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을 묻다

서현 지음 | 효형출판 펴냄

건축을 묻다 (서현의 인문적 건축론, 예술 건축을 의심하고 건축 예술을 의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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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09.7.14

페이지

344쪽

#건축 #공간 #의미

상세 정보

저자의 전작들이 독자에게 건축이라는 ‘장르’에 접근하는 다양한 신작로를 제공했다면, 이 책은 건축의 본질, 건축의 가치를 알고자 하는 사려 깊은 독자에게 인문적 건축론을 제시한다. 저자는 2천년 유럽 교양사를 관통하며, 건축을 둘러싼 역사적·사회적 콘텍스트를 집요하게 추적해 건축·건축가·건축 정신을 담았다.

저자는 건축의 주요 사건, 인물 등 역사 속 여러 건축의 현장을 방문하며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의 틈을 공략하며 건축의 본질에 한 걸음씩 다가선다. 질문은 하나하나 소거되어 나가고, 그가 짜 놓은 질문의 그물망에서 건축은 예술, 쟁이, 용도, 기능, 기술, 공간, 의미, 사회 등의 촘촘한 그물코를 거치며 난도질당하고, 다시 실체를 찾아간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독특한 시각으로 정리한 ‘건축(architecture)’이라는 용어의 어원적 분석으로 통해, 건축의 의미를 갈무리해 본다. “건축의 의미는 역사와 사회를 묻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그 무엇인가가 바로 근원(arche)이다. 근원에 대한 탐구와 성찰의 답을 건축적 방식으로 실행한 결과물은 어떤 형식의 구조체(tecture)다. 이것은 바로 건축의 의미다. 건축가의 사회적 존재 가치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이렇다. 건축가의 사회적 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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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탄생한 종족은 나를 창조자이자 근원으로 축복할 것이고 나로 말미암아 행복하고 탁월한 존재들이 수없이 생겨나리라고 상상했어요. 나는 자식을 낳은 아버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보람을 느낄 테고요.

📃 나의 고통은 피고인의 고통과 비교할 수도 없었어요. 쥐스틴은 결백하다는 사실로 버틸 수 있었지만 나의 가슴은 가책의 송곳니에 갈가리 찢겨 벗어날 길이 없었지요.

📃 이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나는 한쪽 구석에 물러앉아 나를 사로잡은 지독한 고통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절망이라니! 감히 누가 절망을 말하겠습니까? 다음 날이면 삶과 죽음의 무시무시한 경계를 넘어갈 가엾은 희생양도 나만큼 깊고 쓰라린 고뇌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 아! 어째서 인간은 짐승보다 우월한 감성을 지녔을까요? 그래봐야 더욱 얽매이기만 할 뿐인데. 그저 배고픔과 갈증, 욕정만 느낀다면 더 자유로울 텐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마음은 이는 바람에도, 우연히 마주한 말이나 말로 전달되는 풍경에도 속절없이 흔들리지요.

📃 “당신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사람들은 모두 흉측한 것을 증오하지. 살아 있는 존재를 통틀어 누구보다도 추한 내가 얼마나 혐오스러울까! 하지만 나의 창조자인 당신마저 나를 혐오하고 부정하다니. 당신과 나는 한쪽이 죽어야만 풀리는 운명의 끈으로 묶여 있다. 나를 죽이려 하다니. 감히 생명을 갖고 장난을 치나? 당신이 나에게 도리를 지킨다면 나도 당신과 인간들에게 도리를 지키겠다. 나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다시는 인간들을 건드리지 않겠다. 거절한다면 당신의 남은 친구들을 모조리 죽여 그들의 피로 지옥의 나락을 가득 채울 것이다.”

