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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통장에 삼백만 원 남아 있다면
어떻게 할까 궁리 하다가
그것이 아니라면 통장의 잔고가 일천만 원이면
어떨지 마음 벌렁거리다가
내가 만약 세상을 비워야 한다면 그걸 어떻게 할까
생각한다
노부모가 스치는 김에 잠시
그 이상이면 어떨까 침을 꼴딱 넘긴다
그래봤자 그것으로는
덩그러니 집을 샀겠지
그 집이 비고 그래서 남게 되더라도
허공에게 주지 않을 거라면
그 소유가 당신이면 어떨까 한다
그러다 조금
그러다 멍하니
산수도 못하는 입장에서 가늠한다
나야 죽었어도 죄의 숫자를 불리느라
허둥거리겠지만
당신 만은 그 집에 들어 살면서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는 병에 걸리는 것
생각은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절대다
그것으로 되었다
- ‘어떤 궁리’, 이병률
새 한 마리 그려져 있다
마음 저 안이라서 지울 수 없다
며칠 되었으나 처음부터 오래였다
그런데 그다지
좁은 줄도 모르고 날개를 키우는 새
날려 보낼 방도를 모르니
새 한 마리 지울 길 없다
- ‘새’, 이병률
이 기차는 어디로 향하는
기차입니까, 라고 묻고 싶은데
이 나라 말을 알지를 못합니다
이 기차가
어질어질한 속도로 당신을 데려가
어디에 내려놓을지를 알고 싶은데
물음은 물컹 내 귀에 도로 닿습니다
당신의 시간의 옆모습을 바라봐도 되겠다고
믿고 싶어서
발목은 춥지 않습니다
지도 위에 손가락을 올려 묻고도 싶은 겁니다
우리가 아프게 통과하고 있는 지금은 어디입니까
우리의 막다른 증거는 쟁쟁합니까
안녕, 이라는 이 나라 말만 알아서
그 말이 전부이기도 하여서
멀거니 내 아래에다 인사만 합니다
기차 밖으로 번지는 유난한 어둠이
마음에 닿으려 합니다
큰일입니다
소홀한 마음이 자꾸 닿으려 합니다
- ‘전부’, 이병률
샀는지 얻었는지
남루한 사내가 들고 있던 도시락을
공원 의자 한쪽에 무심히 내려놓고는
가까이 있는 휴지통을 뒤져 신문지를 꺼낸다
신문지를 펴놓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도시락을 엎더니
음식 쏟은 신문지를 잘 접어 보통이에 챙기며 저녁 하늘을 올려다본다
행복을 바라지않겠다는 것일까
빨래를 개고 있는지
옷감을 만지고 있는지
그녀는 옷을 쥐고 재봉틀 앞에 앉아 있다
눈이 내리는 창밖을 보는 것 같았다
만지던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겨 무릎 위에 올려 놓고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바늘로 생손가락을 찌른다
십일월 하늘에다 행복을 꿰매겠다는 것일까
어느 날 길이 나오듯 사랑이 왔다
어떤 사랑이 떠날 때와는 다르게
아무 소리 내지 않고 피가 돌았다
하나 저울은 사랑을 받치지 못했다
무엇이 묶어야 할 것이고 무엇이 풀어야 할 것인지를 모르며 지반이 약해졌다
새 길을 받고도 가지 못하는 사람처럼
사랑을 절벽에다 힘껏 던졌다
공중에 행복을 매달겠다는 것이었을까
-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이병률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그러면 날마다 아침이에요
밥은 더러운 것인가
맛있는 것인가 생각이 흔들릴 때마다
숙박을 가요
내게 파고든 수북한 말 하나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서
모든 계약들을 들여놓고
여관에서 만나요
탑을 돌고 싶을 때도 그만두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내가 껴안지 않으면 당신은 사라지지요
길 건너편 숲조차도 사라지지요
등 맞대고 그물을 당기면서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여관이겠어요
내 당신이 그런 것처럼
모든 세상의 애인은 눈사람
여관 앞에서
목격이라는 말이 서운하게 느껴지는 건 그런 거지요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거짓을 생략하고
이별의 실패를 보러
나흘이면 되겠네요
영원을 압축하기에는
저 연한 달이 독신을 그만두기에는
- ‘눈사람 여관’, 이병률
풀어지게
허공에다 놓아줄까
번지게
물속에다 놓아줄까
- ‘붉고 찬란한 당신을’, 이병률
혹시 밖에는 눈이 왔는가
아, 그랬다면
막막한 배웅이 시작되었겠구나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익숙한 흰 손이 자작나무 같은 흰 손이 얼굴 한쪽을 지나간다
아, 그러나 애쓰는 한 시절의 사람들도 보인다
그 얼굴들 일일이 잊으며 여기까지 오느라 뻐근했다
이 기행의 시간
어쩌면 나는 지구의 허리 쪽 어디에 박힌 채로
골똘히 나는 나를 없애느라 바깥을 모를 터이니
아예 열지를 마라
모두를 덮어야 할지도 모르니
마음에 산맥을 일으켜
기어서라도 그 산을 넘으려 할 것이지만
찾지를 마라
모두를 알아야 할지도 모르니
밖에는 그럴 만한 무게로 눈이 오는가
당신이라면 그 고요를 지킬 수 있겠는가
오던 길은 한 백 년을 대신하는 바람을 받으며 흐를 것이므로
내 몸의 크기대로 선을 긋고
선을 따라 토막을 내야겠다
밖에는 눈이 내려라
간신히 나는 내 마음의 빛을 따르겠다
- ‘비행기의 실종’, 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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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fahr님의 인생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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