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으로 만났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버지니아 울프를 참 좋아했었다. 그때는 잘 몰랐던 이름이라 그냥 흘려들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등대로를 직접 읽어보게 됐다. 그 친구가 왜 그렇게 이 작가를 좋아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소설은 처음 몇 페이지만 읽어도 여느 소설이랑 다르다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한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램지 가족과 손님들의 이야기인데, 줄거리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다. 등대에 가고 싶다는 막내아들 제임스의 소망, 날씨가 좋을지 나쁠지에 대한 대화, 저녁 식탁에서 오가는 잡담들. 겉으로 보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그 안에서는 각 인물들의 의식이 끊임없이 흐르고 부딪히고 되풀이된다. 소위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는 걸 이 소설로 처음 제대로 체감했다. 사건이 아니라 생각과 인상, 순간의 감정이 그대로 문장이 되어 흘러가는데, 처음엔 이게 누구의 생각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헷갈려서 몇 번씩 다시 읽어야 했다. 근데 그렇게 천천히 다시 읽다 보면, 오히려 그 흐름 자체에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1부는 램지 부인을 중심으로 점심부터 저녁까지,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을 다루는데도 굉장히 길고 밀도 있게 그려진다. 램지 부인은 다정하고 온화한 인물로, 사람들 사이의 어긋남과 긴장을 조용히 봉합하려 애쓰는 사람이다. 남편 램지 씨는 지적으로 냉정하고 자기 확신에 차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기 명성이 세월에 묻혀 잊힐까 봐 불안해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부부를 지켜보면서, 사랑이라는 게 꼭 다정한 말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불안까지도 묵묵히 받아주는 방식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2부에 이르러 소설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 몇 페이지 안 되는 짧은 분량 안에서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는데, 그 사이 램지 부인은 세상을 떠나고, 전쟁이 지나가고, 별장은 텅 빈 채로 방치된다. 사람이 아니라 텅 빈 집과 낡아가는 가구, 먼지와 바람이 이 시간의 흐름을 대신 이야기한다. 그렇게 담담하게 서술되는 죽음과 상실이 오히려 더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누군가의 부재를 요란하게 슬퍼하는 대신, 그냥 시간이 그 사람 없이도 계속 흘러간다는 사실 자체로 상실을 보여주는 방식이 인상 깊었다.
3부에서는 남은 사람들이 다시 그 별장으로 돌아와 마침내 등대로 향한다. 화가 릴리는 램지 부인을 떠올리며 오랫동안 완성하지 못했던 그림을 그리는데, 그녀가 붓을 든 채로 램지 부인과의 기억, 그 존재가 남긴 흔적들을 되짚어가는 장면이 뭉클했다. 결국 소설의 마지막, 등대에 도착하는 그 순간과 릴리가 그림을 완성하는 순간이 겹쳐지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그 과정에서 각자가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흘려보냈는지가 더 중요했다는 걸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든 생각은, 삶이라는 게 결국 크고 작은 순간들의 인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였다. 우리는 보통 사건 중심으로 삶을 기억하는데, 실제로 하루하루를 채우는 건 그런 극적인 사건들이 아니라 누군가와 나눈 사소한 대화, 스쳐 지나가는 감정, 별생각 없이 바라본 풍경 같은 것들이다. 등대로는 그런 순간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붙잡아서, 그게 얼마나 크고 무거운 것인지를 보여준다.
엄마가 예전부터 종종 하던 말이 떠올랐다.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는 힘은 별거 아닌 것 같은 의식주와 일상, 그리고 같이 사는 가족들이 밥 한 끼 먹으면서 오늘 음식이 어떤지 공유하고,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나누는 그런 시간들이라고. 그게 쌓이고 쌓여서 삶이 살아지는 거고, 그 힘으로 다음 날 또 직장에 나가고 버틸 수 있는 거라고 하셨다. 그때는 그냥 소소한 위로의 말처럼 들었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엄마가 하려던 말이 정확히 이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램지 부인이 저녁 식탁에서 사람들을 이어주고, 사소한 말 한마디로 분위기를 다독이던 그 장면들이 소설에서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저녁 식사가, 사실은 그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뿌리였던 거다.
나도 하루를 돌아볼 때 이렇다 할 사건이 없었다고 그날을 별거 아닌 날로 치부해버릴 때가 많은데, 이 소설을 읽고 나니 그 사소한 순간들 하나하나가 사실은 내 안에서 계속 쌓이고 흘러가면서 나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삶을 버티게 하는 건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그런 사소한 반복들, 밥 한 끼를 같이 먹고 오늘 하루를 나누는 그 시간들이라는 걸, 엄마의 말과 이 소설이 똑같이 말하고 있었다. 그 친구가 왜 이 작가를 그렇게 좋아했는지,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눈에 띄는 사건 없이도 이렇게 깊은 여운을 남길 수 있다는 걸, 등대로를 읽고서야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