📃 “진정해라! 내 저주받은 머리에 증오를 퍼붓기 전에 내 말을 들으란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고통받는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 셈인가? 삶은 고통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나에겐 소중하니 내 삶을 지킬 것이다. 명심해라. 당신은 나를 당신 자신보다 더 강한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을. 나는 당신보다 몸집이 크고 더 유연한 관절을 가졌어. 하지만 당신과 맞서 싸우지 않겠다. 나는 당신의 피조물이니 당신이 본분을 지킨다면 나의 주인이자 왕인 당신에게 복종하겠다. 아, 프랑켄슈타인. 다른 사람들에게는 도리를 다하면서 나만 짓밟으려 하다니. 누구보다도 나를 공정하게 대해주고 관용과 사랑을 베풀어야 할 사람인데. 내가 당신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지 마. 나는 당신의 아담이 돼야 하지만 타락 천사가 됐지. 당신은 죄 없는 나에게서 기쁨을 빼앗아 갔어. 온 세상이 축복으로 가득한데 오직 나만 지독한 외톨이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인정 많고 선량했지만 비참한 삶이 나를 악마로 바꿔놓았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면 다시 선량하게 살겠다.”

📃 “어떻게 해야 당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이렇게 간절하게 아량과 동정을 애원하는 당신의 피조물에게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않는군. 하지만 사실이야, 프랑켄슈타인. 나는 선량했고 내 영혼은 사랑과 자비로 빛났어. 하지만 처량하게도 지금 나는 혼자다. 나의 창조자인 당신도 나를 이렇게 혐오하는데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인간들은 어떻겠나? 모두가 나를 멸시하고 증오한다. 이 적막한 산지와 음산한 빙하가 내 은신처야. 나는 오랫동안 이곳을 돌아다녔다. 내가 유일하게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얼음 동굴이 나의 집이지. 인간들이 탐내지 않는 유일한 곳이니까. 나에겐 저 황량한 하늘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어떤 인간보다도 나에게 친절하거든. 내 존재를 알게 되는 인간들은 모두 당신처럼 나를 증오하며 죽이려 들겠지. 나를 혐오하는 인간들을 미워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나는 적과 타협하지 않겠다. 내가 비참한 만큼 그들도 고통받아야 해. 하지만 당신이 내 마음을 달래주면 인간들을 마수에서 구할 수 있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분노로 집어삼킬 그 마수의 주인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부디 나를 경멸하지 말고 온정을 베풀어라. 먼저 내 이야기를 들어라. 그러고 나서 나를 버릴지 달랠지 마음대로 판단해도 좋다. 하지만 먼저 들어야 해. 인간의 법에 따르면 아무리 끔찍한 죄인이라도 판결을 받기 전에 변론의 기회를 얻지 않는가? 그러니 먼저 내 말을 들어라, 프랑켄슈타인. 당신은 나를 살인자라고 비난하지만 양심을 가졌다는 당신도 자기 피조물을 파괴하려 하지 않는가. 인간의 영원한 정의라는 게 참 대단하군! 그렇다고 나를 살려달라는 건 아니다. 부디 내 말을 듣고, 그런 다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원한다면 당신 손으로 빚은 나를 파괴해도 좋다.”

📃 깨어보니 주위가 컴컴하더군. 추위를 느끼기도 했고 혼자라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막연히 겁이 났다. 당신의 집을 나서기 전에도 추위를 느끼고 옷을 주워 입었었는데, 밤이슬이 내리자 그것으로는 부족했지. 나는 의지할 데 없이 처량하고 비참한 신세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구분하지 못했지만 사방에서 고통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고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어.

📃 이런 놀라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묘한 감정에 휩싸였지. 인간은 정말 그토록 강인하고 고결하며 숭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악랄하고 야비한 존재인가? 어떤 때는 악마의 법을 따르는가 싶다가도 또 어떤 때는 고결하고 신적인 존재가 되더군. 훌륭하고 고결한 인간이 되는 것은 이성을 지닌 존재에게 가장 고귀한 영광인 반면, 기록에 나온 많은 이들처럼 야비하고 악랄한 인간이 되는 것은 가장 지독한 타락, 눈먼 두더지나 힘없는 버러지보다도 더 미천한 상태로 전락하는 일인 듯 보였어. 인간이 어떻게 같은 인간을 죽일 수 있는지 혹은 법과 국가가 왜 존재하는지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는데, 악행이나 학살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듣고 나니 더는 놀랍지 않더군. 오히려 혐오스럽고 넌더리가 나서 고개를 돌렸지.

