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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즈

대니얼 카너먼, 올리비에 시보니, 캐스 R. 선스타인 (지은이), 장진영 (옮긴이), 안서원 (감수) 지음
김영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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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개소리에 더 수용적이었다. 그들은 “진실되고 의미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멍청한 인상적인 주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이렇게 잘 속는 성향은 그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기질이 작용한 결과가 아니다. 좋은 기분을 유발시키면, 사람들은 개소리를 더 잘 받아들이고 전반적으로 더 잘 속는다. 다시 말해 기분이 좋으면, 사기를 감지하거나 허위 정보를 알아차리는 능력이 무뎌진다. 반대로 허위 정보에 노출된 목격자들은 기분이 나쁠 때 허위 정보를 더 잘 묵살하고 거짓 증언을 더 잘 피한다.

인도교 문제에는 개인적인 감정이란 요소가 분명히 수반된다. 제어가 안 되는 전차가 달려오는 길 위로 누군가를 밀어서 떨어뜨리면, 사람들은 낯선 이에게 가하는 신체적 폭력에 대한 혐오감을 극복해야 한다. 다수를 살리기 위해 한 명을 희생시키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보통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실험 참가자들이 5분 정도 짧은 영상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을 때 이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재차 묻자, 이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남자를 희생시키겠다고 말했다. 성서의 가르침인 ‘살인하지 말라’를 절대 원칙으로 삼을지, 아니면 기꺼이 한 명을 희생시켜 다섯 명을 구할지는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방금 본 동영상 클립에 좌우되는 듯하다.
‘나’라는 사람이 늘 똑같은 건 아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기분에 대한 연구들을 자세히 살펴봤다. 기분이 바뀌며, 뇌의 어느 부분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기분이 바뀐다는 것은 모두가 인지하지만, 뇌의 어떤 영역에서 변화가 나타나는지는 잘 인지하지 못한다.) 복잡한 판단의 문제에 직면하면, 그 순간의 기분이 문제에 대한 접근법과 결론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설령 자신의 기분이 그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스스로의 답변을 자신 있게 정당화시킬 수 있을 때라도 말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우리에게 잡음이 있다.

경영 의사결정의 직관에 관한 어느 연구에서는 직관을 “옳다거나 타당하다는 후광 내지 확신은 있지만 명확한 이유나 근거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 정해진 행동 방침에 관한 판단, 즉 알고는 있지만 그 이유는 모르는 판단”으로 정의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옳은지 안다는 느낌이 곡 판단 완료에 대한 내재적 신호다.
이 내재적 신호는 자기 자신에게 주는 일종의 보상이다. 판단을 내릴 때, 사람들은 이 내재적 신호를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가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내재적 신호가 느껴지는 때도 있다.) 이것은 만족스러운 감정적 경험, 즉 기분 좋은 일관된 감각이다. 내재적 신호를 느끼는 동안 판단자는 자신이 검토한 증거와 그 증거를 토대로 내린 판단이 옳다고 느낀다.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인 것이다.(판단자는 주로 최종 판단에 맞지 않는 증거를 숨기거나 무시하여 일관된 감각을 강화한다.)
내재적 신호가 중요한 것으로, 또 판단을 호도하는 것으로 부각되는 까닭은 이것이 느낌이 아닌 믿음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 감정적 경험(증거가 맞는 것 같아)은 자기 판단의 타당성에 대한 합리적인 확신(이유는 모르지만, 그게 맞다는 건 알아)으로 둔갑한다.
확신은 예측의 정확도를 보장하지 않는다. 확신에 찬 많은 예측이 틀린 것으로 밝혀지곤 한다. 편향과 잡음은 예측 오류를 유발하지만, 이러한 오류의 가장 큰 원천은 예측적 판단의 제한된 정확도가 아니다. 그것이 얼마나 정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제한이다.

