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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동스 1 (나는 행복한 고양이 집사)의 표지 이미지

옹동스 1

스노우캣(권윤주) 지음
예담 펴냄

날 좋을 때는 나도 마당에서 일한다.
그러다 언젠가 한 번 스스로 크게 놀란 적이 있다.
'맙소사, 이런 일상을 가지지 못할 뻔 했어.'
앞으로의 일을 두려워했었다면, 행복을 미래에 두었더라면 우리의 일상은 결코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겠지.
하지만 사람의 때란 어차피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행복은 미래에 있다고 믿는다. 미래 어딘가에.
나중에 뭐뭐 되면 좋을텐데. 어땋게 되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나.
행복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 나옹은 언제나 알고 있었다. 매일 아침의 냄새를 맡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리라.
행복을 미루는 고양이라니 상상할 수도 없다. 고양이는 그 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지금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누린다.
고양이가 원래 알고있던 것을 나는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한 번의 커다란 결심과 용기를 통해서. 소망은 현재에 두는 것이고 최선을 다하는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현재의 행복이 미래의 행복이다.
2021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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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분명히 오늘보다 더 괴로울 것이다. 모레는 내일보다 더 괴롭다. 살면 살수록 괴로움만 더해갈 것이다. 힘들면 도망가도 된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럼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 걸까. 도망갈 곳이 없어서 힘든 거 아닐까?

어른들은 다 안다는 듯 거만하게 허울 좋은 말만 한다.
밝아오지 않는 밤은 없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준다, 힘들면 도망쳐도 된다. 밝고 긍정적인 노래를 부르듯 현실과 동떨어진 말을 의기양양한 얼굴로 한다. 아무것도 몰라서다. 남 일이니까 그러는 것이다. 밝아오지 않는 밤은 있고, 감당할 수 없는 일도 있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갈 곳이 없다. 오래 살았으면서도 그런 것도 모르는 건 자기밖에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마지막에 본 것은

마사키 도시카 지음
모로 펴냄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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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육아는 더럽게 고생스럽고 피눈물 나게 힘든 일이라고 말해주는 이가 여태 없었을까. 분명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한 모종의 엠바고 같은 거겠지. 아니면 육아에 뒤따르는 희생을 모성과 부성으로 승화시키려 하는 사회 분위기상 갖은 고생담은 경험자들끼리만 쉬쉬하며 나누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증거로 내가 출산하자 주위의 육아 선배들이 아련한 눈빛으로 "많이...힘들지?" 하며 지옥 구경이라도 하고 온 듯한 경험담을 들려줬으니까. 그들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마지막에는 꼭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시간은 가더라." 아이의 미소를 보면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진다는 거짓말은 누가 먼저 퍼트렸던가. 내 경험상 미소가 사랑스러운 것과 피로는 별개다. 꽃향기가 아무리 좋아도 그걸 맡았다고 결린 어깨가 풀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스물여섯의 나는 자아를 업무용과 개인용으로 분리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내가 속한 팀에서는 선배가 후배에게 당연하다는 듯 반말을 했고 그 앞뒤로 종종 "야 이 씨..."가 따라붙었다('발'이 마저 붙지 않았던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심지어 팀장은 자신보다 직급은 낮지만 나이는 많았던 차장을 "야! 김XX!"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화를 참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서열이 상대보다 위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사고가 터지면 자기보다 직급 낮고 힘 약한 사람의 잘못으로 돌렸다. 인간에 대한 환멸이라는 것을 철저히 맛보던 나날이었다. 더 심각한 점은 그 안에 있다 보니 나도 여지없이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의 노벨상 수상 여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늘 몹시 아름다웠던 그의 수상 연설문을 못 보는 것 정도일까. 실은 내 청춘의 한 조각(?)이 그런 영예로운 자리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보는 건 괜스레 멋쩍을 듯도 하다(라기에는 이미 다른 문학상을 너무 많이 받았지만!). 하루키는 나에게 작가가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근사한 경험을 안겨줬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그 작가의 저작과 함께 보내게 해준 것. 그리하여 나의 내면과 삶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일으킨 것. 그것만으로도 노벨문학상을 받든 말든 하루키는 나에게 언제까지나 가장 특별한 작가일 터다.

아무튼, 하루키

이지수 지음
제철소 펴냄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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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확신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당연하게도 아니다. 다만 애써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 선택의 믃은 더 이상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대신 '평행 우주, 다중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상상해 본다. 여러 이야기로 접한 얕디 얕은 과학적 상식을 동원해 보면서 말이다. 만약 다른 우주, 다른 시간 속에 또 다른 '상현'이 있다면, 그리고 그 친구가 내가 가지 못한 선택을 하고, 그 길을 걷고 있다면 어떨까.

...중략...

다만 그 '상현'도 매 순간 번민하고, 아쉬워하며, 문득문득 가 보지 못한 길에 대해 후회도 하겠지. 이제 그 후회를 덜어 주는 것은 나의 몫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선택의 결과는 이 우주의 나만 볼 수 있고, 나만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나머지 선택의 결과들은 수많은 우주의 다른 '상현'들이 확인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괜스레 안심된다.
이처럼 거대한 우주들의 움직임을 상상하다 보면, 실은 어떤 선택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우주의 내가, 나의 대부분을 닮아 있다면, 설령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길을 걷고 있든 간에, 지금의 나와 모두 같은 마음으로 걷고 있지 않을까.
'이 우주의 나처럼, 또 다른 나를 상상하며, 서로를 동경하고 애틋해할 거야. 모든 순간의 모든 나, 그리고 모든 이의 선택을 응원하며.'

작은 스케치북

상현 지음
고래인 펴냄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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