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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

전삼혜 (지은이) 지음
문학동네 펴냄

사라진다는 건 슬픈 말이야. 어느 날 꺼져서 다시는 소리 내지 않게 된 낡은 스피커처럼 말이지. 그러니 곧 꺼질 것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세지 않도록 할게. 사실 매일매일 나는 세고 있어. 이곳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 그렇지만 일일이 너에게까지 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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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좋아하던 노래. 좋아하던 영화 대사. 좋아하던 자리에서 보이던 풍경들. 네 사무실 책상에 늘 놓여 있던 페퍼민트 캔디통의 색깔까지. 나는 너에 관해서라면 무엇이든 떠올릴 수 있어.
푸르지 않은 지구를 보며 나는 너를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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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누구보다 너, 최세은을 잘 아는 사람은 부모도 형제도 아닌 바로 나니까 함부로 떠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도 얘기하고 싶었어. 그리고 내가 세상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이유는 세상 누구보다 널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것도 말하지 못했어. 한 마디라도 꺼냈다간 로빈 앞에서 울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런 건 너무 꼴사납잖아. 그리고 아직 너에게 고백도 못 했는데,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로빈 같은 멍청이에게 먼저 말해 줄 수는 없잖아?
사실 많이 고민했어. 사랑이라. 한 번도 누군가에게 온전히 사랑받아 본 적이 없는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정말 사랑일까. 우리 우편함에 면도날을 넣거나 방문 앞에 선물을 놓아두는 아이들의 감정을 질투나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섣불리 부를 수 없다면, 내 감정에도 사랑이 아닌 다른 이름이 붙어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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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배운 적도 없는데 어째서 내 머릿속엔 그렇게나 또렷이 사랑이란 말이 떠올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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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학교에 들어와 너를 좋아하게 되면서 더 이상 고민 같은 건 하지 않기로 했어. 너를 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했어. 신은 달을 만들었고, 인간을 만들었어. 인간은 제네시스를 만들었고, 제네시스는 우리가 만난 학교를 만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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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열일곱. 사랑을 받지 못해 주는 방법도 느리게 배우던 우리에게 첫사랑은 봄바람이라기보단 태풍 같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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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의 통신은 그렇게 종료되었어.
그리고 그게 지구와 나와 연결된 마지막 기록이었지.
다행이야. 내가 마지막으로 지구에서 대화한 사람이 너라서.
지구에서 마지막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준 사람이 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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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소행성이 충돌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쩌면 너는 키보드를 두드렸을 거야. 그리고 아주 희박한 확률로…… 어쩌면, 그래, 어쩌면…… 싱 국장이 아니라…… 나를 생각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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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어디로든 안전한 곳으로 피했겠지. 하지만 너는, 너는 그러지 않았을 것 같아.
우리는 어디로도 달아날 수 없었지. 아무리 고된 훈련을 받아도 울면서 전화를 걸 엄마나 아빠가 없었어. 그래서 나이에 비해 턱없이 높은 성과를 이루어 낼 수 있었지. 우리는 사랑해야 할 상대를 대부분 학교 안에서 찾아냈고 함께 있으려면 떨어지지 않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했으니까. 그게 몸에 배어 버렸잖아. 그러니까 너는 아마 대피소로도, 대기권 밖으로도 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우주기상통제국에 있었을 거야. 내가 돌아올 지구를 지켜 주려고. 용감한 최세은. 복도에서도 교실에서도, 내 앞에서도 울지 않고 늘 침대 안에서만 울었던 열일곱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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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자마자 보육원에 맡겨진 내게 엄마나 아빠라는 단어는 아득한 별처럼 개념으로만 존재했지. 하지만 너는 달랐어. 네 이름은 다른 단어와 달랐어. 모두가 자기 일에 열중하는 이유가 사실은 외로워서인 이곳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면 간신히 찾아낸 이 자리마저 빼앗길까 두려워서인 이곳에서, 푸르지만 그만큼 차가운 별 지구에서 나에게 온기가 되어 준 사람.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한 단어. 그건 너의 이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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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지나치게 강하고 완벽해서 누구도 너의 곁에서 당당해질 수 없었을 거야. 감히 동등한 연인으로 설 생각도 못 했겠지. 네가 때때로 악몽을 꾸고 소리 죽여 운다는 걸, 아침마다 뻗친 머리를 잠재우려 얼굴을 찡그리고 거울을 노려본다는 걸, 책상 서랍 속이 늘 엉망진창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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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원한다면 나는 끝까지 지킬 거야. 너의 초조함, 너의 눈물, 너의 짝사랑을 포함한 모든 비밀. 이제는 비밀을 들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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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완전히 잠들어 버리기 전에 달에 어떤 이야기를 새기려고 해.
너의 이야기.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지구 최고의 교육기관에 들어가 열일곱 살에는 학교 최고의 별이 되었던 앙. 누구에게나 강하고 현명하며 다정했던 아이. 내 이야기 안에서 너는 남에게 뒷모습을 들킬까 두려워하는 달이 아니라 태양이 될 거야.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지구에서 가장 용감했던 공주님으로 기록될 거야. 그걸 다 쓰고 나면 나도 아마 너를 만나러 가겠지. 달도 지구도 아닌 멀고 먼 곳으로.
나의 세계인 너를 만나러 갈 거야.