일반적으로 예측적 판단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객관적 무지를 과소평가한다. 과신은 많은 증거가 있는 인지적 편향이다. 특히 심지어 제한된 정보로 정확한 예측을 내리는 자신의 능력을 판단할 때는 끔찍할 정도의 자기 과신이 나타난다. 예측적 판단에 나타나는 잡음은 객과적 무지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예측이 있는 곳에 무지가 있고, 그러한 무지는 생각보다 더 많이 존재한다.

테틀록은 단도직입적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전문가들에게 각각의 이슈에 대해 현상 유지가 될 지, 현상에서 더 나아갈지, 현상에서 더 물러설지 등 세 가지 가능성으로 제시해달라고 요청했다. 침팬지라면 세 구역으로 나뉜 다트판을 향해서 다트를 던졌을 것이다. 확률을 3분의 1이다. 테틀록이 조사했던 전문가들은 최저 기준을 간신히 넘겼다. 평균적으로 그들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보다 일어날 일에 조금 더 높은 확률을 부여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그들이 자신의 예측에 대해 보인 과도한 확신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설명하는 명료한 이론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이 자신의 예측에 대해 가장 큰 자신감을 보였고, 가장 정확하지 않은 예측을 했다.

스스로 꽤 정확한 예측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단지 과신에만 빠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에 잡음과 편향의 위험이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부정한다. 단순히 자기를 남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여기는 게 아니라, 사실상 예즉 불가능한 사건들을 예측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현실의 불확실성을 암암리에 부인하는 행위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런 태도는 무지의 부정에 해당한다.

왜 의사결정자들은 계속 자신들의 직감에 의지하는 것일까? 의사결정자들은 직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내재적 신호를 듣고 그에 따른 감정적 보상을 느낀다. 좋은 판단에 이르렀다는 내재적 신호는 ‘이유는 모르지만 알고 있다’는 확신의 목소리다. 하지만 증거를 가지고 실제 예측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해보면, 그런 지나친 확신은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다.
직관적인 확신이 주는 감정적 보상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조직 리더들은 특히나 본인들이 매우 불확실해 보이는 상황에서 자기 직관에 의지해 의사결정을 내린다고 강조했다. 주어진 사실을 이해할 수 없고 그토록 원하는 확신이 생기지 않을 때, 그들은 이해와 확신을 제공하는 자신들의 직관에 의존한다. 무지가 클수록, 그런 무지를 부인하고픈 유혹도 커지기 마련이다.

조지 루카스처럼, 우리는 주로 특정 결론에 도달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판단 과정을 시작한다. 이렇게 할 때, 빠르고 직관적인 시스템1 사고가 작동하여 결론에 이른다. 우리는 속단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종합하는 과정을 우회하거나 예단을 지지하는 주장을 제시하기 위해서 의도적 사고에 개입된 시스템2 사고를 동원한다. 이런 경우 증거는 선택적으로 수집되고 분석되어 왜곡된다. 확증 편향과 바람직성 편향 때문에 우리는 이미 믿고 있거나 사실이길 바라는 판단에 우호적인 증거를 선택적으로 수집하고 해석하게 된다.
사람들은 곧장 자신의 판단을 그럴듯하게 합리화하고, 그러한 합리적인 이유를 근거로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예단이 판단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확인하려면, 자신의 판단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이 갑자기 타당성을 잃어버렸다고 상상해보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강한 반박에도 루카스의 마음이 바뀌진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판단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른 주장을 내세웠을 것이다.

예단의 사례는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조지 루카스의 반응처럼, 예단에는 감정적인 요소가 있다. 심리학자 폴 스로빅은 이것을 감정 어림짐작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참고해 판단을 내린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싫어하는 정치인에 관해서라면 그의 생김새나 목소리마저 싫어한다. 그래서 기업들은 자기 브랜드와 긍정적인 감정을 연관 짓기 위해 노력하고, 교수들은 강의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해에는 강의 자료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게 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감정이 개입되지 않을 때에도 같은 기제가 작동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이유로 무언가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게 됐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한다고 생각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수용한다. 설령 그게 이치에 맞지 않을 때조차도 말이다.

