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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옳은가 (궁극의 질문들, 우리의 방향이 되다)의 표지 이미지

무엇이 옳은가

후안 엔리케스 (지은이), 이경식 (옮긴이) 지음
세계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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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의 모든 문명과 역사 속에서 인간은 일을 망치는 실수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그러나 여전히 윤리적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이 낡은 발상에 사로잡혀 있고, 그 때문에 본질적으로 가장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그 믿음이란 바로 이것이다.
“윤리라는 것은 절대 변하지 않아. 그래서 나는 옳음과 그름을 잘 분별할 줄 알지!”
누군가가 “오늘 오후에 어떤 문제에 대해 윤리 심사를 하자”라 제안해도 우리가 크게 흥분하지 않는 이유가 이러한 확신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타인이 자기 의견과 다른 의견을 내며 우린 그걸 도저히 참아 넘기지 못한다.
윤리를 그저 ‘지루한 것’으로만 여기는 이유는 다들 자기가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사회에서든 구성원 다수가 윤리적이라 여기는 것도 불과 몇 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당대의 관습뿐 아니라 인간관계 매뉴얼을 숙지하고 충실히 따랐을지라도 어느 한 순간에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는 바람에 눈총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일은 언제든 일어난다. 소셜미디어에 무언가 끊임없이 기록하고 게시하는 시대에 살다보니 멍청한 댓글 하나를 자칫 잘못 달았다간 직장을 잃고 경력을 망치며 온 세상 사람에게 신상이 털려 수백만 명으로부터 조롱당할 수 있다. ‘우리 편’에 서 있는 누군가에 대한 모욕 하나하나는 모두 우리에게 가해지는 개인적 모욕이 되고, 또 우리는 그 모욕을 고스란히 돌려주기 위해 같은 편끼리 뭉친다.

신뢰 수준이 낮은 환경에서는 기본적 진실들이 모든 정파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좌파든 우파든 할 것 없이 많은 이는 탈진실의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팩트와 증거, 과학은 사람들이 마음 깊이 갖고 있는 믿음, 그러나 어쩌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는 믿음에 도전장을 내밀지 않을 때에만 살아남는다. 그러다 보니 결국 ‘느낌’을 기반으로 하는 거짓말들이 퍼져나간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지 않은 진실과 사실을 의심하도록 조건화되어 있다. 라디오, 휴대전화, 인공위성, 로켓, 망원경, 직접 비행 그리고 관찰 등을 통한 증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음에도 지구가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은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 이런 황당한 집단들은 수백 년간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해왔지만 트위터와 유튜브 그리고 페이스북이 터보엔진을 달아주는 덕에 이들의 주장은 한결 쉽게, 또 멀리 퍼져 나간다.
이건 정말 이상하다. 기술 덕분에 우리가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또 입증하는 일이 빠르게 이뤄지자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정보에 훨씬 더 빨리 접근할 수 있고 또 교차 확인 능력이 한층 커지면 터무니없는 가짜 지식이나 뉴스는 엄청난 압박을 받을 거야.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오히려 의도적인 허위정보와 거짓말이 우리를 홍수처럼 덮고 있으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점점 더 멀리 떨어져 극단적으로 치닫고 의사소통 역시 파편화되고 있다. 그에 따라 많은 정치인은 커다란 거짓말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짓말의 효용을 발견하게 되었다.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은 누구든 모욕을 당하고 입이 틀어 막히고 괴롭힘과 협박을 받는다. 인터넷의 익명성과 거리감 덕에 우리는 적이라 여겨지는 사람이나 이웃을 향해 직접 만나선 도저히 할 수 없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게 되었다. 공개 담론이 오가는 자리에서는 우호적인 친근함과 공동체주의 그리고 중도주의가 완전히 추방되었다. 개별적인 목소리들이 힘을 얻고 극단적으로 치달음에 따라 사악한 거짓말은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양극화, 정치화, 공포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예전보다 한층 더 종족적으로 바뀌었고 ‘다른 진영’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한층 더 경계하게 되었다. 분노와 공포가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SNS와 인터넷 게시글, 신뢰할 수 없는 ‘뉴스’에 의지한다. 이런 플랫폼의 대부분은 구독료가 아닌 광고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므로, 플랫폼 사용자들의 몰입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수익 역시 늘어난다. 특정 대상을 비난할수록 조회 수와 ‘좋아요’ 수가 계속 증가하기 때문에 굳이 상대에 대한 비난 강도를 낮출 이유는 전혀 없다. 이렇게 해서 이쪽의 비난은 저쪽의 비난을 낳고, 그에 따라 다시 또 이쪽의 비난이 이어진다. 즉, 분노는 트래픽(접속량)을 높이고 수익은 그와 비례하여 늘어난다. 이런 구조 속에서 극좌와 극우는 점점 관대함을 잃고 ‘저쪽 사람들’을 비난하는 내용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믿으려 든다.