신은 엿새 동안 세상을 만들고 하루를 쉬었다지. 나는 엿새를 쉰 후에야 겨우 하나의 거짓된 세계를 만들어.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서 나는 너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 거야. 안녕. 지워질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할게. 그리고 이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거야.
너는 나의 세계였으니, 나도 너에게 세계를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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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단 한 번 들은 노래보다도 가족이, 이름이, 나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다만 그 삶이 언제까지나 유지될 줄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외우려는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 개연성이 없이 뒤죽박죽인 풍경은, 잊어버린 시간은 그래서 더 아까웠다.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당연해서 소중한지조차 몰랐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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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한다는 건 뭘까? 좋아하지 않아도 기억할 수 있고 좋아해도 잊어버릴 수 있는데. 좋아한다는 게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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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뒤돌아볼 필요가 없어. 네가 본 대로 너는 전부 기억할 수 있으니까. 앞으로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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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인사는 예전에 끝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리우는 못 견디게 슈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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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캄캄하니까 자신은 갈 수 없다고 슈는 말했다.
땅만 더듬어도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슈는 달에서는 길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진흙땅과 자갈밭과 모래밭을 구별해 가며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주 멀리 돌아오는 길이라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같이 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떠나보낸 미련이 한 바퀴 돌아 다시 리우의 가슴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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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깨우지 않지. 화장실 가고 싶으면 깨우면 될 텐데. 리우가 궁금해하는데 사이 슈가 속삭이듯 말했다.
“다행이야. 내게 남은 빛을 너에게 줄 수 있어서.”
그리고 슈는 다시 자기 침대로 돌아가, 잠들어 버렸다. 리우는 슈가 깰까 봐 슈의 손이 닿았던 이마를 만지지도 못하고 꼬박 밤을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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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고요해지면, 그건 너무 슬프잖아.
이 별에 침묵만이 가득하다면, 슈가 두려워하는 곳이 되어 버린다면, 그건 너무하잖아.
누구라도 살아서 이 별에서 소리를 내 주었으면 좋겠어.
그게 내가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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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 우리의 궤도가 평행선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평행선이 아니라면 하나쯤은 교차점이 있지. 우리는 그 보육원에서 교차점을 이루었고, 시간이 지나 다시 멀어졌다 해도 교차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 교차점이 누군가의 생을 구하기를.
“슈가 한 일이나 마찬가지야.”
리우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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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창하는 우주에 비하면 내가 하는 거짓말은 아주 작은 것. 그러나 이 우주 변두리의 작은 행성 지구가 우리에게는 세계이듯, 이 작은 거짓말이 불러올 타격이 얼마나 치명적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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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겨우 어른이 되었는데 어른들은 이제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한다. 말할 수 없이 넓은 이 우주 안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우리가 바꾸려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고.
이 말을 누군가와 나눴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싶다. 나는 팽창하지 않는 우주를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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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수 없는 사람에게 떠난 사람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무엇이 바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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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지 않은 재앙은 기록되지 않는다. 나는 기록되지 못한 재앙을 머리에 담고 달의 땅을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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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사람들은 자기가 미워해야 하는 대상이 뭔지 모를 때가 많아.
엄마. 누구를 미워해야 할지 몰라서 그 미움을 모두 자신에게 향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았나요. 저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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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물질에 대해 천문학 책은 외로운 물질이라고 설명했다. 빛을 잡아 두지만 관측되지 않는다고. 단지 은하의 중심에서 무언가가 별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끌어들이고 있으니 거기에 암흑물질이 있다고 하는 거라고.
나는 암흑물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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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부모를 잃고 본 테스트 결과가 직전 해보다 월등히 높았어. 네가 단보다 편차가 컸지. 외로움이 성장의 원동력이라면, 우리가 그걸 사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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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행복하길 원했어.”