대체로 우리는 성급히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을 고수한다. 증거에 근거해서 의견을 개진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감안하는 증거와 그에 대한 해석은 처음의 속단에 맞게끔 적어도 어느 정도로는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머릿속에 떠올랐던 전반적인 이야기의 일관성을 유지한다. 물론 결론이 옳다면 이 과정도 괜찮다. 하지만 처음의 평가가 잘못됐을 때, 모순된 증거가 있음에도 그 결론을 고수하려는 경향은 오류를 증폭시킬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듣거나 본 정보를 무시하기란 불가능하고 떨쳐내기도 어렵기 때문에, 이 영향은 통제하기 어렵다.

과도한 일관성은 정보가 제공되는 순서와 그 의미가 모든 (또는 대다수) 판단자에게 동일한지, 그 여부에 따라 편향이나 잡음을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입사 지원자의 외적 매력이 모든 채용 담당자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준다고 생각해보자. 외모가 그 사람이 지원한 자리와 무관하다면, 외모 때문에 생긴 긍정적인 후광은 공유된 오류, 즉 편향으로 이어질 것이다.

어떤 판단은 예측적이다. 또 어떤 예측적인 판단은 입증 가능하다. 그래서 그 판단이 정확했는지 여부를 끝내는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의약품의 효과, 전 세계적인 유행병의 경과, 선거 결과 같은 단기 예측에 해당한다. 하지만 장기 예측이라든지 가상의 질문에 대한 답 등 확인할 수 없는 판단도 많다. 이러한 판단의 질은 그 판단에 이르게 된 사고 과정을 통해서만 평가할 수 있다. 게다가 많은 판단이 예측적이지 않고 평가적이다. 판사의 형량 선고나 대회에 출품된 그림의 순위는 객관적인 참값에 쉽게 비교할 수 있다.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은 마치 모든 판단에 참값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비롯해 모두가 놓쳐서는 안 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표적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개인의 판단에 따른 결정은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과 그 판단이 제한적일 것이란 기대를 내포한다. 판단 문제는 제한된 의견 불일치에 대한 기대를 특징으로 한다. 판단 문제는 의견 불일치가 허용되지 않는 ‘연산의 문제’와,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거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취향의 문제’ 사이에 존재한다.
2022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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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저승사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온다고 한다
그리워하던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리워하던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다고.
꽃 몽우리가 막 돋아나기 시작한, 그런 계절의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 길게 드리운 벚나무 가지 아래.
그곳에 네가 있었다.
“….김나무…..?”
“너, 여전히 발음이 엉망이네. 내 이름 그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러면서 웃는데, 그 모양이 거짓말처럼 뚜렷해서 손을 뻗으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걸까 생각했다. 네가 내 앞에 있을 리가 없다. 이다지도 생생히, 질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선명히 내 눈앞에 있을 리 없다.
왜냐면 너는, 너는 이미 오래전에…..
“두 번이야.”
“뭐……?”
“앞으로 두 전. 두 번만 더 불러. 그럼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어.”
나로 인해 죽었으니까.
“불러. 내 이름.”
내가 죽기 일주일 전, 네가 내게 돌아왔다.