지금과 같이 ‘자기중심적 도덕적 판단의 시대’에는 단 한 번의 행동이나 한 통의 이메일 혹은 한 개의 덧글이 평생 일군 성과와 명예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 있다.
당신은 이전 세대보다 잘못된 과거에 발목 잡힐 가능성이 높다. 수 십 년 전에 입었던 옷, 술이 덜 깬 어느 일요일 아침 인터넷에 올렸던 농담 하나, 트윗 하나, 잘못을 저지를 친구를 위한 변호의 말 하나, 이런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당신 앞에 유령처럼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과거에 했던 어떤 행동이나 말이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았고 재미있었으며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해도 그런 의도는 지금 와선 중요하지 않다. 수십 년 전에 했던 어떤 일 혹은 불과 10초 전에 했던 어떤 말로 인해 자신의 사회적 자본이 하루아침에 증발해버릴 수 있는 위험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악하다고’ 여겨지는 사람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난을 받는다면 얼마나 충격적일까? 누군가가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것을 저질렀다고 상상해보자. 그럼 그와 친구사이거나 저녁식사 자리에 함께 했거나 단체사진을 찍었거나 그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이들은 모두 그 사람과 똑같은 종류의 인간일 거라고 사회적으로 여겨진다.
어찌 되었든 이젠 무언가가가 옳은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옳지 않은 것이 흔히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던질 수 있는 핵심적인 질문은 당신이 지금 절대적으로 옳다고, 또 그르다고 알고 있는 것을 과연 ‘예전 그때에는’ 얼마나 깨닫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만일 예전에 당신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누군가가 당신에게 가르쳐준 것이 이제 와서 보니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면 어떨까?

우리는 그토록 많은 이가 그 끔찍한 관행에 동참하고 그것을 보호하며 또 널리 퍼뜨렸던 방식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훗날 후손들이 완전히 비도덕적인 관행이라 비난할 일들을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묵인하고 있다는 걸 모를 것이다.

부끄러움과 비난을 앞세우는 방식은 늘 쉽다. 늘 그래왔듯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은 공포를 통해 윤리에 대한 가르침을 배웠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하지 않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이렇게 해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너를 고문하거나 불에 태우거나 목을 자를 것이다. 오늘날 공포와 처벌을 가차 없이 들이미는 사람은 보수주의자들만이 아니다. 극좌에 속하는 사람들 역시 자기가 내세우는 대의, 자기가 같은 의견이 ‘단 하나의 진실한 길’이라 확신하며 그렇게 한다.

지금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숨길 게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모든 것을 까발려 세상에 보여주고 판정을 받아라. 그러나 스스로를 현대판 테레사 수녀라 여기고 격식과 예절에 맞게 행동하라.
우리가 날마다 하는 생각과 말하고 선언하고 지키고 좋아하고 증오하고 또 믿는 것들, 그 모든 것들은 훗날 미래 세대들이 평가한 뒤 우리에게 욕을 퍼부을 증거 자료로 쓰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이런 노출의 시대를 살고 있다.
당신은 본인이 과거에 말했던 그 모든 것이 지금도 여전히 100퍼센트 옳다고 생각하는가?
설령 옳고 그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변한다 하더라도 말인가?
당신은 삭제가 불가능한 판옵티콘의 엄격한 표준에 따라 평가받길 바라는가?

어떤 사람들이 했거나 하고 있는 행동을 ‘옳다’거나 ‘그리다’고 섣불리 판단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전혀 다른 질문을 스스로에게 먼저 던져보는 건 어떨까?
나는 이 사람들의 반대편에 서서 이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반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기도 하지 않을까? 이 사람은 자기 신념이라는 맥락 속에서 우아하고 알맞게 행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
2022년 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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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저승사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온다고 한다
그리워하던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리워하던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다고.
꽃 몽우리가 막 돋아나기 시작한, 그런 계절의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 길게 드리운 벚나무 가지 아래.
그곳에 네가 있었다.
“….김나무…..?”
“너, 여전히 발음이 엉망이네. 내 이름 그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러면서 웃는데, 그 모양이 거짓말처럼 뚜렷해서 손을 뻗으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걸까 생각했다. 네가 내 앞에 있을 리가 없다. 이다지도 생생히, 질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선명히 내 눈앞에 있을 리 없다.
왜냐면 너는, 너는 이미 오래전에…..
“두 번이야.”
“뭐……?”
“앞으로 두 전. 두 번만 더 불러. 그럼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어.”
나로 인해 죽었으니까.
“불러. 내 이름.”
내가 죽기 일주일 전, 네가 내게 돌아왔다.

