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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의 기억 (안채윤 장편소설)의 표지 이미지

서촌의 기억

안채윤 지음
자화상 펴냄

가구 디자이너 태인은 서울 서촌의 낡은 한옥 한 채를 경매로 구입한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피난에서 돌아오지 못한 주인이 살던 집. 낡은 집을 재건축하던 중에 외양간 밑에 숨겨진 방공호(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땅속에 파 놓은 굴이나 구덩이)를 발견한다. 그 안에는 217통의 편지가 담긴 상자가 있다. 1950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1년의 기록이 담긴 그 편지는 연희대에서 시를 전공하던 구자윤이라는 학생이 안수희에게 보낸 연애편지다. 선뜻 용기내지 못하고 남몰래 뒤에서만 사모한 그 마음을 담은 편지 217통은 수취인인 수희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66년이 지나 태인에게 오게 된다. 태인은 지금이라도 편지를 전해 주기 위해 자윤의 행방을 찾는 여행을 시작한다.

구자윤이 전쟁이 터진 동안 방공호에 숨어 매일 꼬박 쓴 편지에는 수희를 사모하는 감정 뿐만 아니라 그시절 사람들이 전쟁 속 어떻게 살았는지가 세세히 나와 있다. 자윤은 방공호에 숨어 은신하고, 자윤의 친구들 역시 입대를 자처하거나 인민재판을 당하는 등 각자의 선택과 최후를 맞는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시인 등단을 하거나 영화를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청춘들의 삶이 너무나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지난 학기 한국 전쟁을 겪은 419세대들의 소설을 읽고 공부해서 그런지 더더욱 구자윤의 편지를 읽는 내내 슬프고 고통스러웠다.

구자윤이 쓴 편지는 66년이나 후에야 수취인에게 전달된다. 구자윤의 이야기를 보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김정환(류준열)이 하는 대사가 생각이 났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주저 없는 포기와 망설임 없는 걱정들이 타이밍을 만든다.” 그 주저 없는 용기가 부족했던 인물이 딱 자윤이 아닐까 싶다.

자윤의 방공호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작업실을 건설한 태인은 이후 자윤만을 위한 책상과 그의 만년필, 잉크를 다시 방공호가 있던 그 자리에 놔둔다. 그가 언제라도 다시 이 자리에서 편지를 쓸 수 있게. 자윤과 그의 방공호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구자윤은 김은국의 사진 속에서, 정선우의 소설 속에서, 태인의 가구들 속에서, 수희의 마음 속에서, 서촌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2022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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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닥친 대폭우로 인해 빗물이 들어차는 건물에 고립된 두 여성 스포츠인이 생존을 위해 연대하는 이야기 -프로듀서의 말-

두 아마추어 스포츠인의 주 종목이 수영과 달리기라는 것, 서로가 서로의 종목을 잘하지 못하고 두려워한다는 것, 한 사람은 강아지와 애틋한 기억이 있고 한 사람은 강아지와 두려운 기억이 있다는 것. 하나부터 열까지가 전부 다른 두 명의 조합이 너무 너무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그런 둘이 의기투합해 위기를 헤쳐나간다는 것까지도!

전력 질주

강민영 지음
안전가옥 펴냄

10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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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선샤인을 죽였는가” 라는 whodunit으로 볼 수 있지만, 읽어보면 범인은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 자리한 “제도”들과 그 제도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조명한다. 학교 내 계급을 나누고 높은 계급에서 올라가려, 내려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아이들. 학생의 실력보다 가족의 자본이 더 우선이 되어 그 계급을 좌우한다. 나뉘어진 계급을 당연스레 여기며 밑의 계급을 낮추어 보고, 공공연하게 학교폭력도 일어나는 행태가 변질된 무아교에선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일들이 무아교에만 일어나는 일일까? 조금 과장된 형태지만, 이런 일은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옳지 않은 계급주의가 천천히 우리들의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다.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에서 또 하나 중요한 키워드는 “진실“이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보다 더 큰 사건으로, 더 자극적으로 조작된 이야기들로 잊어버린다. 판도라를 상자를 연 여자로만 기억하듯이, 사람들은 누군가가 조작한 형태로 죽은 선샤인을 기억한다. 그들에게 선샤인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껍데기이자, 포장지, 물고뜯을 가십거리일 뿐이다.
이는 결말까지 이어지며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단히 한다. 4년의 시간이 흐른 뒤, 선장은 그 사건의 전말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게 뭐 중요한가”라는 말로 통칭한다. 여기서 한 번 자문해본다. 사과의 속은 무슨 색이었을까.

선샤인의 완벽한 죽음

범유진 (지은이) 지음
안전가옥 펴냄

2023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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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Bad(부족한, 완벽하게 훌륭하지 못한) Feminist라고 칭한 저자의 페미니즘 이슈에 대한 생각을 담은 에세이

저자는 본인이 즐겨 듣는 노래 가사 속 여성혐오적 표현들이나 tv 드라마 속 만연하게 보이는 강간 소재 등 우리 일상 속 퍼져있는 미소지니들을 지적하기도 하고, 학창시절 당한 성폭행이나 다이어트 캠프같은 실제 본인의 경험들을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소설•영화 <헝거게임>의 당찬 주인공 캣니스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비판하기도 한다. 여러 작품들과 사건들을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바라본 글을 읽으며 다르게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운 것 같았다.

후반부에는 흑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러 영화들을 비판했는데, 특히 <헬프>가 가장 의외였다. 보지는 않았지만 유명해서 알고 있었고 좋은 의의를 가진 잘 만든 영화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흑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그 영화는 비판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흑인 인권을 위해 투쟁한 사람은 흑인인데 보통 영화는 백인 주인공이 활약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헤어스프레이>도 마찬가진데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헬프>말고도 책에서 설명된 여러 영화들이 이같은 비판점이 있었고, 동양인인 내가 이때까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점들을 흑인 입장에서 어땠을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팟캐스트나 친구들한테서 좋은 말만 들었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역시 <장고>라는 작품을 흑인 입장에서 고려하며 만들지 않았고, 반대로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라는 작품은 책을 읽으며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록산 게이가 여성혐오적인 가사를 쓰는 에미넴의 노래를 즐겨 듣고, 핑크색을 좋아하고, 출산에 긍정적인 의견이라고 할지언정 그녀는 성폭행 기사에 분노하고, 여러 여성 드라마를 보며 좋은 점과 비판거리를 이야기하고, 여성과 남성이 평등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핑크색을 좋아하고, 외출할 때 화장을 하지 않으면 얼굴을 못 들고, 매일 매일 내 몸을 보며 다이어트 생각을 하지만 한국의 아이돌 산업이 기괴하다고 생각하고, 여러 미디어를 보며 옳지 않은 점을 찾아내려한다.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되려하지 않고 또 완벽하지 않음에 자책하기보단 있는 그대로를 좋아하고 인정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노력하는 자세가 더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나쁜 페미니스트

록산 게이 지음
사이행성 펴냄

2022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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