우리의 행복을 당신들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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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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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도 좋지만, 너 도서관에서 책 빌린 거 반납 안 했잖아. 반납이나 하고 와.”
애인은 내게 책 두 권을 건네주었다.
“그래야겠다. 지구 멸망이 코앞인데 도서관이 붐비지야 않겠지.”
“도서관 가는 길은 붐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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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시간을 되돌려야 할까. 네가 이곳에 있게 하려면. 우리가 다른 아이들처럼 울고 떨며 마지막을 함께 준비하려면. 기숙사 우리 방에서 껴안고 한 번이라도 울 수 있게 하려면. 인간은 불가역적인 존재이므로 배우기 전으로,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세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에게 숨긴 두 가지 중 하나가 태어나지조차 않았더라면. 너와 내가 지구에서 울 수 있었더라면. 너와 내가 함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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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유. 나의 등을 밀어 준 바람. 나의 울음 가득한 밤을 지켜 준 사람. 나의 룸메이트.
“리아의 단독 달 출장을 요구합니다. 기간은 최소 한 달. 최대는 인간이 달에서 버티는 한도까지.”
네가 이 지구에 다시 돌아올 희망으로. 설령 이 지구에 내가 없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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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은은 등을 펴고 화상 카메라를 마주했다. 마지막 사람을 불러야 할 시간이었다. 만약 제가 깨어난다면 반드시, 반드시…… 소식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일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였던 나의 룸메이트에게.
“……그리고 항공기계정비반 유리아에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리아는 지금 달에 있습니다.”
기적처럼 너와 내가 다시 아침 인사를 할 수 있기를. 세은은 메시지를 저장하고 부스 안에서 심호흡을 했다. 부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최후의 최후의 초후까지 싸우기 위해. 지구를, 미래를, 가능성을 빼앗기지 않고 버티기 위해. 뺏기지 말라고, 네가 그랬으니까.
나는 그말을 평생 잊지 않았어.
2021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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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키모들은 고래를 잡는 게 아니라 잡혀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착취당할 바엔 몸을 던지는 게 고래일까, 제 잔해가 세계를 돌며 전시될 줄은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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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입수하는 공포를 극복한 경험을 따라 첫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사랑하는 아기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서로를 구하러 뛰리라는 확신이 떠올라 다음 잠수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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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홀로 남았을 때 누구도 와 주지 않는 세상을 원치 않는다. 그러니 이번도 내가 가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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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거면 왜 태어났는지……. 파도 소리만 그 말을 옮겼다. 지금은 세상이 아득했다. 어깻죽지와 목 뒤로 손을 넣자 해수의 체온이 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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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이유를 찾아야만 했는데, 그러다 보면 서로가 가장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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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장 아픈 부분은 그만큼 날카로워 사랑하는 이도 자주 찔렀다. 사랑하는 이의 기울어진 몸은 너무나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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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 살아온 이 생물이 목소리를 가지면 무엇을 처음으로 말하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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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돌아왔으니까…… 나는 그거면 돼.”
해수가 울면 은하도 울 수 있다. 공명하는 마음만이 은하를 삶으로 이끌었다. 해수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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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럴 수밖에 없는 날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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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들은 신의 환생 같아. 눈동자부터 숨, 지느러미, 몸통, 꼬리 전부 다. 그들이 배 주변을 기웃거리거나 노을을 등지고 수영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사는 부질없이 느껴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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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은하를 제외하고 굴러갔다. 문득 영혼을 햇살에 절여 빨랫줄에 걸고 싶었다. 보송보송한 심정을 덧입어야만 용기가 생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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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꽃도 불행을 알까, 뿌리내리고 살던 터전에서 파인 기분은 어떨까, 의문하며 화분을 돌보는 사이 꽃은 명을 다하고 까만 점을 오도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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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은 어떻게 답을 찾아야 할까. 불행의 계절이 찾아오면 어떤 자세로 지나야 하나. 마음을 돌보는 일은 왜 이렇게나 어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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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본성은 이미 알았다. 