📃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지. 당신네 인간들이 가장 우러르는 것은 부를 겸비한 고결하고 순수한 혈통이더군. 둘 중 하나만 가져도 존경받을 수 있어. 하지만 둘 다 갖지 못하면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랑자나 노예 취급을 당하며 선택받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재능을 바치는 운명에 처했지! 그렇다면 나는? 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누가 나를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나는 돈이나 친구뿐 아니라 무엇 하나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 겉모습은 소름 끼치도록 징그럽고 역겨운 데다 인간과 다른 기질을 지녔지. 인간보다 민첩하고, 더 거친 음식으로도 버틸 수 있었어. 지독한 추위와 더위를 별 탈 없이 견디고 덩치도 인간보다 훨씬 더 컸어. 주위에서 나 같은 존재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괴물일까? 지상의 오점일까? 그래서 모든 인간이 피하고 도망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내게 안겨준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무시하려 했지만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더욱 서글퍼졌지. 아, 그냥 처음 머물렀던 숲에서 영원히 살았더라면, 허기와 갈증, 더위 말고는 아무것도 알지도 느끼지도 못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 ‘내가 생명을 얻게 된 날은 얼마나 끔찍한가! 저주받을 창조자! 어째서 스스로도 혐오감에 고개를 돌릴 만큼 끔찍한 괴물을 만들었단 말인가? 신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아름답고 매혹적인 인간을 만들었는데, 나는 인간을 본떴음에도 추악하고 오히려 인간과 비슷해서 더 진저리 나는 형상이 됐지. 사탄에게도 칭송하고 격려해 주는 동료가 있었는데 나는 미움받는 외톨이로 살고 있구나.’

📃 내 슬픔을 달래주거나 내 생각에 공감해 주는 이브는 없었다. 나는 철저히 혼자였어. 아담이 창조주에게 애원한 일이 떠오르더군. 하지만 나의 창조주는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나를 버렸다. 비통한 심정에 빠질 때면 나는 그를 저주했다.

📃 당신을 향한 감정은 증오뿐이었지만 내가 도움을 청할 사람도 당신뿐이었지. 냉혹하고 무정한 창조자! 내게 모든 지각과 열정을 부여해놓고 인간의 경멸과 공포 앞에 나를 내팽개치다니. 하지만 내가 동정과 구원을 요구할 사람도 당신밖에 없으니 인간의 형상을 한 누구도 내게 보여주지 않은 정의를 당신에게서 찾기로 했다.

📃 그것이 내 선행의 대가였다! 위험에 처한 인간을 구해주고는 뼈와 살이 으스러져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지. 조금 전에 품었던 선한 마음이 지독한 분노로 바뀌면서 이가 갈리더군. 통증 때문에 몹시 화가 난 나는 영원히 모든 인간을 증오하고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다 총상의 고통에 짓눌려 맥을 못 추고 정신을 잃었지.

📃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만들던 것을 파괴했지? 감히 약속을 깨려는 건가? 내가 얼마나 고생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당신과 함께 스위스를 떠난 뒤 버드나무 섬들 사이를 지나고 높은 산을 넘기도 하며 몰래 라인강을 따라왔어. 잉글랜드의 히스 벌판과 스코틀랜드의 황무지에서 몇 달을 보내기도 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와 추위, 배고픔을 견뎠는데 감히 내 희망을 짓밟아?”
“꺼져라! 나는 약속을 깨겠다. 너 같은 괴물, 너처럼 끔찍하고 사악한 존재를 다시는 만들지 않겠다.”
“넌 노예야. 좋은 말로 설득하려 했는데 그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었군. 내가 어떤 힘을 지녔는지 잊지 마라. 넌 이미 네가 불행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네가 햇살조차도 진저리 낼 만큼 더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 넌 나의 창조자이지만 난 너의 주인이야. 그러니 복종해!”

