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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욕의 세계 (우리는 왜 소비하고, 잊고, 또 소비할까)의 표지 이미지

물욕의 세계

누누 칼러 지음
현암사 펴냄

읽었어요
부제 ‘우리는 왜 소비하고 잊고 또 소비할까’라는 문구가 소비와 물욕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원제와 본문에서는 ‘물욕’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정한 제목과 표지 디자인은 이 책에 대한 궁금증과 마케팅적 요소를 아주 잘 살렸다는 느낌이 든다. 이 점은 번역가 역시 팟캐스트에서 언급했했고 나 역시 같은 의견이다.

1장 도파민의 파도가 몰려온다
도파민의 파도로 여는 장은 소비의 심리학적 측면으로 시작한다.
킥kick이란 몸으로 지각되고 상상으로도 가능한 쾌감이라고 전하면서 왜 쇼핑을 하면 도파민이 생성되는지를 전한다.
‘어떻게 우리는 생존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소비하게 되었을까?’라는 저자가 던지는 질문은 쇼핑이 갖는 사회심리학적 의미를 설명한다.
쇼핑을 유혹하는 도구라는 설명에서는 첫재, 약점을 보게 한다. 둘째, 제품량을 교묘히 적게 조절한다고 한다. 광고를 통해서 자신의 취약점을 자각하게 하는 것, 홈쇼핑에서 품절 임박이라며 쇼핑호스트가 소리 높여 말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fomo는 뭔가를 놓친 것에 대한 두려움인데, 이 포모를 브랜드와 연결시켜 소비를 촉진하게 만든다. 이른바 ‘어머 이건 꼭 사야 해’라는 잇템에 대한 욕구를 상승과 충족으로 완성시키는 것이다.

2장 나는 구매한다, 그리고 존재하다
쇼핑중독이라는 말은 여러 중독 기제 중 하나로 자리 잡았음을 증명하는 말일 것이다.
쇼핑은 우리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욕구와 호르몬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아래에 내재된 심리적인 부분을 말한다.
쇼핑을 통한 쾌감은 빈도가 높을수록 그 지속시간은 짧고, 우리의 몸은 또 다른 쾌감과 속도가 함께 상승한다는 것이다.
또한 쇼핑을 통한 사회적 인정을 설명한다. 동일한 제품을 쓰고 먹고 소비하는 모습은 자신이 이 사회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소속감에 대한 인정이 쇼핑중독으로 연결되는 부분에는 약한 자존감으로 인한 것이라고.
수없이 쏟아지는 광고는 자신의 취약성과 소유욕으로 작용하고, 구매로 자신을 드러낸다. 소비주의를 종교에 대한 정체성과 유대감으로 설명한 지점이 흥미로우면서도 위트 있게 들어왔다.

철학자 지구문트 바우만은 “소비는 고도의 외로운 활동으로, 지속적인 유대감을 형성하지 않는다.” “소비주의 문화의 첫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부수적인 피해는 바로 사회적 연대다.”_81쪽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소비에 대한 경고를 던져주고, 사회적 연대가 피해를 입는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자본주의가 지닌 단점을 극단적으로 지적한 부분이 아닐까.
성공한 개인의 능력 지표일 수 있는 소비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안에서 극대화된다. 또한 계층 간의 수평성과 수직성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이 소비주의이면서, 자본가인 기업과 이를 조절하는 정부에 대해서 사회적 의미까지 연결 지어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개인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이라는 유명한 말처럼 소비주의 역시 같은 궤인 것이다.

