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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여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4,이병률 시집)의 표지 이미지

눈사람 여관

이병률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내 통장에 삼백만 원 남아 있다면
어떻게 할까 궁리 하다가

그것이 아니라면 통장의 잔고가 일천만 원이면
어떨지 마음 벌렁거리다가
내가 만약 세상을 비워야 한다면 그걸 어떻게 할까
생각한다
노부모가 스치는 김에 잠시
그 이상이면 어떨까 침을 꼴딱 넘긴다

그래봤자 그것으로는
덩그러니 집을 샀겠지
그 집이 비고 그래서 남게 되더라도
허공에게 주지 않을 거라면

그 소유가 당신이면 어떨까 한다
그러다 조금
그러다 멍하니
산수도 못하는 입장에서 가늠한다

나야 죽었어도 죄의 숫자를 불리느라
허둥거리겠지만
당신 만은 그 집에 들어 살면서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는 병에 걸리는 것

생각은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절대다
그것으로 되었다

- ‘어떤 궁리’, 이병률


새 한 마리 그려져 있다

마음 저 안이라서 지울 수 없다

며칠 되었으나 처음부터 오래였다

그런데 그다지

좁은 줄도 모르고 날개를 키우는 새

날려 보낼 방도를 모르니

새 한 마리 지울 길 없다

- ‘새’, 이병률


이 기차는 어디로 향하는
기차입니까, 라고 묻고 싶은데
이 나라 말을 알지를 못합니다

이 기차가
어질어질한 속도로 당신을 데려가
어디에 내려놓을지를 알고 싶은데
물음은 물컹 내 귀에 도로 닿습니다

당신의 시간의 옆모습을 바라봐도 되겠다고
믿고 싶어서
발목은 춥지 않습니다

지도 위에 손가락을 올려 묻고도 싶은 겁니다
우리가 아프게 통과하고 있는 지금은 어디입니까
우리의 막다른 증거는 쟁쟁합니까

안녕, 이라는 이 나라 말만 알아서
그 말이 전부이기도 하여서
멀거니 내 아래에다 인사만 합니다

기차 밖으로 번지는 유난한 어둠이
마음에 닿으려 합니다
큰일입니다
소홀한 마음이 자꾸 닿으려 합니다

- ‘전부’, 이병률


샀는지 얻었는지
남루한 사내가 들고 있던 도시락을
공원 의자 한쪽에 무심히 내려놓고는
가까이 있는 휴지통을 뒤져 신문지를 꺼낸다
신문지를 펴놓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도시락을 엎더니
음식 쏟은 신문지를 잘 접어 보통이에 챙기며 저녁 하늘을 올려다본다
행복을 바라지않겠다는 것일까

빨래를 개고 있는지
옷감을 만지고 있는지
그녀는 옷을 쥐고 재봉틀 앞에 앉아 있다
눈이 내리는 창밖을 보는 것 같았다
만지던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겨 무릎 위에 올려 놓고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바늘로 생손가락을 찌른다
십일월 하늘에다 행복을 꿰매겠다는 것일까

어느 날 길이 나오듯 사랑이 왔다
어떤 사랑이 떠날 때와는 다르게
아무 소리 내지 않고 피가 돌았다
하나 저울은 사랑을 받치지 못했다
무엇이 묶어야 할 것이고 무엇이 풀어야 할 것인지를 모르며 지반이 약해졌다
새 길을 받고도 가지 못하는 사람처럼
사랑을 절벽에다 힘껏 던졌다
공중에 행복을 매달겠다는 것이었을까

-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이병률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그러면 날마다 아침이에요

​밥은 더러운 것인가
맛있는 것인가 생각이 흔들릴 때마다
숙박을 가요

​내게 파고든 수북한 말 하나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서

​모든 계약들을 들여놓고
여관에서 만나요

​탑을 돌고 싶을 때도 그만두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내가 껴안지 않으면 당신은 사라지지요
길 건너편 숲조차도 사라지지요

​등 맞대고 그물을 당기면서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여관이겠어요

​내 당신이 그런 것처럼
모든 세상의 애인은 눈사람

​여관 앞에서
목격이라는 말이 서운하게 느껴지는 건 그런 거지요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거짓을 생략하고
이별의 실패를 보러

​나흘이면 되겠네요
영원을 압축하기에는
저 연한 달이 독신을 그만두기에는

- ‘눈사람 여관’, 이병률


풀어지게


허공에다 놓아줄까


번지게


물속에다 놓아줄까


- ‘붉고 찬란한 당신을’, 이병률


혹시 밖에는 눈이 왔는가
아, 그랬다면
막막한 배웅이 시작되었겠구나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익숙한 흰 손이 자작나무 같은 흰 손이 얼굴 한쪽을 지나간다
아, 그러나 애쓰는 한 시절의 사람들도 보인다
그 얼굴들 일일이 잊으며 여기까지 오느라 뻐근했다

이 기행의 시간
어쩌면 나는 지구의 허리 쪽 어디에 박힌 채로
골똘히 나는 나를 없애느라 바깥을 모를 터이니

아예 열지를 마라
모두를 덮어야 할지도 모르니

마음에 산맥을 일으켜
기어서라도 그 산을 넘으려 할 것이지만

찾지를 마라
모두를 알아야 할지도 모르니

밖에는 그럴 만한 무게로 눈이 오는가
당신이라면 그 고요를 지킬 수 있겠는가

오던 길은 한 백 년을 대신하는 바람을 받으며 흐를 것이므로
내 몸의 크기대로 선을 긋고
선을 따라 토막을 내야겠다

밖에는 눈이 내려라
간신히 나는 내 마음의 빛을 따르겠다

- ‘비행기의 실종’, 이병률
2021년 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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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1 Corinthians 13


말은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할 수만 있을 뿐 재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느꼈다.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 p. 285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토마스 만 지음
열린책들 펴냄

읽고있어요
2023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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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 이렇게 은밀한 일을 벌이며 살아가는 것일까? 그래서 갑자기 죽어 버리면 그런 비밀이 전부 까발려져 마치 살아있던 것 자체가 커다란 음모였던 양 보이게 되는 걸까. - ‘음모’ - p. 171

인내상자

미야베 미유키 지음
북스피어 펴냄

2023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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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은 단지 말들을 떠돌게 하고 싶었다. 대단한 예술 작품, 베스트셀러, 히트작, 영원불멸의 클래식 따위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어떤 생각, 아이디어, 논평, 꿈, 일상, 작은 이야기, 소소한 논쟁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며 하루하루를 즐겁고 슬프게 스치고 사라졌으면 했다. - p. 71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선 약속과 의무라는 규약 너머의 행동이 필요하다. 이것을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폭력과 파괴, 선택과 충돌이 필연적이라는 생각을 극복할 수 있을까. - p. 115

…스크롤!

정지돈 (지은이) 지음
민음사 펴냄

2023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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