 언론과 문학을 전쟁 수행과 정권유지를 위한 선전선동의 도구로 활용해 왔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중요기사를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과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이 획일적인 보도와 편집을 한다는 정도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두 신문은 북한의 ‘관보’에 해당하는 공식 매체다. 여론의 다양성이라는 개념은 없다. 정부와 당에 대한 비판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공산주의 이론이 그렇다 하더라도 북한에서 발행된 전쟁 당시의 신문을 보면서, 민주주의 언론 이론이 머리에 박힌 입장에서는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의 방송 연설은 북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당과 정부 기관지가 동시에 같은 편집으로 지면에 구애받지 않고 전문을 게재한다. 김일성의 대형 사진과 함께 그의 지침을 “높이 받들고” 당에 충성하겠다는 기사가 뒤따라 실린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이 두 기관지의 1면 머리에 크게 실리는 날은 언제나 스탈린 사진의 위치가 앞자리를 차지한다. 영락없는 위성국가의 모습이다.

전쟁과 필화, 재판과 죽음
김일성은 휴전 직후에 박헌영을 추종하던 남로당 계열에 피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모든 것을 비밀리에 처리하는 김일성 정권이지만 남로당 재판은 문건을 공개하고 일본에서 번역 출판까지 하도록 만들어 자신들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자료로 활용하였다.
시인 임화를 비롯한 남로당 계열 지식인들은 남한에서도 그랬지만 북으로 올라가서도 언론과 문학을 무기로 남조선의 ‘해방’을 외치며 혼신을 다해서 투쟁했지만 비참한 말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임화와 이태준은 1951년 4월 26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수여했던 최고 등급 국기훈장(제2급)을 받은 문학ㆍ예술인 7명 가운데 들어 있었다. 하지만 불과 2년 뒤에 두 사람의 문학은 매도당했다. 임화는 재판정에 서서 자신의 입으로 미제의 간첩이었다는 ‘죄과’를 자백하는 치욕스러운 수모를 겪은 뒤에 네 가지 법률 위반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북한의 군사법정은 그를 네 번 죽어야 마땅할 인물로 판결한 것이다.
제2부 '태평양 전쟁기 문학과 언론의 필화'는 1940년 1월에 있었던 김진섭의 매일신보 필화에서 1953년 한하운 시인이 서울신문에 실었던 <보리피리> 사건까지, 전쟁의 와중에 언론과 문학이 처했던 상황을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서 실증적으로 규명해 보았다. 김진섭 필화는 언론과 문인의 경계가 애매한 사건이었다. 단파방송 수신사건으로 투옥되었던 문석준의 옥사(1944), 총독부 고등경찰 사이가 시치로 암살사건(1945)을 다루었다.
제3부 '전쟁 후유증과 친일문제'에서는 한센병 시인 <보리피리> 필화(1953), 여운형의 친일 문제 등이 전쟁과 관련되는 내용이다. 월북 언론인 이갑섭의 <조보연구>는 학구적 언론인이 북한에서 1950년대에 집필한 논문의 미스터리를 추적해 본 것이다. 모두가 전쟁이 언론과 언론인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언론사 연구의 지평 확대
나는 언론의 역사를 일제의 탄압과 언론의 수난이라는 관점에서 처음 연구하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연륜을 쌓으면서 도달한 결론은 총독부의 언론탄압은 민족언론의 수난사라는 시각에 고정시킬 것이 아니라 일본의 언론정책이라는 보다 넓은 구도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론과 문학에 대한 검열과 통제는 식민지 조선에만 자행된 것이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군국주의 일본 본토에서도 통제는 시행되었고 점차 강화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언론, 사상, 문학을 통제하고 탄압한 것은 일본 국내의 문화 전반에 걸친 정책과도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총독부의 언론통제 관련 자료를 되도록 많이 찾아내고 여러 사람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자료의 확산에 나름대로 힘을 썼다.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의 영인에 힘을 보탰고, <언론조선총독부>(커뮤니케이션북스, 2005)를 저술한 것도 일제 강점기의 언론사 연구를 조선 내부에 국한하지 않고 일본의 언론정책과 연관 아래 종합적으로 연구하자는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내가 편찬한 <조선총독부 언론탄압자료총서>(전21권, 한국교회사문헌연구원, 2007), <조선총독부 급 소속관서 직원록>(전34권, 일본 ゆまに書店, 2010) 같은 자료는 일제 강점기의 역사와 언론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이다.
광복 이후의 언론사 연구에 북한의 언론사를 포함시키는 문제도 일제 치하 언론사 연구와 같은 시각에서 출발했다. 남북한은 뛰어넘을 수 없는 인위적인 장벽을 쌓았다. 전쟁 전의 38도선과 전쟁 이후의 휴전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상반된 두 정치체제 아래 7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데올로기 갈등의 와중에 언론과 문학 분야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미군정 초기에 남한에서는 공산당이 공개적으로 활동하였으며 남로당 기관지와 좌익논조로 발행된 신문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전쟁 전까지 남한에서는 좌익 언론인과 문인들이 정부를 비판하고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글을 쓴 경우도 적지 않았다. 완전히 자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남한의 언론은 민주주의가 초보적인 단계나마 실현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승만을 한마디로 ‘독재자’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다. 이승만 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1950년대 이승만 치하에는 정권 교체에 이르기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강력한 야당이 존재했다. 경향신문, 동아일보와 같은 강력한 ‘야당지’도 있었다. 수권 능력을 갖춘 야당,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이 있는 나라를 거두절미하고 ‘독재국가’라 부를 수는 없다.