3장 물건을 살때 일어나는 일
이 장에서는 마트에서 일어나는 쇼핑이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기업에서 마케팅적으로 어떤 장치를 마련해서 소비를 이끌게 하고 우리는 어떻게 그 장치에 이용당하는지를 소비심리학적으로 설명한다.
사례의 항목들은 익히들 알고 있지만, 그런 세세한 기저가 있었던 것인가 싶은 것들도 있고 이러 분야를 소비심리학이라고 불린다는 지점에서는 또 다른 생각이 든다.
쇼핑 카드를 두 배 더 크게 만든 후 구매율이 더 상승했고, 쇼핑할 때 나오는 음악의 속도에 따른 보폭의 빠르기는 가장 선호하는 품목이 매장 안에서 가장 멀리 있어도 구매하기 위해 소비자의 이동을 이끌어 낸다. 또한 슈퍼마켓에서의 선반 높이도 과학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눈높이 진열 상품은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고, 머리 위쪽 품목은 선호도가 떨어지는 품목들이라는 것, 식품에 있어서 조명의 칼라는 신선도와 식욕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채소나 과일은 노란 조명을 쓰고, 육류는 더 붉게 보이는 조명을 사용한다.
슈퍼마켓의 마케팅 전략은 매장에서의 동선과 구매 영수증을 떠올리며 빠른 동의와 공감을 느꼈다. 반면 온라인 쇼핑으로 인한 택배 상자와 일회용 사회의 대해서는 인식이 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과대포장이 환경오염과 자원 낭비로까지 연결되는 부분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이 부족했던 것이다. 정리해서 버릴 때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지나친 포장으로 실제 물건을 꺼낼 때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런 것들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이 진행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쇼핑을 하는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전한다.
공급이 공급을 결정하고, ‘잼실험’을 통해서 선택의 폭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지점을 설명한다.

얼마나 많은 상품이 팔리지 않은 채로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폐기되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있는지를 고려한다면 과잉 공급은 결코 좋은 소비가 될 수 없다._104쪽

이 문장을 읽으면서는 ‘다이소’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다품종 소량의 매장인 다이소는 처음에는 무척 반가운 쇼핑센터였다. 그러나 다이소 제품의 잦은 교체주기와 일회성 제품력은 다이소 제품에 대한 품질에 대해서 생각을 전환하게 해 주었다.
여기서 또 다른 딜레마가 생긴다. 경제적 여건으로 고품질의 상품을 소비할 수 없는 계층이 있고, 모든 상품이 고품질일 이유는 없다. 그러나 공급과잉은 제품의 수명과 자원배분과 활용에 대한 근본적인 부분을 묵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sns라는 온라인을 통한 소비는 상품 마케팅 분야의 사람들이 행동생물학을 토대로 특정 계층이나 집안에 속하고자 하는 본능과 욕구를 전문가라는 이들이 이용하고 있는 것이라는 문장 역시, 소비주의의 어둡고 깊은 바닥을 보게 한다.

4장 내가 사는 것이 곧 나다
이 장 역시 구매하는, 소유하는 물건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인정과 정체성의 사례들을 제시한다. 그런 제시들을 통해서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속하고자 하는 집단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인용된 철학자나 학자들의 견해들은 소유한 혹은 구매하는 물건을 통한 사회 계급에 대한 인간 욕구를 지적한다.
그러면서 여성을 기반으로 한 코즈메틱 산업과 패스트패션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페미니스트는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명하면서도 소비에 있어서 여성의 취약성을 어떻게 기업이 마케팅적으로 이용하는지를 보여준다.
백 년 가까이 불안의 원칙으로 성공한 산업분야는 화장품 분야이며, 패스트패션에서 여성의 옷 사이즈를 프리사이즈라는 명칭으로 만든 사이즈에 대해 비판한다.

어떻게 여성이 ‘모든’ 여성에게 잘 맞는 한 가지 사이즈에 맞을 수 있을까? 터무니 없다._ 150쪽

격한 공감. 매장에서 옷을 살 때, 불편함이 많았다. 유독 여성의류에 있어서 프리사이즈가 있고, 성인옷 사이즈가 더 작게 만들어져 나오는 경향은 소비자를 위한 것이 아닌 기업이 상품을 더 많이 판매하고자, 심리적으로 여성의 불안을 부추겨서 산업을 활성화시키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경향에 반발로 바디 포지티비티가 등장한 흐름에 대한 저자의 칭찬은, 이른바 ‘정상’ ‘표준’에 대한 고정관념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긍정에 대한 사회적 기류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고, 단순히 정신승리 차원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하울과 트라이온 하울에 대한 설명에서는 온라인이 가져온 새로운 마케팅이면서 인간 욕구의 발현을 본다. 하울haul은 포획물, 전리품이라는 의미로 최근에 구입한 상품을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트라이온 하울try-on-hauls은 유투버가 새로 구입한 옷을 보여주고 착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하울과 트라이온 하울의 기저 역시 구매한 상품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계층적 인정이 아닌가.

