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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우주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지은이), 심채경 (옮긴이) 지음
프시케의숲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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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당신을 사색에 잠기게 하거나 한없이 작아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부연 분홍빛이 이곳에 다시 나타나도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주변의 풍경과 사람들 위로 내려앉는 첫 새벽의 햇빛은 미약해서 여전히 지구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열과 대결할 힘이 없다. 그래서 기온은 계속 떨어진다. 당신이 있는 곳의 위치, 구름의 양, 습도, 기타 등등의 많은 요소에 따라 언제까지 기온이 계속 떨어질지가 달라진다. 열대 우림에서는 몇 분에 불과하지만 극지방에서는 이런 냉각이 며칠이나 지속되기도 한다.
그래도 조금 더 기다리면 태양은 천천히 우리를 비추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에는 눈부시게 빛난다. 열역학적 평형에 도달하면 땅이 곧 데워지고 당신 주변의 식물들도 손가락을 쭉 편다.
그러면 당신의 손도 더 이상 차갑지 않을 테지.

겉으로 보기에는 지구처럼 작은 천체가 태양처럼 가만히 있는 무거운 천체 주위를 도는 것 같지만, 실은 모든 천체가 서로의 질량 중심 주위를 각자 돈다. 질량 중심의 위치는 가장 큰 천체의 중심에서 아주 가까워서 정적으로 보일 뿐, 행성들의 궤도에 따라 조금씩 움직인다. 태양계 안에 있는 아주 작은 티끌 하나까지도 모두 이 질량 중심에 기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태양이 태양계 전체의 중심에 있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양계 전체 무게의 99.87퍼센트를 차지고 있는 태양이 이 중력 게임의 승자이기 때문이다.
태양계 천체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움직이는지 잘 (혹은 대충이라도) 알기 전까지는 그들의 움직임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번 알고 나면 떨쳐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겸손한 이웃들은 모두 각자 그 긴 낮과 감춰진 밤 동안 느릿느릿하고 희미한 왈츠를 추고 있다. 멈추어서 숨을 고르거나 박수를 청하지도 않고, 그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은하는 은하군이나 은하단의 단위로 서로 뭉치는 경향이 있다. 그보다 더 크고 빽빽한 집단은 ‘초은하단’이라고 부른다. 알고 보니 우리는 어떤 초은하단 안에 살고 있었다. 천문학자들을 그 영역의 지도를 만들고 하와이어로 ‘헤아릴 수 없는 천국’이라는 뜻의 라니아케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말이 당신의 마음에 빛이 들게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그럴 수 있을까.

1967년, 다행스럽게도 (혹은 당신이 어떻게 보고자 하느냐에 따라 다행스럽지 않게도) 원자시계가 인류 역사상 가장 정확한 기준시계가 되었다. 그 이후 국제도량형국은 1초를 세슘-133원자의 두 에너지 준위 사이의 천이에 해당하는 복사선이 갖는 주기가 9,192,631,770회 반복되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정의했다. 그런 시계는 수십억 년 동안 1초의 오차도 생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원자시계를 천문학적 시간과 맞추기 위해서는 협정세계시에 윤초를 사용해야 하며, 10년에 8분 정도는 1분이 60초가 아니라 61초다.
여기서는 말도 안 되는 것이 저기서는 말이 되기도 한다.

