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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오은 시집,문학동네시인선 38)의 표지 이미지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오은 지음
문학동네 펴냄

거울이 깨진다

​혼자여서, 나는 참을 수 없다
혼자가 아니라서
나는 참을 수 없다

​이 현장을 산산이 부숴야겠어
이 순간을 샅샅이 뒤져야겠어

​원소가 집합을 뚫고 나간다

​나는 백지장 위에
까만 성을 쌓기 시작한다
너무 낮아 무너질 염려가 없는
너무 얇아 흐너질 걱정이 없는

​창조는 또다른 창조를 낳지
말을 하면 할수록 할말이 더 많아져

​여집합이 전체집합을 뚫고 나간다

​까만 성 밖에는 네가 있다
현장에서 이탈한
순간에서 비껴간

​나는 너와 커피를 마시고
너는 나와 눈빛을 나누고
나는 너 몰래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고
그사이 너는 머그 속에 위스키를 한 방울 떨어뜨리지

​너는 나를 도와주고
나는 너를 도와주는 척을 하고
너는 나에게 도움 받는 상상을 하고
나는 너를 도와주었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서로 사이좋게
기분좋게

​심장이 뛴다
스포츠카를 타고
초콜릿을 나눠 먹으며

​원수를 사랑하라!
원소는 더 사랑하라!

​먼눈과 가는귀가 흠칫 놀란다

​우리가 가까워지려면
우리가 굵어지려면
더 큰 자극이 필요해

​견고한 원소가 되려면
비대한 집합이 되려면
혼자가 되려면
혼자만 아닌 혼자가 되려면

​그러다 참을 수 없으면
현장과 순간을 박차
집합을 찢어버리려면
거울을 깨뜨려버리려면

​어서!
더 많은 환호를
더 많은 갈채를

​너무 많은 말을 내리쏟은 것처럼
그 말을 일일이 다시 주워 담은 것처럼
머리가 아프다

​깨진 거울 속
나의 조각들이 날카롭게 빛나며 외친다
아서!

- ‘도파민’, 오은


과거는 왜 항상 부끄러운가?
미래는 왜 항상 불투명한가?

방문을 열면
얼굴이 화끈
배 속이 발끈

허기를 참지 못하고 또다시
너를, 너희들을 소환한다 오늘

누구나 소유할 수 있지만,
아무나 소유하지 않는

새로운 친구가 왔단다

너희들은 서로 인사를 하지 않는다
지분을 배정받은 공유자처럼
묵묵하고 꿋꿋하다
우정 따위의 지나친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너희들이 더 많아질수록
너희들이 더 다양해질수록
나는 더 작아지고 적어진다

재능이 넘치면 노력이 부족해
시작이 창대하면 끝이 미약해

어떤 경지에 오르려다
어떤 지경에 이를 수도 있지

현재는 왜 항상 불완전한가?

배 속을 다 채우면
나는 예정대로 구역질을 한다
신물나는 완벽함을 향해

빛나가면서 빗나갈 때
뒤쳐지면서 뒤처질 때

놀랍게도
나는 방 안에서 놀라워한다
내 방을 누가 들여다볼까봐
밖에 나가기가 두려워진다

눈을 감아도 네가 보인다
너희들이 빤히 보인다

아, 대체 나는 어디에 발을 들였단 말인가
내 앞에 도래하는
백지상태의 내일 앞에서,
새로운 친구같이 어색하기만 한 나는

- ‘분더캄머’, 오은
2021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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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1 Corinthians 13


말은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할 수만 있을 뿐 재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느꼈다.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 p. 285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토마스 만 지음
열린책들 펴냄

읽고있어요
1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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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 이렇게 은밀한 일을 벌이며 살아가는 것일까? 그래서 갑자기 죽어 버리면 그런 비밀이 전부 까발려져 마치 살아있던 것 자체가 커다란 음모였던 양 보이게 되는 걸까. - ‘음모’ - p. 171

인내상자

미야베 미유키 지음
북스피어 펴냄

1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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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은 단지 말들을 떠돌게 하고 싶었다. 대단한 예술 작품, 베스트셀러, 히트작, 영원불멸의 클래식 따위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어떤 생각, 아이디어, 논평, 꿈, 일상, 작은 이야기, 소소한 논쟁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며 하루하루를 즐겁고 슬프게 스치고 사라졌으면 했다. - p. 71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선 약속과 의무라는 규약 너머의 행동이 필요하다. 이것을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폭력과 파괴, 선택과 충돌이 필연적이라는 생각을 극복할 수 있을까. - p. 115

…스크롤!

정지돈 (지은이) 지음
민음사 펴냄

1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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