5장 나쁜 소비
친환경 혹은 유기농이라는 타이틀의 제품이나 식품은 더 좋은 과정을 거쳐서 소비자인 우리에게 왔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들이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는 걸 이 책을 읽으면서, 또 이 장을 통해서 더 인식하게 된다.
특히나 의류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플라스틱이 옷의 소재이고, 옷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을 사용하고 폐수를 방출하며, 또한 저개발국가에서 착취의 구조로 의류기업들이 생산, 제공하는 시스템을 보게 되었다.
패스트패션이 자원을 더 낭비하고 남아도는 옷들은 또다시 판매를 위한 소각이라는, 자본과 기업의 입장으로 굴러가고 소비자는 또 의식하지 못한 채 이런 시스템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쓰레기가 될 운명으로 만든 옷의 생산을 막는 일이다. 그런 옷의 품질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형편없다._192쪽

한국의 삼성전자의 사례를 든 경우도 눈길이 갔다. 화학물질을 사용하기 않겠다고 했으면서도 실은 주력제품는 제외라고 작은 글씨로 표기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삼성전자의 tv 제품이라고 하면서 그 외 다른 제품에서도 여전히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있다고 전한다.
소비자인 사용자에게 이 모든 책임을 넘기는 듯한 기업의 태도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소비자가 친환경적인 제품을 선택하거나 사용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오롯이 소비자인 개인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팜유편을 읽으면서는 시간에 내몰리는 삶 속에서 요리해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삶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읽는다. 인스턴트와 간편식은 결국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환경과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린워싱이라는 기업들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제시하는 유명 기업들의 실상은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한다. 소비자들의 선량한 마음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는 기업들의 행태에 대해서 역시나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잡지의 기사들이 마지막에는 구매 광고로 이어지는 걸 확인하게 되면서 상업 잡지뿐만 아니라 친환경이나 슬로우라이프라는 슬로건을 내건 잡지 역시 같은 시스템이란 걸 알고 화가 났다는 저자의 말에서는 잡지 역시 자본의 논리로 운용된다는 사실을 새삼 인지한다. 사실 이 부분은 예전에 여성 잡지들의 기사를 읽으면서 알게 돼서 새롭다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상업 잡지가 아닌 카테고리에 속한 잡지들 역시 같은 구조라는 것이 씁쓸했다. 저자의 화가 이해가 갔다.

곤도마리에 관한 일화에서는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라고 할까. 정리수납이 트렌드로 흐를 때, 출간된 책들을 통해서 그 흐름에 영향을 받았다. 당시 문화센터에서 정리수납컨설턴트라는 민간 자격증 과정을 듣고 따기도 했고, 그때의 경험이 공간과 물건에 대한 정리와 소비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고 생활양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비움의 미학, 극강의 미니멀리즘을 말하던 이가 결국은 자신의 온라인몰을 창업해서 비움을 위한 정리 도구를 꽤 비싼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다는 후일담에서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로 귀결되는 결과를 보게 되었다.
기부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도 공감하는 바가 크다. 벼룩시장이나 중고물품 거래시 무료 나눔의 경우를 통해서 ‘기부’라는 선행을 한다는 심리가 물건을 버리는 행위에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블랙프라이데이에 싸게 산다고 생각하는 소비자들이 인식은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이라는 걸 짚어준다. 파격 할인이라고 하면서 정상가를 높게 책정한 후 할인 판매를 하는 것이다. 소비자를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저렴하다고 인지해서 필요 여부를 생각하지 않고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를 해버리게끔 만드는 것이다.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소비는 결국 환경오염과 지구의 기후 위기의 주범이다.
기업가를 비판하는 일화에서 저개발국가에서 의류 생산을 하는 기업가들이

“처참한 사회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여러분이 우리 매장에서 옷을 사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습니다.”
라며 들려준 일화의 그들은 정말이지 자본주의의 화신, 악당처럼 느껴졌다.

