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대프린스님의 프로필 이미지

샤대프린스

@apoetofmyheart

+ 팔로우
품위 있는 삶의 표지 이미지

품위 있는 삶

정소현 지음
창비 펴냄

그의 두 번째 소설집 역시 단편들이 쫀쫀하게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

이번 소설집에는 믿을 수 없는 화자들이 등장한다. 치매로 기억을 잃고 있어서, 사고로 기억을 잃어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어서, 사고의 진상을 알게 되어서,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서, 그들은 어떤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독자에게 믿을 수 없는 화자다. 그렇지만 일단 나는 이들을 믿고 읽을 수밖에 없다. 작품 대다수가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고, 화자가 그렇다는데 뭐 그런 거겠지 하고 읽어 내려가는 게 당연하니까. 다만, 이 모든 게 다 거짓이었음을, 혹은 진실을 몰랐던 사람에게만 진실이었던 어떤 사실 혹은 허구였음이 밝혀질 때, 이런 또 속았군 하면서도 못내 짜릿하고 즐겁다. 화자를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은 정말 흥미로운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두 번 이상 읽어야 한다. 물론 나는 그러지 못했다. 정소현이 정소현했으니까. 어둡고 아프고 암울하고 뭐랄까 안타깝고, 무엇보다 읽는 내내 머리가 아팠다. 화자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계속 검열하면서 읽어 내려가게 되니까. 그렇지만 작가는 독자를 끝까지 읽게 한다. 그의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유려하게 흘러가다 적확하게 마무리한다. 다 읽은 후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의 마음으로 책장을 덮고 일어나게 한다. 대신 마음에 어떤 소용돌이 같은 파문을 남기지.

문학평론가 신샛별의 해설은 그 파문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관해 흡족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덕분에 독해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고, 내 마음에 새겨진 파문을 가지고 살아나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정소현이 계속 많이 써줬으면 좋겠다. 마침 그가 「그때 그 마음」으로 2022년 현대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물론 반년 전의 일이긴 합니다만 제가 정소현을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까요. 여러분도 정소현하세요. 후회는 하지 않으실 겁니다.
2022년 7월 18일
0

샤대프린스님의 다른 게시물

샤대프린스님의 프로필 이미지

샤대프린스

@apoetofmyheart

일몰 보러 다대포 가는 1호선 안에서 박솔뫼의 「여름의 끝으로」를 읽다가 이런 부분이,

“차미를 안고 등에 코를 묻으면 땅콩 냄새 같은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일정한 소리로 코를 골며 자는 차미의 등에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았다. 잠이 올 것 같은 냄새였다.” (33쪽)

어젠 요가원에 좀 빨리 갔고, 한참 동안 나와 선생님 그리고 고양이 샨티밖에 없었는데, 샨티는 내 요가 매트 위에 올라와, 내게 등을 돌린 채로 앉아 있고, 바즈라아사나로 요가를 준비하려던 나는, 금세 샨티의 집사가 되어, 샨티의 등을 주물주물,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어느덧 서늘해진 바람과 따듯한 샨티의 등을 동시에 만졌다. 여름의 끝이구나.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박솔뫼 지음
스위밍꿀 펴냄

2023년 10월 10일
0
샤대프린스님의 프로필 이미지

샤대프린스

@apoetofmyheart

내일 부산 가는데 『미래 산책 연습』 진짜 안 챙기려 했거든? 방금 후루룩 훑었는데 도무지 안 들고 갈 수가 없네··· 이를테면 이런 장면,

"된장찌개를 시켰는데 비빔밥을 시킬걸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제 하루가 지났고 남은 휴일은 무얼 하지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하려 했지만 때마침 테이블에 커다란 보리차 주전자가 탕 소리를 내며 놓였고 커다랗고 따뜻한 주전자를 보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고 보리차를 마시자 반찬이 나오고 상추가 나오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틈도 없이 테이블 위에 빠짐없이 차려진 밥을 먹기 시작했다." (47쪽)

나도 정말 제발 진실로 진정 이렇게 여행하고 싶다···
2023년 10월 5일
0
샤대프린스님의 프로필 이미지

샤대프린스

@apoetofmyheart

시인과 문학평론가가 주고받은 열두 편의 서신을 모아 놓은 책. ‘지금-여기’의 책들에 관해 나누는 이야기라 무척 재미있다. 두 분이 함께 읽은 책 중에는 내가 살펴보았거나 읽었던 책이 왕왕 있었고. 김대성, 김봉곤, 김지연, 김혜진, 서이제, 알렉세이 유르착, 유성원, 임솔아, 임현, 장류진, 조지 오웰, 한병철의 작품. 3분의 1 이상은 알고 있어서 어찌나 다행이었는지. 그러나 내가 모르는 작품에 관해 나누는 서간을 읽을 때도 역시 즐거웠다. 온종일 한국문학 이야기 정말로 자신 있는 나로서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 가지고 양껏 수다 떠는 걸 지켜보는 게 못내 좋았다. 문학이 수다를 떨게 만드는 순간은 정말로 좋다!

*

“차이에 대한 기만적인 인정으로 무언가를 봉합해버리려는 편의적인 행태에 대해, 저 역시 선생님과 똑같이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계기를 촉발하지 않는 타자는, 아무리 ' 차이'라는 명분으로 세련되게 포장하더라도 결국 동일성의 반복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선생님과의 대화 혹은 열띤 논쟁이 즐거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합의와 존중의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7쪽)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년에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역시나 서로의 생각이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꼈을 때. 올해도 앞으로도 마음껏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장정일 외 1명 지음
안온북스 펴냄

2023년 1월 12일
0

샤대프린스님의 게시물이 더 궁금하다면?

게시물 더보기
웹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