내가 죽기 일주일 전

서은채 지음
황금가지 펴냄

읽었어요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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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규 선배는 좀 차가워요.”
“방송만 끝나면 휙 가버리시더라고요.”
하지만 주방장이 요리를 내기 전에 맛있는 음식을 다 먹어버리면, 손님들은 무슨 맛을 기대할 수 있을까? 방송도 요리와 같다. 주방장이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재료가 신선해야 하고, 특히 첫 맛이 중요하다. 대기실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미리 얘기해버리면, 정작 카메라 앞에서 내어갈 수 있는 건 한 김 식은 반찬들뿐이다.
몇 차례 오해와 해명을 거치고 나니 사람들도 나를 이해해주기 시작했다. 내 침묵은 내가 무례해서도 아니고 다른 출연진을 무시해서도 아니다.
공연 전에 악기를 조율하는 것처럼, 용 그림에 마지막으로 눈을 그려 넣기 전에 잠시 붓을 멈추는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지 마라.
윤식과 형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70퍼센트만큼만 하고 30퍼센트는 내일을 위해 남겨두라고. 다들 오늘만 사는 것처럼 매순간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지만, 한 번에 아이디어를 100퍼센트 쏟아붓지 말고 30퍼센트는 아껴뒀다가 다름에 써야 한다. 매번 가진 것을 전부 소진해버리면 오래 가기 어렵다. 그래도, 남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소리를 탱자탱자 게으름뱅이가 되라는 것으로 착각하면 큰일난다.
지금 무언가에 100퍼센트를 쏟고 있는가? 잠시 멈춰보라. 70퍼센트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나머지 3-퍼센트를 비축해둬야 번아웃을 피할 수 있다. 잘 모르는 것은 만약을 위해 아껴두는 것, 그것이 사회인의 지혜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출발하는 선택은 없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마치 공기처럼 보이지 않게 우리를 어떠한 방향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내게는 그것이 극장이었다. 어디를 가든 매일 지나치던 극장들, 영화 속 주인공들,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무한한 세계들.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연극영화과로, 영화로 이끌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극장 삼거리에서 자라났다. 누군가에게는 도서관이, 누군가에게는 바닷가가, 누군가에게는 기차역이 있었을 테다.
어머니가 극장 의자에서 잠든 소년을 찾으러 왔을 때, 그 순간이 내 인생의 예고편이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잠에만 푹 빠져있었다. 여러분의 극장 삼거리는 어디인가? 매일 지나치는 길과 늘 보이는 풍경, 자주 들어 익숙한 소리... 그것들이 당신을 이끄는 곳은 어디인가?

계속되는 낙방에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동기들이 옆구리를 찔러대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개그맨 콘테스트에 나가봤다. 재미로 경험 삼아 해보자 싶었는데, 1981년 MBC 제1회 라디오 개그 콘테스트에서 MBC 공채 개그맨 1기로 덜컥 합격을 해버렸다. 물이 흐르다 막히면 새로운 길을 뚫듯이, 배우의 꿈이 막힌 자리에서 마법처럼 코미디언의 길이 열렸다. 신기한 일이다. 방법은 언제나 있었다.
처음에는 방송국 구석구석을 누비며 잔심부름을 도맡았다. 담배 심부름부터 커피 타기, 도시락 배달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러다가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당시 코미디는 세트장에서 짜여진 대본으로 연기하는 콩트 코미디 위주였는데, 나는 실내보다 야외가 더 좋았다. 정해진 대사보다 즉흥적인 실제 상황이 더 재미있었다. 그때의 야외 촬영 경험이 <건강보감>과 <몰래카메라>, <양심냉장고>, <이경규가 간다>를 가능하게 했다. 신인 때부터 길거리에서 시민들과 가깝게 마주하고 부딪쳤기에 야외에서 시작된 버라이어티 실험들을 소화할 수 있었다.
코미디언으로 살아온 45년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RMeo 연극 오디션에 떨어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설령 요행으로 연극 무대에 올랐더라도 코미디언만큼 나의 재능을 남김없이 보여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떤 실패도 영원한 실패는 아니다. 여러 실패의 문을 닫아봐야 내가 기다려온 문을 만났을 때 그 안을 과감하게 발을 내디딜 수 있다.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즐기는 사람은 그저 즐길 뿐이다. 진짜 강한 사람은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다. 70퍼센트만 보여주면서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다. 100퍼센트로 초반부터 퍼부어서 금방 지쳐 나가떨어지는 것보다 꾸준히 오래가는 것이 더 현명하다.
전쟁터를 생각해보라.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구십 대의 6.25 참전용사만이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장군이든 병사든 살아남아야 한다.
조용필 선배를 보라. 일흔이 넘어서도 여전히 앨범을 내고 무대에서 노래하고 있다. 20집이 넘도록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무대를 갖고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술자리도 마찬가지다.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그날 밤의 진실을 기억한다.
진정한 승리는 속도가 아니라 지속하는 힘에서 나온다. 코앞의 이익에 목숨을 걸지 말자. 살아남은 사람, 마지막까지 남아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 그가 진정한 승자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내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다.