내가 죽기 일주일 전

서은채 지음
황금가지 펴냄

읽었어요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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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yuayt

“경규 선배는 좀 차가워요.”
“방송만 끝나면 휙 가버리시더라고요.”
하지만 주방장이 요리를 내기 전에 맛있는 음식을 다 먹어버리면, 손님들은 무슨 맛을 기대할 수 있을까? 방송도 요리와 같다. 주방장이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재료가 신선해야 하고, 특히 첫 맛이 중요하다. 대기실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미리 얘기해버리면, 정작 카메라 앞에서 내어갈 수 있는 건 한 김 식은 반찬들뿐이다.
몇 차례 오해와 해명을 거치고 나니 사람들도 나를 이해해주기 시작했다. 내 침묵은 내가 무례해서도 아니고 다른 출연진을 무시해서도 아니다.
공연 전에 악기를 조율하는 것처럼, 용 그림에 마지막으로 눈을 그려 넣기 전에 잠시 붓을 멈추는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지 마라.
윤식과 형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70퍼센트만큼만 하고 30퍼센트는 내일을 위해 남겨두라고. 다들 오늘만 사는 것처럼 매순간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지만, 한 번에 아이디어를 100퍼센트 쏟아붓지 말고 30퍼센트는 아껴뒀다가 다름에 써야 한다. 매번 가진 것을 전부 소진해버리면 오래 가기 어렵다. 그래도, 남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소리를 탱자탱자 게으름뱅이가 되라는 것으로 착각하면 큰일난다.
지금 무언가에 100퍼센트를 쏟고 있는가? 잠시 멈춰보라. 70퍼센트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나머지 3-퍼센트를 비축해둬야 번아웃을 피할 수 있다. 잘 모르는 것은 만약을 위해 아껴두는 것, 그것이 사회인의 지혜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출발하는 선택은 없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마치 공기처럼 보이지 않게 우리를 어떠한 방향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내게는 그것이 극장이었다. 어디를 가든 매일 지나치던 극장들, 영화 속 주인공들,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무한한 세계들.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연극영화과로, 영화로 이끌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극장 삼거리에서 자라났다. 누군가에게는 도서관이, 누군가에게는 바닷가가, 누군가에게는 기차역이 있었을 테다.
어머니가 극장 의자에서 잠든 소년을 찾으러 왔을 때, 그 순간이 내 인생의 예고편이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잠에만 푹 빠져있었다. 여러분의 극장 삼거리는 어디인가? 매일 지나치는 길과 늘 보이는 풍경, 자주 들어 익숙한 소리... 그것들이 당신을 이끄는 곳은 어디인가?

계속되는 낙방에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동기들이 옆구리를 찔러대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개그맨 콘테스트에 나가봤다. 재미로 경험 삼아 해보자 싶었는데, 1981년 MBC 제1회 라디오 개그 콘테스트에서 MBC 공채 개그맨 1기로 덜컥 합격을 해버렸다. 물이 흐르다 막히면 새로운 길을 뚫듯이, 배우의 꿈이 막힌 자리에서 마법처럼 코미디언의 길이 열렸다. 신기한 일이다. 방법은 언제나 있었다.
처음에는 방송국 구석구석을 누비며 잔심부름을 도맡았다. 담배 심부름부터 커피 타기, 도시락 배달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러다가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당시 코미디는 세트장에서 짜여진 대본으로 연기하는 콩트 코미디 위주였는데, 나는 실내보다 야외가 더 좋았다. 정해진 대사보다 즉흥적인 실제 상황이 더 재미있었다. 그때의 야외 촬영 경험이 <건강보감>과 <몰래카메라>, <양심냉장고>, <이경규가 간다>를 가능하게 했다. 신인 때부터 길거리에서 시민들과 가깝게 마주하고 부딪쳤기에 야외에서 시작된 버라이어티 실험들을 소화할 수 있었다.
코미디언으로 살아온 45년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RMeo 연극 오디션에 떨어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설령 요행으로 연극 무대에 올랐더라도 코미디언만큼 나의 재능을 남김없이 보여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떤 실패도 영원한 실패는 아니다. 여러 실패의 문을 닫아봐야 내가 기다려온 문을 만났을 때 그 안을 과감하게 발을 내디딜 수 있다.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즐기는 사람은 그저 즐길 뿐이다. 진짜 강한 사람은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다. 70퍼센트만 보여주면서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다. 100퍼센트로 초반부터 퍼부어서 금방 지쳐 나가떨어지는 것보다 꾸준히 오래가는 것이 더 현명하다.
전쟁터를 생각해보라.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구십 대의 6.25 참전용사만이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장군이든 병사든 살아남아야 한다.
조용필 선배를 보라. 일흔이 넘어서도 여전히 앨범을 내고 무대에서 노래하고 있다. 20집이 넘도록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무대를 갖고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술자리도 마찬가지다.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그날 밤의 진실을 기억한다.
진정한 승리는 속도가 아니라 지속하는 힘에서 나온다. 코앞의 이익에 목숨을 걸지 말자. 살아남은 사람, 마지막까지 남아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 그가 진정한 승자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내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다.