6장 이로운 소비
다음에는 무엇을 살까 고민하는 사람은 그것을 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 _258쪽

몇몇 사람은 (예컨대 기업 회장과 정치가 같은) 누구보다도 세계의 현 상황에 많은 책임이 있다. 그럼에도 결국 책임감 있는 행동의 시작은 어느 정도 우리 스스로에게 있다._261쪽

마지막 장에서는 개인 소비자인 우리가 어떻게 이로운 소비를 할 수 있고, 그 책임과 분담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말한다.

‘인지부조화’를 제시하면서 소비를 합리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이유는 ‘가치-행동 격차’가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치와 실제 행동 간의 차이가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등장하는 욕구 피라미드를 저자식으로 변형해서 ‘생각하기’를 넣는다. 이 ‘생각하기’를 소비의 첫 번째 키워드로 상정함으로써 소비에 대한 제동장치를 만들었다고 생각되었다.
온라인 쇼핑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편리함에 대한 빛과 그림자를 제시한다. “시스템에 따른 인간 학대”라는 인용된 언론인의 말을 택배기사들의 사례로 설명한다. 좋은 소비는 대안적인 사회 기반시설을 온, 오프라인에 모두 구축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부분을 구하는 일은 모든 사람의 과제가 아니다. 하지만 세계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보탠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일은 모든 사람의 책임이다. 비판 대신 존경을 표하라. 판단 대신 자신과 남들에 대해 더 알려고 하라. 우리는 누구나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감사하다._294쪽

 이 문장 역시 인용인데, 많은 사람들의 견해와 인식들이 공존하면서 연대하고, 결국은 인류가 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준다. 
많은 일화와 자신의 실제 경험과 현재의 자본주의 흐름까지 우리의 생활과 너무나 밀접하게 밀착되어 있어서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아주 세밀하게 이야기하면서 소비에 대한 미시적 의미에서 지구에서의 기후 위기와 환경오염으로 인한 소멸에 대한 거대한 의미까지 연관 짓게 해주었다.


우리는 소비하면서 살아간다.
숨을 쉬듯 소비를 하곤 했지만, 필요에 의한 소비보다는 어느 지점에는 욕망의 충족과 분출, 경제적 사회적 과시를 위한 소비를 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와 소비주의를 엮어서 생활 밀착과 알지 못했던, 또는 알려고 하지 않았던 물건들이 소비자에게 이르는 과정들, 그런 소비주의가 어떤 삶을 살아가게 하는지 환기하게 해준다.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과 대답을 마지막 결제 전에 하게끔 하는, 수다스럽지만 기분 나쁘지 않게 말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2024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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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아이의 방학 숙제 책 중 하나였다. 여전히 독서록 쓰기를 몹시도 귀찮아하지만, 엄마도 읽고 같이 반응해달라는 투정 아닌 투정으로 읽고 아이의 말에 반응해 주었다.
청소년 문학이라는 타이틀을 걷어내고 읽어도 작가의 주제의식이 ‘관계’라는 점에 생각이 맴돌았다. 코로나19를 거쳐왔기에 그런 까닭일까! 유독 ‘관계’라는 키워드가 많이 들어온다. 점점 살면서 타인과 또 나 자신과의 관계에 생각이 많아지고 변한다.

소설의 화자 류담은 타인의 삶이 언제 끝나는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부모님의 교통사고 이후로 얻게 된다. 원하지 않는 능력을 얻고, 그 능력으로 타인을 돕고자 하지만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을 열었던 친구의 ‘죽음의 디데이’를 막아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그 디데이의 초록색 링 숫자대로 죽는다. 이 사건 이후로 담은 자발적 아싸가 된다. 관계를 맺는 이의 '죽음의 디데이'가 보이게 된다는 걸 깨닫고, 그 이후로는 타인과 다시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초, 중교 시절을 지나 고등생이 된 담에게 같은 반 반장 소미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선다. 학교에서도 이미 자발적 아싸로 인식되는 담에게 미소는 반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같은 조별 과제를 하게 되면서 담의 일상에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담과 같은 능력을, 같은 불행의 대가로 얻게 된 털보 아저씨 상두를 만나면서 담의 삶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털보 아저씨 상두가 불행으로 실의에 빠져 있다가 그 능력으로 무당 같은 업으로 밥벌이를 하지만, 그들의 단축된 수명을 바꾸는 방법을 알게 되고 도우면서 겪게 되는 과정 속에서 담과의 만남은 다시 한번 소용돌이를 속을 헤쳐 나가게 된다. 물론 이 방법은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전제가 따른다. 이런 설정은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만든다. 같이 읽는 이들에겐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는 물꼬가 된다. 타인을 위해서 얼마큼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가? 희생할 수 있는 이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일 때 가능할 것 같은가?라는 질문들.

