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소설 『페스트』는 평단과 독자 모두에게 찬사를 받으며 알베르 카뮈를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려놓는다. 『이방인』으로 이미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긴 했지만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페스트』가 처음이고, 그렇기에 그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치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많은 이들이 기다리던 알베르 카뮈의 다음 작품은 소설이 아닌 희곡이었다.
도서 DB 제공: 알라딘
이 책 어때요?
Q&A
게시물
—
이 책이 담긴 책장
오늘 독서, 어떻게 시작해 볼까요?
요약
계엄령 내용 요약
계엄령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1948년에 발표한 희곡으로, 2025년 3월 14일 녹색광선을 통해 안건우 번역으로 국내 출간된 작품이다(ISBN: 9791198375346). 📖 이 희곡은 1947년 소설 페스트의 성공 이후 카뮈가 각색한 스페인 작가 디에고 데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바탕으로, 전체주의와 공포정치에 맞선 인간의 저항을 강렬한 상징과 철학적 질문으로 그려낸다. 스페인 가상의 도시 카디스에서 페스트(역병)와 죽음이 의인화된 인물로 등장해 도시를 지배하며, 시민들이
계엄령은 카뮈의 희곡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제목 자체가 워낙 강렬해서 사실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이방인이나 페스트로만 알고 있던 카뮈가 무대라는 형식을 빌리면 어떤 얘기를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실제로 읽어보니, 그는 이 희곡에서 소설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정치와 폭력을 다루고 있었다. 페스트로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오른 다음 해에 나온 작품이라, 당시 사람들은 페스트를 무대에 각색한 정도를 기대했다가 완전히 다른 걸 받아 들고 당황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했다. 이건 전염병 이야기가 아니라 독재 그 자체를 무대 위에 올린 작품이었으니까.
배경은 스페인의 도시 카디스다. 불길한 혜성이 하늘에 나타난 뒤, 페스트라는 이름의 존재가 독재자의 모습으로 이 도시에 나타나 계엄을 선포한다. 그 옆에는 죽음의 명부를 관리하는 비서가 늘 따라다니고, 도시의 허무주의자 나다는 그런 페스트에게 순순히 협력한다. 이 설정을 읽으면서, 카뮈가 전염병이라는 소재를 이렇게 정치적 알레고리로 다시 쓸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페스트에서는 질병이 부조리한 재난 그 자체였다면, 여기서는 그 질병이 아예 독재자의 얼굴을 하고 등장한다. 공포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법과 질서라는 형식을 앞세워서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식까지, 전체주의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펼쳐놓은 게 인상 깊었다.
이 억압에 맞서는 인물이 청년 디에고다. 페스트가 포고령을 내리자 그는 연인 빅토리아의 집으로 숨어드는데, 판사인 그녀의 아버지는 그를 반기지 않는다. 지금은 법을 따르는 게 우선이라는 논리로 그를 내치려 하는데, 이 장면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판사라는 사람,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법으로 부당함을 가려내야 할 사람이 오히려 그 법을 앞세워서 공포에 순응하는 쪽을 택한다. 법이 정의를 지키는 도구가 아니라, 두려움 앞에서 몸을 사리는 걸 정당화해주는 명분으로 뒤집혀 버리는 순간이었다. 지금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는 그 말이 유독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판사였으니까. 법에 입각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려야 할 사람이, 오히려 그 법을 순응의 핑계로 써버린다는 게 이 장면을 더 씁쓸하게 만들었다.
근데 디에고는 거기서 굴복하지 않고 이렇게 외친다. 누가 절망을 말하는 겁니까? 절망은 재갈입니다. 포위당한 이 도시의 침묵을 깨는 것은 바로 행복의 번갯불, 희망의 천둥소리입니다. 희망은 우리의 유일한 자산, 이것을 어찌 포기할 수 있을까? 형제여, 우리는 모두 이 재갈을 벗어던지겠소! 이 대사를 읽으면서 시지프 신화가 떠올랐다. 거기서는 희망이 오히려 체념과 다름없다고, 산다는 건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 거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정반대로 희망을 저항의 무기로 내세운다. 처음엔 모순처럼 느껴졌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맥락이 달랐다. 미래의 구원을 막연히 기다리는 수동적인 희망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이 재갈을 벗어던지겠다는 의지로서의 희망이었다. 카뮈에게 문제였던 건 희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희망이 지금 이 순간의 저항을 미루는 핑계가 되어버리는 쪽이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요즘의 나를 자꾸 돌아보게 됐다. 공포라는 게 생각보다 훨씬 조용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길들인다는 걸, 이 희곡은 계속 보여준다. 사람들은 총칼보다 침묵과 순응을 통해 더 쉽게 무너진다. 그리고 그 침묵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늘 그럴듯한 법이나 질서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나도 살면서 어떤 부당함 앞에서 그냥 조용히 있는 게 더 편하다고 느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근데 디에고가 재갈이라고 불렀던 그 절망, 그 체념이 사실은 억압하는 쪽이 가장 바라는 반응이라는 걸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침묵이 제일 안전해 보이는 순간일수록, 오히려 그게 뭔가 저항해야 할 신호일 수도 있다는 것. 그 판사처럼,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이는 순간이 사실은 가장 위험한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뮈가 이방인과 페스트에서 개인이 부조리를 어떻게 살아내는지를 물었다면, 계엄령은 그 개인이 공포 앞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서야 하는지를 묻는 작품이었다. 결국 이 희곡이 남긴 건 하나의 질문이었다. 침묵하는 쪽이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이유로, 나는 그 침묵을 어디까지 정당화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