별들과 다를 바 없이 언제나 달은 거기에 있다. 낮 동안에는 하늘이 너무 밝아서 별이 보이지 않지만, 달은 가끔 낮에도 밤보다 더 밝게 보인다. 이 우주라는 세상을 함께 알아나가고 함께 춤을 출, 조금씩 우리의 낮을 길게 늘여주고 우리를 느긋하게 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믿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산은 추하고 불길한 예감을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18세기 말 낭만주의 작가들이 득세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산의 존재에 경탄하거나 산 정상에 대한 생각에 완전히 도취되거나 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상에서 우리라는 혼란스러운 존재로 인한 결과가 얼마나 멀리까지 미치며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놀라워한다. 지구 온난화와 평균 온도 상승으로 인해 산의 빙하가 녹고 지구의 자전에도 영향을 준다. 예전에는 얼음층에 속해 있었던 물의 무게가 고위도에서 저위도로 재분배되면서 지구 자전축에 대한 지구의 움직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 붙잡았다가 내려놓았다가도 다시 붙들어야 하는 일이다. 눈을 감고 손을 주머니에 넣어도 비틀거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과거의 어떤 사건을 기억해낼 때마다 뇌의 네트워크는 기억을 변화시켜서 그 사건에 대한 다음번 회상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고, 심지어는 전혀 기억나지 않기도 한다. 알고 보면 기억이란 전혀 안정적이지도 변함없지도 않다. 게다가 뇌는 현재의 정보를 이용하고 주변 환경, 시간, 분위기와 같은 요소를 조합해 그 기억을 계속해서 고쳐 쓰고 있다. 그런 아주 작은 교정이 조금씩이라도 계속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점점 잘못 기억하게 된다. 이런 연구를 처음 진행했던 이들 중 한 사람은 기억의 불완전한 경향성을 아주 간단히 한 마디로 정리했다. “어떤 사건에 대한 당신의 기억은 갈수록 부정확해지고, 다시 꺼내볼 때마다 완전히 날조에 이르는 지경이 되기도 한다.” 슬프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회상은 때때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허구가 되고, 처음에 기억을 전해준 그 책보다 더 소설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렇게 불완전한 기억도, 그 미묘하게 반복된 일련의 어긋남도 다 이유가 있다. 기억은 끊임없이 과거에 머무르는 대신 최신 버전을 유지함으로써 당신이 지금 이 상황에서 훌륭하고 유용한 결정을 내리도록 도우려 한다. 뇌는 지금 자신이 누구이며 현재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기준으로 계속해서 기억을 걸러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꼭 붙들고 있는 기억, 가장 자주 떠올리는 기억은 자주 회상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처참하게도 가장 부정확한 기억이 되어 간다. 그러니 무언가 기억하고 싶으면 잊어야 한다. 다른 것을 꾹 눌러놓을수록 특정한 기억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게 해도 그 모든 세부적인 내용 대신 왜곡된 디테일의 조합만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기억은 분명하고 생생하며, 매우 잦게는 통째로 잘못되었다.
2022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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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저승사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온다고 한다
그리워하던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리워하던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다고.
꽃 몽우리가 막 돋아나기 시작한, 그런 계절의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 길게 드리운 벚나무 가지 아래.
그곳에 네가 있었다.
“….김나무…..?”
“너, 여전히 발음이 엉망이네. 내 이름 그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러면서 웃는데, 그 모양이 거짓말처럼 뚜렷해서 손을 뻗으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걸까 생각했다. 네가 내 앞에 있을 리가 없다. 이다지도 생생히, 질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선명히 내 눈앞에 있을 리 없다.
왜냐면 너는, 너는 이미 오래전에…..
“두 번이야.”
“뭐……?”
“앞으로 두 전. 두 번만 더 불러. 그럼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어.”
나로 인해 죽었으니까.
“불러. 내 이름.”
내가 죽기 일주일 전, 네가 내게 돌아왔다.

