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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아침달 시집 19)의 표지 이미지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

민구 (지은이) 지음
아침달 펴냄

이 시집에서 '여름'은 중요하다. 시집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하고 "여름이 오려면 당신이 필요하"(<여름> 中)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구의 시에서는 일견 시간이 왜곡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을 다음 여름이 오고 / 겨울 다음에도 여름이 왔다"(<우리> 中)

"밤이 저물어 가을이 오고 / 가을 다음에는 또다시 여름이 왔다 // 그리고 여름 다음에는···"(<가을 다음 여름> 中)

​춘하추동(春夏秋冬).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온다. 그러나 민구의 시에서는 가을 다음에 여름이 오고 겨울 다음에도 여름이 온다. '여름-가을-여름-가을-(겨울)-여름'으로 이를 도식화해볼 수 있을까. 화자는 여름에 존재할 때도 여름을 원하고 다른 계절에 존재할 때는 더욱 여름을 원한다. 여름은 그와 함께했던 "당신"으로 인해 불쑥 찾아오지만, 막상 기다렸던 "두 사람"이 오면 훌쩍 지나가 버린다. 화자가 기다리는 사람은 당신(너)인 동시에 당신과 함께했던 화자(나) 그 자신이기도 하다. 여름으로 귀결되는 시간 속에 나와 너와 내가 함께 존재한다. 이러한 시공간의 왜곡이 가능한 것은 화자가 기다리는 모든 것의 시제가 현재진행형이 아닌 과거진행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너로 인해 찾아왔던 여름은 떠나가 버릴 수밖에 없고, 끝없이 기다리는 ‘나’는 수많은 여름이 피고 지는 것만을 목도할 것이다.

+ 살롱드북에서 열린 민구 시인 낭독회에 참가했다. 시인의 사인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본인 시의 한 부분, "처음 만난 당신이 / 나의 시인 (<나의 시인> 中)" 인용하여 "처음 만난 나의 시인 서현승님!"이라고 적어주셨다. 본인 앞에 앉아 있는, 본인의 시를 열심히 읽고 본인을 보러 온 관객들을 시인으로 생각한다고, 그래서 지금 본인 앞에는 일곱 명의 시인이 앉아 있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2021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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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보러 다대포 가는 1호선 안에서 박솔뫼의 「여름의 끝으로」를 읽다가 이런 부분이,

“차미를 안고 등에 코를 묻으면 땅콩 냄새 같은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일정한 소리로 코를 골며 자는 차미의 등에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았다. 잠이 올 것 같은 냄새였다.” (33쪽)

어젠 요가원에 좀 빨리 갔고, 한참 동안 나와 선생님 그리고 고양이 샨티밖에 없었는데, 샨티는 내 요가 매트 위에 올라와, 내게 등을 돌린 채로 앉아 있고, 바즈라아사나로 요가를 준비하려던 나는, 금세 샨티의 집사가 되어, 샨티의 등을 주물주물,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어느덧 서늘해진 바람과 따듯한 샨티의 등을 동시에 만졌다. 여름의 끝이구나.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박솔뫼 지음
스위밍꿀 펴냄

2023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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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부산 가는데 『미래 산책 연습』 진짜 안 챙기려 했거든? 방금 후루룩 훑었는데 도무지 안 들고 갈 수가 없네··· 이를테면 이런 장면,

"된장찌개를 시켰는데 비빔밥을 시킬걸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제 하루가 지났고 남은 휴일은 무얼 하지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하려 했지만 때마침 테이블에 커다란 보리차 주전자가 탕 소리를 내며 놓였고 커다랗고 따뜻한 주전자를 보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고 보리차를 마시자 반찬이 나오고 상추가 나오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틈도 없이 테이블 위에 빠짐없이 차려진 밥을 먹기 시작했다." (47쪽)

나도 정말 제발 진실로 진정 이렇게 여행하고 싶다···
2023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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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문학평론가가 주고받은 열두 편의 서신을 모아 놓은 책. ‘지금-여기’의 책들에 관해 나누는 이야기라 무척 재미있다. 두 분이 함께 읽은 책 중에는 내가 살펴보았거나 읽었던 책이 왕왕 있었고. 김대성, 김봉곤, 김지연, 김혜진, 서이제, 알렉세이 유르착, 유성원, 임솔아, 임현, 장류진, 조지 오웰, 한병철의 작품. 3분의 1 이상은 알고 있어서 어찌나 다행이었는지. 그러나 내가 모르는 작품에 관해 나누는 서간을 읽을 때도 역시 즐거웠다. 온종일 한국문학 이야기 정말로 자신 있는 나로서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 가지고 양껏 수다 떠는 걸 지켜보는 게 못내 좋았다. 문학이 수다를 떨게 만드는 순간은 정말로 좋다!

*

“차이에 대한 기만적인 인정으로 무언가를 봉합해버리려는 편의적인 행태에 대해, 저 역시 선생님과 똑같이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계기를 촉발하지 않는 타자는, 아무리 ' 차이'라는 명분으로 세련되게 포장하더라도 결국 동일성의 반복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선생님과의 대화 혹은 열띤 논쟁이 즐거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합의와 존중의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7쪽)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년에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역시나 서로의 생각이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꼈을 때. 올해도 앞으로도 마음껏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장정일 외 1명 지음
안온북스 펴냄

2023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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