이야기의 흐름이나 각 인물들 간의 관계가 연결되고 교차되는 구조들이 이야기 속으로 계속 빠져들게 한다. 복선과 암시가 있어서 인물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될지도 가늠이 되긴 했다. 유일한 어른으로 나오는 인물 털보 아저씨 상두는 담과 ‘친구’가 되어서 혈연이 아닌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조력자 혹은 동반자로서, 어른에 대한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고 필요한 현실적 모습으로 등장해서 좋았다.

담이 미소와의 관계가 변화되는 일련의 일들은 작은 인연의 조각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듯, 관계의 그림 또는 깊이가 완성되어 가는 모습에서 새삼 대면의 세계가 갖는 힘을 새삼 느낀다.

담이 미소와 우정에서 설레는 첫사랑의 관계로, 그리고 목숨을 나누어주고 싶은 존재로 변화되는 관계의 변화는 담 역시 엄마의 희생으로 얻은 삶이라는 걸 깨닫고 그 덤의 삶을 자신의 소중한 존재에게 나누려 한다는 흐름이 인간의 성선설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담을 싫어하던 친구와의 오해 혹은 묶은 감정들이 해소되는 사건 역시 타인의 선의 혹은 본능적인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후 깨닫게 되는 담과의 대척점에 있던 소현의 변화도 그런 부분에서 이해가 된다. 담과 소현이 처음 맺는 관계에서 오는 서투름과 오해가 싫은 감정으로 변하게 되는 과정과 해소의 과정 모두 이 소설의 주제라고 느꼈던 ‘관계’를 더 생각하게 해준다.

청소년 소설다운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해피엔딩 혹은 성장과 화해,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열린 결말. 그러나 해피엔딩으로 이르는 과정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 변화하는 담의 모습이 아픈 모습만 있지 않기에 엄마 마음에는 안도했다. 현실이 그토록 아름답게 완결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천진난만하지도 하고 그렇다고 상처에 움츠러들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체된 상태로 끝나지 않기에, 성장과 고난 또는 고통은 한묶음처럼 함께 오는 것이라고 느껴진다.

너에게 남은 시간 죽음의 디데이

이혜린 지음
풀빛 펴냄

읽었어요
8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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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부제 전월세의 기쁨과 슬픔이 제목의 역설과 잘 어울렸다. 흥미롭게 읽었다.
건축가인 두 사람이 나뉘어서 ‘집’에 관한 개인적 시선에서부터 인문사회적인 사유로까지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들어왔다.
일견 30대들의 전월세의 이사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계속 살아가면서도 언젠가 소유하게 될 집에 대한 의미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롤로그는 이윤석이 에필로그는 김정민이 썼는데, 도입부의 글과 마무리의 글이 책의 정체성을 담고 있어서 여는 맛과 마무리의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1장 솔직하게 만들어가는 집
'여지의 여지 '편에서 공간의 여지에 대한 저자의 말에 스며들듯 수긍하게 된다.
넓은 평수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공간의 여지가 그곳에서 사는 이의 생각과 무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 영향으로 더 긍정적이고 더 창의적으로 사고가 넓어질 수 있다는 증거처럼 읽혔다.
1인 가구의 최소 주거면적에 대한 논의들을 읽다 보면 자본 또는 경제적 측면으로 해석한 공간의 ‘최소성’은 생활하는 이의 동선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이 느껴졌다. 간혹 가전제품을 사용할 때 이 제품을 디자인 한 이는 이런 제품을 사용해 본 경험이나 동선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일까, 실제 사용하는 경험치가 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불편하거나 참신해지는 상반되는 경우 모두 다.