우리에겐 개나리꽃 하나에 웃고, 진달래 끝에 맺힌 이슬에 울 수 있는 본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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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너머엔 낙원이 있다고 말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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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지구를 완성하면 데리러 올게. 잊지 않고 널 데리러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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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외계에도 외로운 구석은 있다. 어떤 별은 지구의 푸르름을 천국이라 착각하며 끌려오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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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의 뼈들이 별의 물질처럼 소란스러웠다.
그 착란의 일부를 훔치려는 마음으로, 은하는 차게 식은 해수에게 입 맞췄다. 입술이 닿은 곳은 목과 턱이 만나는 귓불 아래였다. 맥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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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로 귀환하면 더이상 쓸쓸한 별에 그 애를 홀로 두지 않으리라. 낙원을 일구고, 지구 바깥에 아름다운 세상이 있음을 증명하리라. 언젠가 그날이 오면…… 해수도 행복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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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로-세슘의 비행 속에서 은하는 자신이 죽음을 이해한다는 착각에 빠졌다. 일부만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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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마친 별의 격변이 인류의 노선을 이끌었다. 은하는 광대히 울려 퍼지는 별들의 관현악 사이로 날았다. 우주는 생각보다 훨씬 수다스러웠다. 인간이 모르던 시절에도 수많은 합성음을 냈다. 의식에서 잊힌 것들은 우주로 향하여 영원한 선율이 되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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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는 성장하며 바다에 더욱 매료되었고 그때마다 은하는 그 애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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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고칠 게 한두 군데가 아니야. 네가 곁에 있으면 좋겠는데.”
“때로 넌 나를 안타깝게 만들어. 잔인할 만큼.”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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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빨리 낙원을 완성해야 했다. 지구가 종말을 맞아도 우리에게 발 디딜 안식처가 있음을 해수에게 알리고 싶었다. 처절한 밑바닥을 보이지 않는 바다가 있음을, 본대부터 검은 물결에서 빛을 피우는 바다가 있다는 걸 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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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원의 죽음을 예습 삼아 새 장례 문화가 탄생했다. 인체의 성분과 하이드로-세슘, 바다, 그리고 압력이 만나면 고밀도의 거울처럼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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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많은 인간일수록 선명한 거울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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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시체의 부패 과정과 달리 명경 물질로의 전이는 아름다웠다. 은하는 언젠가 거울이 될 자신의 육체와 삶을 생각했다. 제 존재는 죽음 후에도 반사경이 돼 타인들을 비출 예정이었다. 그날이 오면 후회 없는 삶이라 회고하며 감상에 젖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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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을 결정하는 일은 고달팠다. 미결된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방해했다. 삶의 최종 장을 원하는 방식으로 닫는 건 위대한 권한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부족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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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 곁으로 가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자 해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정확히는 하늘을 본 것이겠지만 미래의 나는 과거의 해수와 눈을 마주쳤다고 착각했다. 폐부 깊이 해수가 지났던 시간들을 새기고 싶었다. 그 바람이 일으킨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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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가 곁에 있다면 저 구슬픈 노래의 뜻을 알려 주었을까? 음파가 우주를 흔들 때마다 해수에 대한 그리움이 심해진다.
……그 애에게 푸른 환영을 고백할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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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한 낙원을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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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싶어, 얘기하고 싶어, 천 년이 흐르든 만 년이 흐르든 심장이 구하는 이야기를 마음껏 하고 싶어. 지금,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우리에겐 얼마나 남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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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네 행복을 상상했어. 먼 별의 반짝임이 눈에 들어오면 그때만 사람의 마음이었어. 낙원에서 너만은 행복하길 기도했어. 그곳은 어떤 세계일까, 수많은 별들을 지나 도착한 땅은 아름다울까. 홀로그램으로 뒤덮인 육지가 보일 때 널 생각했어. 시간이 지날수록 너는 선명했어 되풀이하는 습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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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이 빛을 흡수하면 음파가 생겨. 귀를 기울이면 노래가 들리지. 있잖아, 은하야. 나도 전부 고백할게. 너도 솔직하게 말해 줄래?”
“그래.”
“내가 미운 적 많았지?”

