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제1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이곳에 살기 위하여’ 시인만의 자리, 지식인의 위치에서 떠나 이 시대의 모든 고난받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자신의 삶을 확대해온 젊은 시인 정희성의 시집. 그의 언어는 한치의 빈틈도 없으며 날카로운 긴장과 진실로 가득 차 있다. * 제1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석탄은 묻어 있다
추억에 꿈에 어두운 지붕 위에
죽음에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석탄은 묻어 있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몸부림
더 큰 사랑을 꿈꾸는 마음 위에
석탄은 묻어 있다
갔다 오마 하고 언제나처럼
한마디 무뚝뚝한 말을 남긴 채
그이는 가서 돌아오지 않고
몇 푼 안 되는 보상금이 되어
탄광에서 죽어 온 남편의
피 묻은 작업복과
마을의 키 큰 사철나무 잎에도
석탄은 묻어 있다
간다 울지 마라
시래기가 걸린 응달진 벽
마을로 가는 신작로
바람을 맞으며 떠나는 이웃들의
무겁고 정처없는 발길에
뻣뻣한 손바닥에
눈물 어린 눈에
펄럭이는 치마에 바람에
석탄은 묻어 있다
봄이 오면 푸르러질 저 보리밭
보리밭의 흰 눈에도
어린 자식들의 피 섞인 기침에도
뺨에 얼룩진 눈물에도
석탄은 묻어 있다
가마 어디든 못 가랴
저 캄캄한 석탄더미 너머
가도 가도 척박한 이 땅
가다가 쓰러져 석탄이 되더라도
이것들 얼굴에 더 이상은
석탄을 묻힐 수 없다
울지 마라 간다
가다가 쓰러져 석탄이 되더라도
이것들 어린 꿈에 더는
석탄을 묻힐 수 없다
- ‘석탄’,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이제 내 말은
나의 슬픔도 그대의 설움도
잠재우지 않는다
바람이 바람을 잠재우지 않고
슬픔이 슬픔을 잠재우지 않는다
슬픔을 위한 말,
슬픔을 꾸미는 말,
모든 어둠의 下手人인
슬픔에 봉사하는 말,
그대와 나의 가장 깊은 곳에 회오리치던
슬픔의 찌꺼기인 눈물도
나의 것이 아니다 이제 내 말은
슬픔을 알아버렸다
가슴 쥐어뜯는 사랑도
이별도 알아버렸다
내 말은 허공을 떠돌지 않고
내 말은 죽지 꺾인 물새처럼
바다로 가서 혼자 울지 않는다
이제 내 말은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다
- ‘이제 내 말은’, 정희성
누가 나를 부르는가
한밤에 나가 눈을 헤치고
언 땅을 파본다
부드러운 흙 몇 점
호미끝에 묻어나고
원추리 한 뿌리가
달빛에 드러났다
누가 볼까 흙을 덮고
별 몰래 눈을 덮고
속으로만 혼자 기뻐
눈 속에 이마를 묻고 울다가
밤새 봄이 오는 꿈만 꾸다가
잠이 깼다
아내가 슬픈 눈으로 보며
이마에 찬 손을 얹고 있다
- ‘꿈’, 정희성
돌을 던진다
막소주 냄새를 풍기며
김씨가 찾아와 바둑을 두면
산다는 것이 이처럼
나를 노엽게 한다
한 칸을 뛰어봐도
벌려봐도 그렇다
오늘따라 이렇게 판은 넓어
뛰어도 뛰어도
닿을 곳은 없고
어디 일자리가 없느냐고
찾아온 김씨를 붙들고
바둑을 두는 날은
한 집을 가지고 다투다가
말없이 서로가 눈시울만 붉히다가
돌을 던진다
취해서 돌아가는 김씨의
실한 잔등을 보면
괜시리 괜시리 노여워진다
- ‘김씨’, 정희성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 쉬는
空氣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空氣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부른 뒤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自由여
- ‘너를 부르마’, 정희성
실패한 자의 전기를 읽는다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실패를 위해
누군가 부정하겠지만
너는 부정을 위해서 시를 쓴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 시를 쓰고
부질없는 줄 알면서 강이 흐른다
수술을 거부한 너에게
의사는 죽음을 경고했지만
너는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 게 실수겠지만
너는 예언하지 않는다
예언하지 않아도 죽음은 다가오고
예언하지 않아도 강이 흐른다
네 죽음은 하나의 실수에 그치겠지만
밖에는 실패하려고 더 큰 강이 흐른다
- ‘병상에서’, 정희성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 ‘숲’, 정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