17쪽
‘최소’라는 기준은 작두로 쓰인다. 시대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고안해 낸 극도로 효율적인 평면도를 칼날 삶아 삶의 여지를 도련한다. 시대라는 도곽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삶은 과정일 뿐이라 여기고, 과정이 된 삶들은 아무렇게나 최소로 방치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개념이 다시 정의되고 있는 지금, 어떤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모양은 서서히 청년이라는 틀 안에 박제되고 있다. 박제된 청년은 최소한으로 살아야만 하는, 최소한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정붙이고 녹붙이고'편의 에피소드도 집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갖게 해 준다. 자신의 공간과 물건에 이야기를 만들어서 하나의 역사를 쌓아가는 모습들이 새삼 개인의 역사들이 모여서 시대의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취향’에 대한 김정민의 생각은 취향조차도 자본의 논리로 해석되어 평가하려 하지만, 자기의 솔직함과 생활감이 있는 인테리어가 더 좋은 취향의 인테리어라는 문장에서는 30대의 젊은 건축가의 주체성과 자유로움을 엿본다.
두 저자는 고양이를 기른다는 점과 건축가라는 직업으로 집과 방에 대한 생각과 지금까지의 전월세 이사 여정기를 말하고 있다. 책 집필을 위한 현장조사를 위해 지인들과 관련인들의 실제 살고 있는 집들을 탐방하면서 느끼고 접한 생각들도 실려 있다.

자신의 집이 싫다고 하면서 가는 내내 왜 ‘내 집이 싫은지’를 말하는 이를 통해서 집을 긍정하려고만 했던 이유를 소비가 나를 증명하는 시대인 자본주의 사회의 맥락에 젖어 있음을 말한다. 이 부분에서 또 마주친 것은 자본주의는 소비주의이고 소비가 나를 증명하고 표현하는 시대에 살기에, 나의 소유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 생각하지 않는 지점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곧 자신이 나쁘다는 또는 별 볼일 없다는 표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얼마큼의 소비를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는 문장에 새삼 환기하면서 동의하게 된다.

2장 셋방일지
아파트의 창문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창문으로 인해 계층과 사회적 구분을 읽게 된다. 동일한 크기와 효율성으로 정착한 아파트 창호의 크기의 반대편에 빌라라는 집들의 사회적 불평등과 사용의 풍경을 던져준다. 방범창과 가림막으로 막고 보완해야 하는 빌라들. 이런 논의는 자신의 경험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읽어내고 말하고 기록하면서 건축가로서 어떤 반영과 개선을 할지 궁금해지고 기대된다.
‘뷰’에 관한 논의에서도 자연을 담는 뷰, 경관도 특정 계층이 소유하게 되는 것의 불평등 지적한다. 녹지공간인 공원이나, 경관을 더 많은 계층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도시, 주거지 형성의 중요성을 말한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공유하는 자연에 대한 의미를 일깨운다.

집이라고 불리는 많은 집들이 매트리스만으로 인식되는 저자의 프랑스 유학 때의 경험을 제시하면서 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최소의 집에서는 수면과 화장실 사용만이 가능하며 나머지 다른 것들, 주방과 거실의 기능은 축소 또는 축약된 채 최소한의 생활을 하게 되는 점들을 지적한다. 빨래방과 스타벅스의 방문이 일상이 되는 젊은 층의 생활 문화도 이런 주거 형태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빨래를 널고 차를 마시고 화분을 키운 베란다의 공간을 갖기 힘든 구조의 주거 형태들이 가져온 공유 공간의 외주화를 만들었다.
‘안행복주택’편지글에서는 정책 입안자의 태도와 정부와 국민이라는 키워드를 들여다보게 한다. 정책이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운용과 실용이 필요한 지점을 집는다.