<2022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오랫동안 지켜본 바로는, 대부분의 선배님들이 이 상을 받고 방송계를 떠났다. 그러니까 이건 ‘이제 떠나라’는 메시지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물러날 내가 아니다.
“많은 분들이 이야기합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 박수 칠 때 왜 떠납니까? 한 사람이라도 박수를 안 칠 때까지, 그때까지 활동하겠습니다.”
회사에는 ‘명예퇴직’이 있다. 하지만 퇴직에 무슨 명예가 있나? 그냥 ‘퇴직’일 뿐이다. ‘명예’라는 말을 붙여서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보려는 건가?
프로그램 마지막 회를 녹화할 때면 PD나 작가들이 ‘유종의 미를 거두자’고 한다. 그때마다 나는 말한다. “유종의 미가 어디 있어? 그냥 유종이지. 끝나는데 뭐가 아름다워? 이미 끝난 건데, 쫓겨나는 건데, 미는 없어.”
왜 끝을 아름답게 포장하려고 할까? 해피엔딩, 명예퇴직, 유종의 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수식어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면 끝이 오기 전에 끝이라서가 아닌, 진짜 아름다움을 만들어보자.
당신도 나도 언젠가는 끝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를 굳이 아름답게 포장할 필요는 없다. 끝나면 그저 끝인 것. 그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

이경규 지음
쌤앤파커스 펴냄

읽었어요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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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yuayt

비교라는 것에서 100퍼센트 멀어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나 역시 비교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조금이나마 건강하게 비교하기 위한 나만의 기준 같은 것을 마련해보게 되었다. 나와 어떤 ‘사람’을 두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상황만을 대치시켜보는 거다. 내가 나의 어떤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쉬울 때가 있었으면, 같은 상황일 때 현명하게 겪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대처하는 방법이 나와 어떻게 달랐는지를 비교해보는 식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내가 욱했는데, 같은 상황에서 누군가는 욱하지 않고 유하게 잘 넘어갔다면 그런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마음 상태가 어때 보이는지, 어떤 말로 대처하는지를 지켜보는 거다. 상황이라는 기준을 정하고 대처하는 태도만을 비교하니 상대방에게서 배울 점을 찾을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나를 잘 지켜가며 살리라 마음먹어도 예기치 못한 상황에 타인으로부터 남과 비교당하면 언제 또 속절없이 흔들릴지 모른다. 남과 비교당하면 언제 또 속절없이 흔들릴지 모른다. 적어도 그때는 타인이 기준 없이 가둬놓은 비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나를 균형 있게 바라보고 싶다.

가끔은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있다. 남 탓하는 걸 유독 경계하는 편이라 그럴 때면 나에게서 아쉬운 점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왜인지 거듭해서 일이 안 풀리면 환경이든 상황이든 다른 것을 탓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 게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들은 것 같다. 내가 무언가 부족해서 잘 안 된 거라 생각하면 버거우니까 다른 요인을 찾아보고 바깥을 탓하는 거다.
반대로 문제가 뭔지를 내 안에서만 찾으려 하다가 자책이 심해져 기울어버리는 것도 위험하다. 타인, 회사, 환경 등을 내가 바꿀 수 없으니 스스로 나아질 점을 찾으려던 게 어느 순간엔 질책처럼 변질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내가 건강하게 ‘내 탓’을 하고 있는지를 돌봐줘야 하는 것 같다. 나도 머리로는 이처럼 균형 있는 ‘내 탓’을 추구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조금이라도 남의 핑계를 덜 대고, 상황 탓을 덜 해보고자 애쓸 수 있었던 데는 연습생 때 춤을 레슨해주셨던 한 선생님의 말씀이 큰 영향을 끼쳤다.
“네가 뭘 바라기 전에 그 사람이 해주고 싶어질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져 있어야 해. 뭘 탓하기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너에게 뭔가 해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도록 노력해봐.”

적당한 사람

이창섭(BTOB)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읽었어요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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