내가 죽기 일주일 전

서은채 지음
황금가지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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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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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규 선배는 좀 차가워요.”
“방송만 끝나면 휙 가버리시더라고요.”
하지만 주방장이 요리를 내기 전에 맛있는 음식을 다 먹어버리면, 손님들은 무슨 맛을 기대할 수 있을까? 방송도 요리와 같다. 주방장이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재료가 신선해야 하고, 특히 첫 맛이 중요하다. 대기실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미리 얘기해버리면, 정작 카메라 앞에서 내어갈 수 있는 건 한 김 식은 반찬들뿐이다.
몇 차례 오해와 해명을 거치고 나니 사람들도 나를 이해해주기 시작했다. 내 침묵은 내가 무례해서도 아니고 다른 출연진을 무시해서도 아니다.
공연 전에 악기를 조율하는 것처럼, 용 그림에 마지막으로 눈을 그려 넣기 전에 잠시 붓을 멈추는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지 마라.
윤식과 형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70퍼센트만큼만 하고 30퍼센트는 내일을 위해 남겨두라고. 다들 오늘만 사는 것처럼 매순간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지만, 한 번에 아이디어를 100퍼센트 쏟아붓지 말고 30퍼센트는 아껴뒀다가 다름에 써야 한다. 매번 가진 것을 전부 소진해버리면 오래 가기 어렵다. 그래도, 남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소리를 탱자탱자 게으름뱅이가 되라는 것으로 착각하면 큰일난다.
지금 무언가에 100퍼센트를 쏟고 있는가? 잠시 멈춰보라. 70퍼센트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나머지 3-퍼센트를 비축해둬야 번아웃을 피할 수 있다. 잘 모르는 것은 만약을 위해 아껴두는 것, 그것이 사회인의 지혜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출발하는 선택은 없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마치 공기처럼 보이지 않게 우리를 어떠한 방향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내게는 그것이 극장이었다. 어디를 가든 매일 지나치던 극장들, 영화 속 주인공들,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무한한 세계들.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연극영화과로, 영화로 이끌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극장 삼거리에서 자라났다. 누군가에게는 도서관이, 누군가에게는 바닷가가, 누군가에게는 기차역이 있었을 테다.
어머니가 극장 의자에서 잠든 소년을 찾으러 왔을 때, 그 순간이 내 인생의 예고편이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잠에만 푹 빠져있었다. 여러분의 극장 삼거리는 어디인가? 매일 지나치는 길과 늘 보이는 풍경, 자주 들어 익숙한 소리... 그것들이 당신을 이끄는 곳은 어디인가?

계속되는 낙방에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동기들이 옆구리를 찔러대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개그맨 콘테스트에 나가봤다. 재미로 경험 삼아 해보자 싶었는데, 1981년 MBC 제1회 라디오 개그 콘테스트에서 MBC 공채 개그맨 1기로 덜컥 합격을 해버렸다. 물이 흐르다 막히면 새로운 길을 뚫듯이, 배우의 꿈이 막힌 자리에서 마법처럼 코미디언의 길이 열렸다. 신기한 일이다. 방법은 언제나 있었다.
처음에는 방송국 구석구석을 누비며 잔심부름을 도맡았다. 담배 심부름부터 커피 타기, 도시락 배달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러다가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당시 코미디는 세트장에서 짜여진 대본으로 연기하는 콩트 코미디 위주였는데, 나는 실내보다 야외가 더 좋았다. 정해진 대사보다 즉흥적인 실제 상황이 더 재미있었다. 그때의 야외 촬영 경험이 <건강보감>과 <몰래카메라>, <양심냉장고>, <이경규가 간다>를 가능하게 했다. 신인 때부터 길거리에서 시민들과 가깝게 마주하고 부딪쳤기에 야외에서 시작된 버라이어티 실험들을 소화할 수 있었다.
코미디언으로 살아온 45년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RMeo 연극 오디션에 떨어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설령 요행으로 연극 무대에 올랐더라도 코미디언만큼 나의 재능을 남김없이 보여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떤 실패도 영원한 실패는 아니다. 여러 실패의 문을 닫아봐야 내가 기다려온 문을 만났을 때 그 안을 과감하게 발을 내디딜 수 있다.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즐기는 사람은 그저 즐길 뿐이다. 진짜 강한 사람은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다. 70퍼센트만 보여주면서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다. 100퍼센트로 초반부터 퍼부어서 금방 지쳐 나가떨어지는 것보다 꾸준히 오래가는 것이 더 현명하다.
전쟁터를 생각해보라.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구십 대의 6.25 참전용사만이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장군이든 병사든 살아남아야 한다.
조용필 선배를 보라. 일흔이 넘어서도 여전히 앨범을 내고 무대에서 노래하고 있다. 20집이 넘도록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무대를 갖고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술자리도 마찬가지다.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그날 밤의 진실을 기억한다.
진정한 승리는 속도가 아니라 지속하는 힘에서 나온다. 코앞의 이익에 목숨을 걸지 말자. 살아남은 사람, 마지막까지 남아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 그가 진정한 승자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내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다.