“아직도 내가 밉니?”
“사랑해.”
“미워해도 돼.”

“해 줄 이야기가 정말 많아……. 아. 지구도 자살하길 원했다는 말을 했었나?”

-

그 간격으로부터 달이 태어났어.
폐허의 시간, 죽음 직전의 지구 속에서.
그를 닮은 위성이 탄생했어. 햇빛을 수용하며 유려하게 미끄러지더니 우주로 나아갔어. 등대처럼 빛을 띄워 우아한 왈츠를 청하듯 지구를 끌었지. 지구와 달의 첫 무도회를 상상해 봐. 달은 자신의 단면을 한 번에 하나씩만 보여 줄 수 있었어. 울퉁불퉁한 크레이터와 난도질한 자국, 비틀린 분화구들이 드러났어. 오해하기 쉬웠지. 달은 같은 상처를 가진 지구의 반영이었으니까. 그 위로 태양 광선이 기울어 난생 처음 보는 색으로 달이 빛나자 지구는 고백했어.
죽음 속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태어나는구나.
달은 반쪽짜리 얼굴로 미소지었어.
사랑이란 얄궂어. 부서지는 만큼 탄생하니까.

-

사람의 눈물은 왜 바다 성분과 비슷할까? 잘 생각해 봐. 지구의 아이들이 바다에 이끌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

-

“그곳에선 누군가의 생이 막을 내릴 때 아름다운 물질을 찾아냈어.”
“그 얘기를 하는 널 보는 게 좋아.”
“나랑 같이 떠나자.”
고래의 눈동자가 바다와, 하늘과, 은하를 훑었다. 해수는 미소 짓더니 입을 다물었다. 원을 그리며 은하 주변을 헤엄쳤다.

-

해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낙원으로 돌아가자”

-

“귀신고래들의 노래를 전수받고 지구를 일곱 바퀴쯤 돌았을 때야.”
“응.”
“네가 보고 싶었어.”
“그랬구나.”

-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어.
너를 만나기 전, 나의 일부가 바다 속에서 죽었고.
너를 만난 후, 너의 아픔이 내 속에서 죽었고.
너를 보낸 후, 세상의 전부가 죽었으니까.
세 번의 죽음을 넘어
다시 지구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어떤 차원에 있더라도, 이 다음의 시간으로 너를 데려가고 싶었어.”

-

“하지만 우리가 바다를 떠날 수 없다면…….”
해수는 일렁이는 반사경으로 변화하는 바다와 뒤엉킨 영혼들을 응시했다. 그들은 별의 움직임, 햇빛의 일그러짐, 바람의 궤적을 고스란히 지상으로 가져왔다. 하늘이 두 겹의 대칭을 이루며 천체를 반영했다. 구아슈 기법으로 푼 듯한 구름들이 지느러미를 편 고래 형상을 만들었다.
“이곳을 천국으로 만들자.”

불온한 파랑

정이담 지음
황금가지 펴냄

2021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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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고통이 주는 시각적 충격은 익숙해지기에는 너무 벅찬 종류의 것들이었다. 이에 더해 언젠가부터 옥지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또 다른 감정은 진성이 고통받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욕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

“그냥 우리 도망갈까?”
“그러면 게임은 망가질 거고, 데이터들이 폐기될 거야.”
“그렇겠지.”

-

“그렇게 자유로운 시간 동안은 너랑 같이 있을 수 있잖아.”

-

그곳에는 동진과 마찬가지로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프로그래머들이 있었다. 자신이 만든 무언가가 제대로 기능하는 것에 기뻐하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 이유를 살펴 작동할 때까지 수정하는 사람들.
순수하게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

진성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데이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능력 때문에 진성과 함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

“아까 튜토리얼을 막 끝마치고 내 방에 단둘이 있었을 때, 나 무언가 따뜻한 기분을 느꼈어.”
“그 기분이… 뭔데?”
“그건 아직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너를 볼 때마다 그 따뜻한 기분이 계속 느껴져. 너와 함께 있으면 점점 더 분명해지는 느낌이야.”

-

“되도록 빨리 분명해지도록 할게.”

-

“<장군님의 총애>는 완벽한 서사를 가진 작품이에요. 그 서사를 망치는 것은 가당치 않아요. 애초에 옥지가 진성을 사랑한다니. 그게 말이 돼요?”
“가끔은 말이 안 되는 게 사랑 아닙니까….”

-

“언젠가 끝없는 밤이 다가와, 끝없는 잠을 자게 될지도 모르지.”

“그때, 그대와 함께 잠들면 무엇도 두렵지 않을 텐데.”
옥지의 말에 진성이 고개를 들었다.
“나 이 정도만 욕심부려 봐도 괜찮을까?”
진성은 즉답했다.
“당연하지.”

