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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지음
문학동네 펴냄

“소설을 쓴다는 것은 아무리 놀라운 상상과 설정과 허구 뒤에 숨는다 해도 결국 자기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내면을 스스로 인화하는 과정이고 타인과 기꺼이 공유하는 것이다.”

김금희의 여러 소설을 읽다가 마침내 이 산문에 도달한 독자라면 이 문장에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그의 산문들에는 분명 그의 소설의 초상들이 있다. 개중에는 이게 이거라고 정확히 말할 수 있는 명시적인 것도, 이것과 저것을 좀 섞어 가열하고 식혀 내놓은 것처럼 불분명한 것도 있지만. 뭐가 되었든 간에 그런 장면을 소설 밖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 소설 안에서 웃다 울다 결국 두손 두발 다 들고 소설의 좋음에 항복한 사람에겐 최고의 행운일 것이다. 그렇다, 내게 이 책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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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이 산문집의 서두부터 항복을 외쳤다.

“요즘 나는 글을 쓰지 않을 때면 으레 발코니에 나가 있다. 햇볕, 흙, 장갑, 수도꼭지, 그리고 전날 밤 미리 물을 받아둔 양동이가 있는 곳이다. 거기서 죽어가는 식물의 화분을 갈아주고 가지를 쳐주고 해충 잡는 일을 하다 보면 문득, 너무 맹렬하네, 하는 소리가 들린다. 절박하게 하네, 이렇게 끝을 보고 다시는 하지 않을 사람처럼 하네, 싸우듯이 하네. 내가 너무 그랬나 싶어서 플라스틱 앉은뱅이 의자에 앉으면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발코니의 순한 잎들, 그리고 들려오는 춤, 기억, 꿈, 지시, 나무, 눈, 귤, 찬물로 만 국수와 안녕안녕─ 같은 말들. 그렇게 일렁이는 말들이 마음의 안팎으로 다 빠져나가기를 기다려야 하는 오후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그제야 찾아드는 텅 빈 평안이야말로 대상을 지정할 필요도 없는, 삶에 대한 사랑이라고.”

돌아 돌아 도달한 길이라서 더 감격스러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내가 읽고 싶은 게 바로 이 글이고 이 책이며 내가 이걸 오래 기다려왔다고 확신했다. 김금희스러운 글이고 김금희 소설스러운 글이고 김금희 소설의 인물 같은 글이다. 나는 이런 글을 쓸 자신도 없고 쓸 수도 없으니 내가 할 일은 가만히 앉아 조용히 읽는 일. "춤, 기억, 꿈" 같은 말들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다 굴려보다, 자기네들끼리 부딪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기어코 평안과 사랑을 듣기.
2022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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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보러 다대포 가는 1호선 안에서 박솔뫼의 「여름의 끝으로」를 읽다가 이런 부분이,

“차미를 안고 등에 코를 묻으면 땅콩 냄새 같은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일정한 소리로 코를 골며 자는 차미의 등에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았다. 잠이 올 것 같은 냄새였다.” (33쪽)

어젠 요가원에 좀 빨리 갔고, 한참 동안 나와 선생님 그리고 고양이 샨티밖에 없었는데, 샨티는 내 요가 매트 위에 올라와, 내게 등을 돌린 채로 앉아 있고, 바즈라아사나로 요가를 준비하려던 나는, 금세 샨티의 집사가 되어, 샨티의 등을 주물주물,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어느덧 서늘해진 바람과 따듯한 샨티의 등을 동시에 만졌다. 여름의 끝이구나.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박솔뫼 지음
스위밍꿀 펴냄

2023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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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부산 가는데 『미래 산책 연습』 진짜 안 챙기려 했거든? 방금 후루룩 훑었는데 도무지 안 들고 갈 수가 없네··· 이를테면 이런 장면,

"된장찌개를 시켰는데 비빔밥을 시킬걸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제 하루가 지났고 남은 휴일은 무얼 하지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하려 했지만 때마침 테이블에 커다란 보리차 주전자가 탕 소리를 내며 놓였고 커다랗고 따뜻한 주전자를 보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고 보리차를 마시자 반찬이 나오고 상추가 나오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틈도 없이 테이블 위에 빠짐없이 차려진 밥을 먹기 시작했다." (47쪽)

나도 정말 제발 진실로 진정 이렇게 여행하고 싶다···
2023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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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문학평론가가 주고받은 열두 편의 서신을 모아 놓은 책. ‘지금-여기’의 책들에 관해 나누는 이야기라 무척 재미있다. 두 분이 함께 읽은 책 중에는 내가 살펴보았거나 읽었던 책이 왕왕 있었고. 김대성, 김봉곤, 김지연, 김혜진, 서이제, 알렉세이 유르착, 유성원, 임솔아, 임현, 장류진, 조지 오웰, 한병철의 작품. 3분의 1 이상은 알고 있어서 어찌나 다행이었는지. 그러나 내가 모르는 작품에 관해 나누는 서간을 읽을 때도 역시 즐거웠다. 온종일 한국문학 이야기 정말로 자신 있는 나로서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 가지고 양껏 수다 떠는 걸 지켜보는 게 못내 좋았다. 문학이 수다를 떨게 만드는 순간은 정말로 좋다!

*

“차이에 대한 기만적인 인정으로 무언가를 봉합해버리려는 편의적인 행태에 대해, 저 역시 선생님과 똑같이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계기를 촉발하지 않는 타자는, 아무리 ' 차이'라는 명분으로 세련되게 포장하더라도 결국 동일성의 반복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선생님과의 대화 혹은 열띤 논쟁이 즐거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합의와 존중의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7쪽)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년에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역시나 서로의 생각이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꼈을 때. 올해도 앞으로도 마음껏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장정일 외 1명 지음
안온북스 펴냄

2023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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