📃 나는 그의 희망을 짓밟았지만 그렇다고 나의 욕망을 채운 것도 아니었다. 늘 끝없이 갈망했을 뿐이지.

https://m.blog.naver.com/typeface_/224148393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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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전작들이 독자에게 건축이라는 ‘장르’에 접근하는 다양한 신작로를 제공했다면, 이 책은 건축의 본질, 건축의 가치를 알고자 하는 사려 깊은 독자에게 인문적 건축론을 제시한다. 저자는 2천년 유럽 교양사를 관통하며, 건축을 둘러싼 역사적·사회적 콘텍스트를 집요하게 추적해 건축·건축가·건축 정신을 담았다.

저자는 건축의 주요 사건, 인물 등 역사 속 여러 건축의 현장을 방문하며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의 틈을 공략하며 건축의 본질에 한 걸음씩 다가선다. 질문은 하나하나 소거되어 나가고, 그가 짜 놓은 질문의 그물망에서 건축은 예술, 쟁이, 용도, 기능, 기술, 공간, 의미, 사회 등의 촘촘한 그물코를 거치며 난도질당하고, 다시 실체를 찾아간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독특한 시각으로 정리한 ‘건축(architecture)’이라는 용어의 어원적 분석으로 통해, 건축의 의미를 갈무리해 본다. “건축의 의미는 역사와 사회를 묻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그 무엇인가가 바로 근원(arche)이다. 근원에 대한 탐구와 성찰의 답을 건축적 방식으로 실행한 결과물은 어떤 형식의 구조체(tecture)다. 이것은 바로 건축의 의미다. 건축가의 사회적 존재 가치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이렇다. 건축가의 사회적 실존.”

출판사 책 소개

건축을 둘러싼 역사적·사회적 콘텍스트를 집요하게 추적한
2천년 유럽 교양사를 관통하는 건축·건축가·건축 정신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이후 십 년 만의 역작
서현(徐顯), 이 이름을 기억하는가? 인문, 예술, 과학 등을 두루 읽는 독자라면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이름. 십여 년 전, 건축서 분야의 새 장을 열었던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의 저자다.
건축 책은 으레 서점의 두툼한 공학 책 사이에 꽂혀 있는 게 당연하던 시절, ‘인문적 글쓰기’라는 혁신적 방법을 들고 나타나 한국의 건축서 시장은 그야말로 판이 뒤집어졌다. 건축?건축물의 정체를 깊고도 흥미롭게 읽어내는 감식안을 제공한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이후, 독자들은 건축이라는 새롭고 신선한 독서 영역을 확보했다. 예술과 인문이 녹아든 건축 이야기라는 장르는 서현에 의해 만들어져 오늘에 이른다.
이제 그는 인문적 건축론 《건축을 묻다》를 새로 선보인다. 전작이 독자에게 건축이라는 ‘장르’에 접근하는 다양한 신작로를 제공했다면, 오늘 선보이는 신작은 건축의 본질, 건축의 가치를 알고자 하는 ‘사려 깊은 독자’에게 ‘웅숭깊은 답변’을 제시한다.

10년 동안 준비해 온 물음, “건축은 무엇인가?”
책의 첫 일성은 바로 이거다. “무엇인가?” 그는 책 속에서 거듭 묻는다. “건축은 무엇인가.” 견디기 어렵게 무거운 질문 “무엇인가”를 마주한 그는, 작정하고 그 정체를 벗겨 보인다. 거창하게 질문하고는 형이상학적이고 흐릿한 문장으로 적당히 드러내고 적당히 감추는 이런저런 건축서와는 완벽하게 다르다. 그렇다면 《건축을 묻다》는 어떠한가? 매우 논리적이다. 또한 빈틈이 없다. 자신이 스스로 다독가인 저자는 “건축이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을 앞에 놓고, 치밀하고 논리적인 접근이 아니면 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첫 질문을 던진다. “건축은 예술인가.”
하지만 이 첫 질문은 정곡에서 어긋났음이 드러난다. 그것은 “건축이 예술의 범주에 포함되었는가”라는 과거형의 질문이어야 하고, 이는 예술이 아닌 역사를 통해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이후 역사 속의 건축계 인물, 사건, 건축물 등 용의선상에 있는 많은 것들이 그의 글 속에서 소환 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등 그리스 사상가와 로마 시대의 건축 현장은 물론, 비트루비우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알베르티, 베르니니 등 르네상스 이전과 이후 건축계의 주요 인물뿐 아니라 그로피우스, 르코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등 근·현대의 인물까지 줄줄이 소환 당한다.

