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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
전삼혜 (지은이) 지음
문학동네 펴냄
사라진다는 건 슬픈 말이야. 어느 날 꺼져서 다시는 소리 내지 않게 된 낡은 스피커처럼 말이지. 그러니 곧 꺼질 것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세지 않도록 할게. 사실 매일매일 나는 세고 있어. 이곳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 그렇지만 일일이 너에게까지 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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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좋아하던 노래. 좋아하던 영화 대사. 좋아하던 자리에서 보이던 풍경들. 네 사무실 책상에 늘 놓여 있던 페퍼민트 캔디통의 색깔까지. 나는 너에 관해서라면 무엇이든 떠올릴 수 있어.
푸르지 않은 지구를 보며 나는 너를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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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누구보다 너, 최세은을 잘 아는 사람은 부모도 형제도 아닌 바로 나니까 함부로 떠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도 얘기하고 싶었어. 그리고 내가 세상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이유는 세상 누구보다 널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것도 말하지 못했어. 한 마디라도 꺼냈다간 로빈 앞에서 울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런 건 너무 꼴사납잖아. 그리고 아직 너에게 고백도 못 했는데,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로빈 같은 멍청이에게 먼저 말해 줄 수는 없잖아?
사실 많이 고민했어. 사랑이라. 한 번도 누군가에게 온전히 사랑받아 본 적이 없는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정말 사랑일까. 우리 우편함에 면도날을 넣거나 방문 앞에 선물을 놓아두는 아이들의 감정을 질투나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섣불리 부를 수 없다면, 내 감정에도 사랑이 아닌 다른 이름이 붙어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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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배운 적도 없는데 어째서 내 머릿속엔 그렇게나 또렷이 사랑이란 말이 떠올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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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학교에 들어와 너를 좋아하게 되면서 더 이상 고민 같은 건 하지 않기로 했어. 너를 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했어. 신은 달을 만들었고, 인간을 만들었어. 인간은 제네시스를 만들었고, 제네시스는 우리가 만난 학교를 만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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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열일곱. 사랑을 받지 못해 주는 방법도 느리게 배우던 우리에게 첫사랑은 봄바람이라기보단 태풍 같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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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의 통신은 그렇게 종료되었어.
그리고 그게 지구와 나와 연결된 마지막 기록이었지.
다행이야. 내가 마지막으로 지구에서 대화한 사람이 너라서.
지구에서 마지막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준 사람이 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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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소행성이 충돌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쩌면 너는 키보드를 두드렸을 거야. 그리고 아주 희박한 확률로…… 어쩌면, 그래, 어쩌면…… 싱 국장이 아니라…… 나를 생각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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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어디로든 안전한 곳으로 피했겠지. 하지만 너는, 너는 그러지 않았을 것 같아.
우리는 어디로도 달아날 수 없었지. 아무리 고된 훈련을 받아도 울면서 전화를 걸 엄마나 아빠가 없었어. 그래서 나이에 비해 턱없이 높은 성과를 이루어 낼 수 있었지. 우리는 사랑해야 할 상대를 대부분 학교 안에서 찾아냈고 함께 있으려면 떨어지지 않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했으니까. 그게 몸에 배어 버렸잖아. 그러니까 너는 아마 대피소로도, 대기권 밖으로도 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우주기상통제국에 있었을 거야. 내가 돌아올 지구를 지켜 주려고. 용감한 최세은. 복도에서도 교실에서도, 내 앞에서도 울지 않고 늘 침대 안에서만 울었던 열일곱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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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자마자 보육원에 맡겨진 내게 엄마나 아빠라는 단어는 아득한 별처럼 개념으로만 존재했지. 하지만 너는 달랐어. 네 이름은 다른 단어와 달랐어. 모두가 자기 일에 열중하는 이유가 사실은 외로워서인 이곳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면 간신히 찾아낸 이 자리마저 빼앗길까 두려워서인 이곳에서, 푸르지만 그만큼 차가운 별 지구에서 나에게 온기가 되어 준 사람.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한 단어. 그건 너의 이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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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지나치게 강하고 완벽해서 누구도 너의 곁에서 당당해질 수 없었을 거야. 감히 동등한 연인으로 설 생각도 못 했겠지. 네가 때때로 악몽을 꾸고 소리 죽여 운다는 걸, 아침마다 뻗친 머리를 잠재우려 얼굴을 찡그리고 거울을 노려본다는 걸, 책상 서랍 속이 늘 엉망진창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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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원한다면 나는 끝까지 지킬 거야. 너의 초조함, 너의 눈물, 너의 짝사랑을 포함한 모든 비밀. 이제는 비밀을 들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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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완전히 잠들어 버리기 전에 달에 어떤 이야기를 새기려고 해.
너의 이야기.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지구 최고의 교육기관에 들어가 열일곱 살에는 학교 최고의 별이 되었던 앙. 누구에게나 강하고 현명하며 다정했던 아이. 내 이야기 안에서 너는 남에게 뒷모습을 들킬까 두려워하는 달이 아니라 태양이 될 거야.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지구에서 가장 용감했던 공주님으로 기록될 거야. 그걸 다 쓰고 나면 나도 아마 너를 만나러 가겠지. 달도 지구도 아닌 멀고 먼 곳으로.
나의 세계인 너를 만나러 갈 거야.
신은 엿새 동안 세상을 만들고 하루를 쉬었다지. 나는 엿새를 쉰 후에야 겨우 하나의 거짓된 세계를 만들어.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서 나는 너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 거야. 안녕. 지워질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할게. 그리고 이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거야.