-

“대표님도… 결국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 싶으신 거잖아요.”

-

응원할 수밖에 없는, 저 모니터 안의 두 사람이 가진 사랑이라는 감정의 힘을. 진성이 자신의 피로 바닥에 글씨를 썼을 때, 옥지가 진성을 살리기 위해서 플레이어의 총구 앞에 섰을 때 저 둘이 품었던 감정은 진짜라는 걸. 그리고 그 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도 진심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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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도 무언가를 사랑했고, 꿈을 이루기 위해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달려들었다. 나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도 역시나 자신이 아끼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무식한 일정을 소화하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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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 존재라고 생각했어. 정해진 대로 살았고 그 정해진 길마저 언제나 남을 위한 길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나는 내가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켜 나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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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혜야, 엄마는 언제나 너랑 함께 있을 거야.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고 밤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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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의 눈 속에 어린 깊은 슬픔이 보여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칼리는 받아들일까? 인간을 대신해 내가 사과해도 좋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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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이토록 찬란한지 미처 몰랐던 때였다. 우리는 옛 추억을 이야기하며 함께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앵지가 마지막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나의 로컬 브레인도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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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영. 그 단어가 주는 절망적인 느낌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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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가장 확고했던 사랑의 대상이 어느 순간 대체되었는데 나는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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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귀에서 이명이 시작되어 손바닥으로 귀를 덮었다. 영혼을 복사하기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나에게 있어서 얄궂은 길이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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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더 나쁠 게 있나요?”
“실패의 양상은 언제나 다양하죠. 짧은 기간이나마 프로그램을 운영한 사람으로서 드리고 싶은 조언은… 산 사람을 죽이는 일과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기본적으로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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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희생과 자기 파괴적 투신을 구별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는 죽음의 기회를, 되도록이면 명예로운 죽음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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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통. 그 단어가 좋았다. 서희는 처음으로 자신의 표정에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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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스물두 가지, 대학에 입학할 즈음에는 서른 개가 넘는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모두 훔친 것들이었고 돌려주는 법을 몰라 10년이 되도록 가지고 살았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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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잡이로 표정을 수집하는 건 쓰레기를 주워다 전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체계가 필요했다. 서희는 가로축과 세로축으로 된 그래프를 그렸다. 가로축의 한쪽 끝에는 기쁨, 반대쪽 끝에는 슬픔이 자리했다. 세로축 양쪽 끝에는 분노와 평온이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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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겉으로 고요했고 속으로는 펄펄 끓었다. 사람들은 온화하고 은근한 미소로 중무장 한 서희를 동경했다.

뉴 러브

표국청, 황모과, 안영선, 하승민, 박태훈 (지은이) 지음
안전가옥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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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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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밍망