하나하나 지워 나가, 건축의 근원에 다가서다
과거 교양이라는 철옹성 외부의 별 볼일 없는 존재에 불과하던 건축‘쟁이’들은 내외부의 노력으로 각종 이론서를 마련하고 나름의 체계를 갖추면서 ‘신분’을 구한 데 이어, ‘아카데미’를 형성해 건축을 학문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학벌’까지 얻었다. 예술과 기술의 경계에서 존재 이유, 존재 가치를 줄타기 하듯 탐측하던 건축은, 공간을 재정의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등 다양하게 관계 맺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본질, 실체를 파악한다.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건축의 의미를 다음의 문장으로 정리한다. “건축은 공간을 통해 인간의 생활을 재조직하는 작업이다.” 이 문장의 자세한 맥락에 대해 저자의 말을 빌려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건축의 존재 이유, 존재 의미, 존재 가치는 인간의 생활을 재조직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건축의 의미고 가치다. 그 조직자가 바로 건축가다. 건축가는 인간의 생활, 인간의 체계를 제안하는 사람이다. 건축이 그려내는 사회는 전복적 사회가 아니고 비판적 사회다. 건축가의 도구는 건축적 공간이다. 건축가의 무기는 비판적 성찰에 근거한 상상력이다. 사회에 대한 분석과 비판에서 시작해서 상상력으로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건축가의 모습이다. 이것이 역사를 통해 건축가가 발견한 자신의 존재 의미다. 몇 세기에 걸쳐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존재이기를 원해 온 이들이 결국 찾아낸 모습의 현재형이다.”
이처럼 건축의 주요 사건, 인물 등 역사 속 여러 건축의 현장을 방문하며 그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의 틈을 공략하며 건축의 본질에 한 걸음씩 다가선다. 질문은 하나하나 소거되어 나가고, 그가 짜 놓은 질문의 그물망에서 건축은 예술, 쟁이, 용도, 기능, 기술, 공간, 의미, 사회 등의 촘촘한 그물코를 거치며 난도질당하고, 다시 실체를 찾아간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독특한 시각으로 정리한 ‘건축(architecture)’이라는 용어의 어원적 분석으로 통해, 건축의 의미를 갈무리해 본다.
“건축의 의미는 역사와 사회를 묻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그 무엇인가가 바로 근원(arche)이다. 근원에 대한 탐구와 성찰의 답을 건축적 방식으로 실행한 결과물은 어떤 형식의 구조체(tecture)다. 이것은 바로 건축의 의미다. 건축가의 사회적 존재 가치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이렇다. 건축가의 사회적 실존.”

건축은 무엇인가? 건축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 책 《건축을 묻다》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인문으로서의 건축의 외연과 내포를 두루 알고자 하는 준비된 독자에게는 그 어떤 글보다도 친절하고 절절하게 다가갈 것이다. 10년 만에 만나는 건축가 서현의 인문적 건축론, 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논리로 무장한 채 건축의 근원적 문제에 몸을 부딪는 《건축을 묻다》. 도대체 건축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이렇다 할 답을 얻은 바 없는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충분한 일단의 답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곧 다시 물음으로 환원되는, 그러나 독자 스스로 그 답에 접근하는 길을 얻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건축을 묻다》는, 서현 식(式) 인문적 건축론의 정수(精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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