너는 나의 세계였으니, 나도 너에게 세계를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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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단 한 번 들은 노래보다도 가족이, 이름이, 나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다만 그 삶이 언제까지나 유지될 줄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외우려는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 개연성이 없이 뒤죽박죽인 풍경은, 잊어버린 시간은 그래서 더 아까웠다.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당연해서 소중한지조차 몰랐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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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한다는 건 뭘까? 좋아하지 않아도 기억할 수 있고 좋아해도 잊어버릴 수 있는데. 좋아한다는 게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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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뒤돌아볼 필요가 없어. 네가 본 대로 너는 전부 기억할 수 있으니까. 앞으로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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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인사는 예전에 끝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리우는 못 견디게 슈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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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캄캄하니까 자신은 갈 수 없다고 슈는 말했다.
땅만 더듬어도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슈는 달에서는 길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진흙땅과 자갈밭과 모래밭을 구별해 가며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주 멀리 돌아오는 길이라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같이 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떠나보낸 미련이 한 바퀴 돌아 다시 리우의 가슴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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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깨우지 않지. 화장실 가고 싶으면 깨우면 될 텐데. 리우가 궁금해하는데 사이 슈가 속삭이듯 말했다.
“다행이야. 내게 남은 빛을 너에게 줄 수 있어서.”
그리고 슈는 다시 자기 침대로 돌아가, 잠들어 버렸다. 리우는 슈가 깰까 봐 슈의 손이 닿았던 이마를 만지지도 못하고 꼬박 밤을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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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고요해지면, 그건 너무 슬프잖아.
이 별에 침묵만이 가득하다면, 슈가 두려워하는 곳이 되어 버린다면, 그건 너무하잖아.
누구라도 살아서 이 별에서 소리를 내 주었으면 좋겠어.
그게 내가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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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 우리의 궤도가 평행선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평행선이 아니라면 하나쯤은 교차점이 있지. 우리는 그 보육원에서 교차점을 이루었고, 시간이 지나 다시 멀어졌다 해도 교차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 교차점이 누군가의 생을 구하기를.
“슈가 한 일이나 마찬가지야.”
리우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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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창하는 우주에 비하면 내가 하는 거짓말은 아주 작은 것. 그러나 이 우주 변두리의 작은 행성 지구가 우리에게는 세계이듯, 이 작은 거짓말이 불러올 타격이 얼마나 치명적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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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겨우 어른이 되었는데 어른들은 이제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한다. 말할 수 없이 넓은 이 우주 안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우리가 바꾸려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고.
이 말을 누군가와 나눴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싶다. 나는 팽창하지 않는 우주를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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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수 없는 사람에게 떠난 사람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무엇이 바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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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지 않은 재앙은 기록되지 않는다. 나는 기록되지 못한 재앙을 머리에 담고 달의 땅을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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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사람들은 자기가 미워해야 하는 대상이 뭔지 모를 때가 많아.
엄마. 누구를 미워해야 할지 몰라서 그 미움을 모두 자신에게 향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았나요. 저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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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물질에 대해 천문학 책은 외로운 물질이라고 설명했다. 빛을 잡아 두지만 관측되지 않는다고. 단지 은하의 중심에서 무언가가 별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끌어들이고 있으니 거기에 암흑물질이 있다고 하는 거라고.
나는 암흑물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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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부모를 잃고 본 테스트 결과가 직전 해보다 월등히 높았어. 네가 단보다 편차가 컸지. 외로움이 성장의 원동력이라면, 우리가 그걸 사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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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행복하길 원했어.”
우리의 행복을 당신들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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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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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도 좋지만, 너 도서관에서 책 빌린 거 반납 안 했잖아. 반납이나 하고 와.”
애인은 내게 책 두 권을 건네주었다.
“그래야겠다. 지구 멸망이 코앞인데 도서관이 붐비지야 않겠지.”
“도서관 가는 길은 붐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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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시간을 되돌려야 할까. 네가 이곳에 있게 하려면. 우리가 다른 아이들처럼 울고 떨며 마지막을 함께 준비하려면. 기숙사 우리 방에서 껴안고 한 번이라도 울 수 있게 하려면. 인간은 불가역적인 존재이므로 배우기 전으로,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세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에게 숨긴 두 가지 중 하나가 태어나지조차 않았더라면. 너와 내가 지구에서 울 수 있었더라면. 너와 내가 함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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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유. 나의 등을 밀어 준 바람. 나의 울음 가득한 밤을 지켜 준 사람. 나의 룸메이트.
“리아의 단독 달 출장을 요구합니다. 기간은 최소 한 달. 최대는 인간이 달에서 버티는 한도까지.”
네가 이 지구에 다시 돌아올 희망으로. 설령 이 지구에 내가 없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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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은은 등을 펴고 화상 카메라를 마주했다. 마지막 사람을 불러야 할 시간이었다. 만약 제가 깨어난다면 반드시, 반드시…… 소식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일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였던 나의 룸메이트에게.
“……그리고 항공기계정비반 유리아에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리아는 지금 달에 있습니다.”
기적처럼 너와 내가 다시 아침 인사를 할 수 있기를. 세은은 메시지를 저장하고 부스 안에서 심호흡을 했다. 부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최후의 최후의 초후까지 싸우기 위해. 지구를, 미래를, 가능성을 빼앗기지 않고 버티기 위해. 뺏기지 말라고, 네가 그랬으니까.
나는 그말을 평생 잊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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