@tkvl03mtan2q

해가 지면 조용한 술집에 마주 앉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학부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예술학을 공부했던 과정에 대해, 여태까지 작게나마 참여했던 전시와 거기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특히 생각지도 못한 관점으로 전시를 기획해 나를 놀라게 했던 선배 큐레이터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석이는 어릴 때 물인 줄 알고 잘못 먹은 부동액 때문에 위세척을 했던 일에 대해, 고등학교 때 스쿠터를 타다가 교통사고가 난 일에 대해, 군대에서 탱크와 벽 사이에 손이 껴서 손가락뼈가 세 개나 부서진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세 살 무렵 갑자기 생긴 천식에 대해, 부모님이 주말마다 데리고 다녔던 공기 좋은 여행지들에 대해, 뒤늦게나마 태어난 두 동생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석이는 미학과에 가기 전에 조소과를 준비했던 기간에 대해, 큐레이터 일 이외의 다양한 아르바이트에서 겪었던 경험에 대해, 1년 전 독립해서 혼자 살기 시작한 생활에 대해 이야기 했다.
“신기해.”
석이는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 상관없는 궤적을 그리다가 우리가 이렇게 만나다니.”
나도 속으로 생각했다. 맞아, 이건 신비로운 일이야.
“이상하지? 처음 봤을 때부터 너랑 이야기해 보고 싶었어.”
석이는 턱을 괴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누구한테도 이렇게 내 이야기를 한 적 없어.”
한참 대화에 빠져 있다가 조명이 어두워져서 주위를 둘러보면 가게 안은 텅 비고 석이와 나만 남아 있었다. 석이는 내가 사는 아파트 앞까지 함께 왔다가 다시 컴컴한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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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통증으로 감각한다면 좋아, 네 마음이 놓일 만큼 멀리 떨어질게.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고 뜨겁지 않지만 네가 그걸 상상하고 있잖아? 좋아. 석아, 난 다 좋다고. 위험이 내 발끝에서 시작된 희미한 그림자에도 닿지 못하도록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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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같이 있고 싶어.”
석이가 말했다.
“나도 그래.”
“너랑만 나누고 싶어. 너를 웃게 해 주고 싶어. 왜 너인지 모르겠지만, 왜 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나를 견디고 능가할 용기가 생기는지 정말 모르겠지만, 나도 너에게 그런 사람이면 좋겠어. 지금 나는 너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만으로도 즐겁고도 편안해.”
“나도야. 나도 그래, 석아.”
그러면 석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를 많이 안아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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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잠이 들어도 나는 이른 아침에 눈을 떴고 석이는 나보다 짧으면 한두 시간, 길면 대여섯 시간을 더 잤다. 나는 석이를 깨우지 않고 책을 들춰 보거나 가만히 생각에 잠겨 시간을 보냈다. 잠든 모습을 빤히 구경하다가 살살 만져 보아도 석이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럴 때면 닫힌 눈꺼풀 너머의 세계와 내 세계의 시차는 얼마나 벌어진 걸까 가늠해 보았다. 방은 이미 익숙하고 편안했지만 홀로 깨어나 찬찬히 바라보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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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고,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사람이었는데, 심지어 체온마저 이렇게 다른데 한 물결 속에 섞여 있다는 게 놀라워. 또 우리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거대한 물속으로 함께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로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있겠지. 너이고 나인 이유가.”
석이는 아리송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앞에 펼쳐진 물을 바라봤다. 그대로 오래도록 말이 없다가 불현듯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랑 이곳에 와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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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빠의 하얀 피부가 부러웠어요. 부러워서 울면 오빠가 솓을 뻗어 내 볼을 살살 문질렀어요 ‘자, 봐. 내가 이렇게 만지면 네 얼굴이 하얘져.’ 나도 손을 뻗어 오빠의 뺨과 광대와 눈썹을, 둥글고 차가운 코와 폭이 좁은 턱을 어루만졌어요. ‘어때, 내 얼굴이 까매졌지?’ 하고 오빠가 물으면 나는 끄덕끄덕 그렇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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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가시광선을 보며 살아가지만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빛의 영역이 있단다. 우리는 평생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죽지만 보이지 않는 빛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빛이 우리 곁에 없는 것은 아니야. 때때로 우리 눈은 실수를 해서 아주 희박하게 다른 영역의 빛을 볼 때가 있는데, 그것은 이유 없이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명명할 수 없는 어떤 일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어쩌면 영혼이나 유령을 보는 사람들은 좀 더 넓은 영역의 빛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단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간다고 믿지만 실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와 분리되지 않은 채 순서도 정렬도 없이 동시에 생성되는 거라면? 정신 분열증이나 치매 환자가 제대로 우주를 보는지도 모를 일이지. 파동으로 봤다가 입자로 봤다가, 그 고양이가 죽었다고도 살았다고도 횡설수설하는 게 진실일 수도 있어.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더러운 이중 속마음과 겉치레 몸뚱이를 간파하고 있는지도 몰라. 고정된 관념을 정확히 보는 사람들, 혹은 보려는 것만 보는 정상인들이 사실은 제정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란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은 그것의 전부가 아니야. 절대로 그것을 온전히 볼 수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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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고리를 돌려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잠그는 것을 좋아해요. 문 뒤에 숨어서 아무도 내가 숨은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안도감을 느껴요. 글을 쓰면 그런 기분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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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드디어 운명적 사랑을 만났다고 믿는 눈치였지만 나는 사랑은 대체로 운명적인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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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내가 조금 더 자란 어느 날 문득 이 날을 떠올리게 되리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황이 하는 말을, 말을 하는 황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리라고. 그런 신비로운 순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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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까닭 없이 온 세상이 하얗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끊임없이 달라지고 물러지는 삶 속에서 그것은 감쪽같이 달고 부드럽게 넘어가곤 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다. 어떤 일의 전조나 의미있는 전경이 될 순간을 순진한 얼굴로 지나가는 것은.

밤의 징조와 연인들

우다영 지음
민음사 펴냄

2021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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