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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듀본의 기도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음사 펴냄

"잘 생각 안 나는데." 나는 쭈뼛거리며 입을 뗐다.
"생각 안 나면 뭐 어때?" 그가 하이 톤으로 말하고는 손뼉을 탁탁 쳤다. "모든 걸 알아야 하는 것과 편히 사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잖아?" 마술의 기법은 몰라도, 마술을 즐기는 데는 아무 문제 없지, 하고도 덧붙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조금 전 여자들이 히비노에게 보인 태도와 지금 그의 태도에는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여자들은 히비노를 우습게 보고 당사자인 히비노는 다리가 불편한 다나카를 우습게 보고...... 세상은 어딜 가나 이런 식으로 서열을 매기게 되어 있는 걸까.

"사는 게 즐겁지 않거나 슬픈 일이 있더라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시작할 수는 없다. 안 그러니? 모두들 한 번 왔다가 가면 그걸로 끝이야. 알겠니?"
할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가족이 죽어도, 죽고 싶을 만큼 슬픈 일이 있어도, 기형의 몸을 갖고 태어났어도, 그래도 그렇더라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그녀는 말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이기 때문이라고.
2021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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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지음
래빗홀 펴냄

읽었어요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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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난다 펴냄

읽었어요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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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 이분이 하시던 빵집 아는데."
매지가 탄식했다.
"깜빠뉴가 맛있는 집이었어. 안에 마른 과일이 콕콕 들어 있는. 다른 직원 없이 혼자 하셔서 힘들 것 같긴 했지만...... 가게를 옮기거나 잠시 쉬려고 닫은 줄 알았어. 돌아가신 줄은 몰랐네."
"회사에 속해 있지 않았던 사람들도 죽는구나. 뭐가 그 사람들을 몰아붙인 거지?"
규진이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생계?"
매지가 약간 쏘아붙이듯이 대답했다.
"회사는 악독하지만, 어떨 때는 갑옷이기도 하잖아. 조직 밖의 사람들은 아무런 보호장비도 없이 혼자 세상이랑 싸운다고."
그건 아마 매지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었다. 매지는 공연을 하기 위해 공연을 준비하는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입시무용학원에서 일해야 했다. 작업과 생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곁에서 보기에도 어려워 보였다. 한번은 발목을 다쳐서 강사 자리를 잃은 적도 있었는데, 후유증이 남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장기적인 문제가 되었더라면 큰일이었을 것이다.

"근데 이렇게까지 다 없앨 필요 있나? 혼자 살아도 필요한 물건이지 않아?"
지원이 물었다. 그 물음에 불안해진 네 사람이 동시에 이재를 쳐다보았다.
"사실은...... 내가 보여줄 게 있어."
이재는 친구들을 지하주차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곤 아주 작은 캠핑 카라반 앞에 섰다. 카라반은 아직 차에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다. 거짓말, 하고 아영이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했다.
"이걸 끌고 어디로 가게?"
"일단 좀 다녀보게."
친구들은 드디어 이재가 이혼의 충격을 드러내는구나 생각했다.
"그냥, 결혼이 부동산으로 유지되는 거라 생각을 했어. 도무지 감당이 안되는 금액의 집을 사고, 같이 갚으면서 유지되었을 뿐인게 아닐까. 그래서 한동안 동산만 가지고 살아보고 싶어서."
성린이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지 않을까?"
경윤이 너무 염려를 담아 말하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야, 여자는 어디서나 위험해. 어떻게 살아도 항상 위험해."
성린이 이재 대신 대답했다.

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창비 펴냄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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