<2022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오랫동안 지켜본 바로는, 대부분의 선배님들이 이 상을 받고 방송계를 떠났다. 그러니까 이건 ‘이제 떠나라’는 메시지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물러날 내가 아니다.
“많은 분들이 이야기합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 박수 칠 때 왜 떠납니까? 한 사람이라도 박수를 안 칠 때까지, 그때까지 활동하겠습니다.”
회사에는 ‘명예퇴직’이 있다. 하지만 퇴직에 무슨 명예가 있나? 그냥 ‘퇴직’일 뿐이다. ‘명예’라는 말을 붙여서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보려는 건가?
프로그램 마지막 회를 녹화할 때면 PD나 작가들이 ‘유종의 미를 거두자’고 한다. 그때마다 나는 말한다. “유종의 미가 어디 있어? 그냥 유종이지. 끝나는데 뭐가 아름다워? 이미 끝난 건데, 쫓겨나는 건데, 미는 없어.”
왜 끝을 아름답게 포장하려고 할까? 해피엔딩, 명예퇴직, 유종의 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수식어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면 끝이 오기 전에 끝이라서가 아닌, 진짜 아름다움을 만들어보자.
당신도 나도 언젠가는 끝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를 굳이 아름답게 포장할 필요는 없다. 끝나면 그저 끝인 것. 그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

이경규 지음
쌤앤파커스 펴냄

읽었어요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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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라는 것에서 100퍼센트 멀어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나 역시 비교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조금이나마 건강하게 비교하기 위한 나만의 기준 같은 것을 마련해보게 되었다. 나와 어떤 ‘사람’을 두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상황만을 대치시켜보는 거다. 내가 나의 어떤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쉬울 때가 있었으면, 같은 상황일 때 현명하게 겪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대처하는 방법이 나와 어떻게 달랐는지를 비교해보는 식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내가 욱했는데, 같은 상황에서 누군가는 욱하지 않고 유하게 잘 넘어갔다면 그런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마음 상태가 어때 보이는지, 어떤 말로 대처하는지를 지켜보는 거다. 상황이라는 기준을 정하고 대처하는 태도만을 비교하니 상대방에게서 배울 점을 찾을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나를 잘 지켜가며 살리라 마음먹어도 예기치 못한 상황에 타인으로부터 남과 비교당하면 언제 또 속절없이 흔들릴지 모른다. 남과 비교당하면 언제 또 속절없이 흔들릴지 모른다. 적어도 그때는 타인이 기준 없이 가둬놓은 비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나를 균형 있게 바라보고 싶다.

가끔은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있다. 남 탓하는 걸 유독 경계하는 편이라 그럴 때면 나에게서 아쉬운 점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왜인지 거듭해서 일이 안 풀리면 환경이든 상황이든 다른 것을 탓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 게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들은 것 같다. 내가 무언가 부족해서 잘 안 된 거라 생각하면 버거우니까 다른 요인을 찾아보고 바깥을 탓하는 거다.
반대로 문제가 뭔지를 내 안에서만 찾으려 하다가 자책이 심해져 기울어버리는 것도 위험하다. 타인, 회사, 환경 등을 내가 바꿀 수 없으니 스스로 나아질 점을 찾으려던 게 어느 순간엔 질책처럼 변질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내가 건강하게 ‘내 탓’을 하고 있는지를 돌봐줘야 하는 것 같다. 나도 머리로는 이처럼 균형 있는 ‘내 탓’을 추구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조금이라도 남의 핑계를 덜 대고, 상황 탓을 덜 해보고자 애쓸 수 있었던 데는 연습생 때 춤을 레슨해주셨던 한 선생님의 말씀이 큰 영향을 끼쳤다.
“네가 뭘 바라기 전에 그 사람이 해주고 싶어질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져 있어야 해. 뭘 탓하기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너에게 뭔가 해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도록 노력해봐.”

적당한 사람

이창섭(BTOB)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읽었어요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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