<2022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오랫동안 지켜본 바로는, 대부분의 선배님들이 이 상을 받고 방송계를 떠났다. 그러니까 이건 ‘이제 떠나라’는 메시지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물러날 내가 아니다.
“많은 분들이 이야기합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 박수 칠 때 왜 떠납니까? 한 사람이라도 박수를 안 칠 때까지, 그때까지 활동하겠습니다.”
회사에는 ‘명예퇴직’이 있다. 하지만 퇴직에 무슨 명예가 있나? 그냥 ‘퇴직’일 뿐이다. ‘명예’라는 말을 붙여서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보려는 건가?
프로그램 마지막 회를 녹화할 때면 PD나 작가들이 ‘유종의 미를 거두자’고 한다. 그때마다 나는 말한다. “유종의 미가 어디 있어? 그냥 유종이지. 끝나는데 뭐가 아름다워? 이미 끝난 건데, 쫓겨나는 건데, 미는 없어.”
왜 끝을 아름답게 포장하려고 할까? 해피엔딩, 명예퇴직, 유종의 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수식어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면 끝이 오기 전에 끝이라서가 아닌, 진짜 아름다움을 만들어보자.
당신도 나도 언젠가는 끝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를 굳이 아름답게 포장할 필요는 없다. 끝나면 그저 끝인 것. 그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

이경규 지음
쌤앤파커스 펴냄

읽었어요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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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라는 것에서 100퍼센트 멀어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나 역시 비교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조금이나마 건강하게 비교하기 위한 나만의 기준 같은 것을 마련해보게 되었다. 나와 어떤 ‘사람’을 두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상황만을 대치시켜보는 거다. 내가 나의 어떤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쉬울 때가 있었으면, 같은 상황일 때 현명하게 겪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대처하는 방법이 나와 어떻게 달랐는지를 비교해보는 식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내가 욱했는데, 같은 상황에서 누군가는 욱하지 않고 유하게 잘 넘어갔다면 그런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마음 상태가 어때 보이는지, 어떤 말로 대처하는지를 지켜보는 거다. 상황이라는 기준을 정하고 대처하는 태도만을 비교하니 상대방에게서 배울 점을 찾을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나를 잘 지켜가며 살리라 마음먹어도 예기치 못한 상황에 타인으로부터 남과 비교당하면 언제 또 속절없이 흔들릴지 모른다. 남과 비교당하면 언제 또 속절없이 흔들릴지 모른다. 적어도 그때는 타인이 기준 없이 가둬놓은 비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나를 균형 있게 바라보고 싶다.

가끔은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있다. 남 탓하는 걸 유독 경계하는 편이라 그럴 때면 나에게서 아쉬운 점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왜인지 거듭해서 일이 안 풀리면 환경이든 상황이든 다른 것을 탓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 게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들은 것 같다. 내가 무언가 부족해서 잘 안 된 거라 생각하면 버거우니까 다른 요인을 찾아보고 바깥을 탓하는 거다.
반대로 문제가 뭔지를 내 안에서만 찾으려 하다가 자책이 심해져 기울어버리는 것도 위험하다. 타인, 회사, 환경 등을 내가 바꿀 수 없으니 스스로 나아질 점을 찾으려던 게 어느 순간엔 질책처럼 변질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내가 건강하게 ‘내 탓’을 하고 있는지를 돌봐줘야 하는 것 같다. 나도 머리로는 이처럼 균형 있는 ‘내 탓’을 추구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조금이라도 남의 핑계를 덜 대고, 상황 탓을 덜 해보고자 애쓸 수 있었던 데는 연습생 때 춤을 레슨해주셨던 한 선생님의 말씀이 큰 영향을 끼쳤다.
“네가 뭘 바라기 전에 그 사람이 해주고 싶어질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져 있어야 해. 뭘 탓하기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너에게 뭔가 해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도록 노력해봐.”

적당한 사람

이창섭(BTOB)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읽었어요
2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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