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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오은 지음
문학동네 펴냄
거울이 깨진다
혼자여서, 나는 참을 수 없다
혼자가 아니라서
나는 참을 수 없다
이 현장을 산산이 부숴야겠어
이 순간을 샅샅이 뒤져야겠어
원소가 집합을 뚫고 나간다
나는 백지장 위에
까만 성을 쌓기 시작한다
너무 낮아 무너질 염려가 없는
너무 얇아 흐너질 걱정이 없는
창조는 또다른 창조를 낳지
말을 하면 할수록 할말이 더 많아져
여집합이 전체집합을 뚫고 나간다
까만 성 밖에는 네가 있다
현장에서 이탈한
순간에서 비껴간
나는 너와 커피를 마시고
너는 나와 눈빛을 나누고
나는 너 몰래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고
그사이 너는 머그 속에 위스키를 한 방울 떨어뜨리지
너는 나를 도와주고
나는 너를 도와주는 척을 하고
너는 나에게 도움 받는 상상을 하고
나는 너를 도와주었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서로 사이좋게
기분좋게
심장이 뛴다
스포츠카를 타고
초콜릿을 나눠 먹으며
원수를 사랑하라!
원소는 더 사랑하라!
먼눈과 가는귀가 흠칫 놀란다
우리가 가까워지려면
우리가 굵어지려면
더 큰 자극이 필요해
견고한 원소가 되려면
비대한 집합이 되려면
혼자가 되려면
혼자만 아닌 혼자가 되려면
그러다 참을 수 없으면
현장과 순간을 박차
집합을 찢어버리려면
거울을 깨뜨려버리려면
어서!
더 많은 환호를
더 많은 갈채를
너무 많은 말을 내리쏟은 것처럼
그 말을 일일이 다시 주워 담은 것처럼
머리가 아프다
깨진 거울 속
나의 조각들이 날카롭게 빛나며 외친다
아서!
- ‘도파민’, 오은
과거는 왜 항상 부끄러운가?
미래는 왜 항상 불투명한가?
방문을 열면
얼굴이 화끈
배 속이 발끈
허기를 참지 못하고 또다시
너를, 너희들을 소환한다 오늘
누구나 소유할 수 있지만,
아무나 소유하지 않는
새로운 친구가 왔단다
너희들은 서로 인사를 하지 않는다
지분을 배정받은 공유자처럼
묵묵하고 꿋꿋하다
우정 따위의 지나친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너희들이 더 많아질수록
너희들이 더 다양해질수록
나는 더 작아지고 적어진다
재능이 넘치면 노력이 부족해
시작이 창대하면 끝이 미약해
어떤 경지에 오르려다
어떤 지경에 이를 수도 있지
현재는 왜 항상 불완전한가?
배 속을 다 채우면
나는 예정대로 구역질을 한다
신물나는 완벽함을 향해
빛나가면서 빗나갈 때
뒤쳐지면서 뒤처질 때
놀랍게도
나는 방 안에서 놀라워한다
내 방을 누가 들여다볼까봐
밖에 나가기가 두려워진다
눈을 감아도 네가 보인다
너희들이 빤히 보인다
아, 대체 나는 어디에 발을 들였단 말인가
내 앞에 도래하는
백지상태의 내일 앞에서,
새로운 친구같이 어색하기만 한 나는
- ‘분더캄머’, 오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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