월북 언론인들의 비참한 최후
북한에는 민주주의 정치가 구현되고 언론 자유가 보장되었는가.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북한에는 독립된 언론이 없다. 언론은 한 사람 독재자를 찬양하고 그의 나팔수 역할에 충실한 시녀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북한의 언론에 관심을 가진 것은 <6ㆍ25전쟁 납북>(기파랑, 2006)을 출간할 무렵이었다. 남한에서 활동하던 많은 언론인들이 월북하거나 납북되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생사는 어떻게 되었으며 자진 월북한 언론인들이 북한에서는 어떤 생활을 했는가. 남한의 언론사 연구만으로는 의문을 풀 수 없다는 한계에 도달했던 것은 일제 강점기의 언론사 연구와 비슷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김일성정권과 이승만을 객관적으로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 계기였다.
언론과 문학은 경계를 긋기 어려울 정도로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 이후 6ㆍ25전쟁 시기에는 언론인이면서 문인, 문인이면서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사람이 많다. 광복 이후에 발행된 좌익신문과 남침 이후 서울에서 발행된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에 간여한 언론인 가운데도 문인이 많았다. 그래서 임화를 비롯하여 언론과 관련이 있는 여러 문인들이 북한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았던 사건도 언론역사 연구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역사연구에는 ‘시대구분’이 있다. 시대를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왕조가 바뀌는 시기가 기준이 되기도 하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큰 사건을 기점으로 전과 후를 가르는 방법도 있다.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구분이 달라지고, 해석에도 차이가 난다. 그러나 근대사에서 8ㆍ15 광복이나 6ㆍ25전쟁과 같은 대 사건은 시대구분의 객관적인 기준으로 통용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역사의 큰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두 사건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큰 사건 이후에는 사회전반에 여러 가지 변화가 뒤따른다. 돌이켜 보면 8ㆍ15나 6ㆍ25도 칼로 무 자르듯이 하루아침에 벌어진 역사적인 사건은 아니다. 미리부터 있었던 징조를 깨닫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막지 못한 경우였던 것이다. 그런 역사적 대 변환의 시기 언론은 어떠했는지,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북쪽 언론의 실상은 아직 제대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한 언론에 관련된 자료는 극히 제한되어 있고, 접근도 어려웠다. 눈치 보지 않고 연구할 여건도 아니었다. 남한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언론 통제에 관해서는 비판적인 연구가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북한의 언론을 실증적으로 고찰하는 연구자는 드문 상황이다. 다행히도 근년에는 북한 관련 자료가 공개되기 시작했고, 연구의 분위기도 상당히 자유로워졌다.
박헌영, 임화를 비롯하여 월북한 언론인에 관한 연구 가운데는 북한의 주장을 부지불식간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았다. 김일성은 남로당 일파의 처단을 합리화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하였다. 하지만 용서받지 못할 민족 반역의 간첩행위, 친일행적의 척결이라는 북한의 논리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북한이 선전 목적으로 만든 자료를 보면서 역설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북한의 자료를 토대로 쓴 것이다. 로동신문과 민주조선, 문학잡지, 로동당 이론잡지 등과 박헌영, 이승엽, 임화 등 남로당 계열 숙청 당시의 재판기록을 활용하였다. 북한의 신문과 잡지를 통해서 한국 언론사의 연구범위를 북한의 언론까지 확대 포괄한 것으로 자부해 본다.
이전까지 나는 언론전문 출판사에서 대부분의 책을 출간했는데, 이번에는 문학 관련 전문출판사로 명성이 있는 소명출판에서 책을 내기로 한 것은 내용이 언론에 국한되지 않고 문학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 출간을 지원한 방일영문화재단과 출판을 맡아준 소명출판에 깊이 감사드린다.

2012년 5월
정 진 석

무제한 대여 혜택 받기

현재 25만명이 게시글을
작성하고 있어요

나와 비슷한 취향의 회원들이 작성한
FLYBOOK의 더 많은 게시물을 확인해보세요.

지금 바로 시작하기

FLYBOOK 게시물이 더 궁금하다면?

게시물 더보기
웹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