3장 일상의 발명가들
식탁테리어라는 말은 아마도 저자가 만든 단어가 아닐까 유추해 본다. 혼자 살면서 시작된 식탁인테리어로 식탁에서 사용하는 그릇들을 바뀌거나 모으고, 요리를 하면서 성취감을 맛보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된다. 2장에서 언급되었던 주방 공간의 축약과 축소가 요리라는 행위를 멀게 하고 간단하게 데워먹는 간편식의 식생활을 유도한다. ‘감히, 요리를 해먹어. 그냥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라는 거친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요리는 개인 취향이다. 선호 여부에 따라서 즐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 주거의 구조는 사유의, 사고의 폭도 움츠러들게 한다.
반려동물을 기르기도 하고 실제로 기르는 이들의 집을 탐방한 경험은 건축가로서 집을 설계할 때, 기존의 인간만을 기본으로 한 설계에서 한 걸음 다가가 다양한 형태의 삶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 실현성의 싱크로율은 아직 낮겠지만, 다양한 형태의 삶을 상상하고 반영하고자 하는 현장성이 넓어질 때 주거에 대한 집에 대한 의미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4장 우리를 담을 집
어차피로 만든 세상편에서의 에피소드는 집에 관한 따뜻한 관점의 한 갈래를 마주하게 한다. 평수나 크기로만 말해지는 주거지가 아닌 동네라는 의미로 거주하고 생활했던 곳의 생활정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덕담의 메모, 깨끗한 이사 정리로 입주 청소비를 아낄 수 있고 그런 기분을 전해주고 싶다고 탐방했던 곳의 이야기는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실제 인터뷰라서 감동이 더했다.

전월세 집이라도 사는 동안은 내가 거주하므로 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은 역설적이듯 하지만 바로 그런 지점을 짚은 것이 아닐까?
벽돌로 쌓은 집과 지푸라기로 엮은 집편의 논의처럼 늑대집만이 안전한 것이 아니라 돼지들의 집은 지푸라기 집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주거환경을 구축해야 한다는 말이 들어온다. 집안이든 밖이든 안전할 권리가 있고,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의 흐름은 그저 집에 관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힘이 있다고 느낀다.

217~218쪽
도시는 거름망으로 걸러진 사람들끼리 사는 곳이 아니다. 도저히 서로 겹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는 곳이다. 이것을 억지로 구분하고 나누려고 한다면 당연히 괴상한 형태로 자라날 수밖에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건 다름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것이지 다름을 계속해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와 성별은 같지만 국적은 달라, 나는 너와 언어는 같지만 피부색은 달라... 이렇게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구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세계의 크기가 얼마나 협소한지 가늠하게 할 뿐이다.
‘언어’라는 단어를 알았을때, ‘자가 주거’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 ‘성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마다 우리의 세계는 커지고 있다. 중요한 건 ‘다르게 만드는 것’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감각’을 체화하는 일이다.

즐거운 남의 집

이윤석 외 1명 지음
다산북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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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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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어느덧이라는 진부한 말로 시작하는 50대의 그들은 강릉 여행을 통해 각자의 삶에 대한 겹치는 부분과 여전히 가려졌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동갑 혹은 같은 또래라는 동질성의 키워드로 들어온 소설의 이야기는 세 명의 친구들이 20대를 지나 50대를 살아왔던 각자의 이야기를 들고 강릉에서, 이곳이 아닌 여행지에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왜 각자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은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여행지일까? 일탈 같기도 하면서 일탈이지 못한 중년이 된 3명의 대학 동창의 그녀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난주, 정은, 미경.
난주는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전업주부의 삶을 살아왔다. 이제는 빈둥지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정은은 동창인 남편이 코로나로 인하여 퇴직 후 오픈했던 키즈카페의 폐업으로 경제적 파산에 이른 상태로 빚을 갚기 위한 생업전선에서 시달리며 살고 있다.
미경은 아픈 엄마를 홀로 돌보면서 직장인 도서관과 집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각자의 삶이 녹록지 않다. 오랜 친구라지만 속속들이 드러내지 못하고, 공유하거나 말한 이야기들이 각각이다.

난주의 빈둥지증후군, 남아도는 시간의 공허감, 여성으로서의 성적 박탈감.
정은의 경제적 파탄, 생활고, 빚투를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경제적 상황. 요실금으로 인한 수치심.
미경의 간병 돌봄에 혼자 고립감 속에 지나가는 시간들, 관계들.

세 명의 인물들의 서사를 읽다 보면 50대에 이른 삶의 모습들이 빛나지도 안정되지도 못함을 본다. 나름 노력하면서 시절을 살아온 왔는데, 어쩌다가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 수가 없다. 시절에 충실했건만, 무엇을 놓치고 살아온 것일까!

가장 측은지심이 느껴진 인물은 미경이다. 동성 연인의 결혼으로 관계가 정리되고, 어머니와의 간병 생활이 시작되고, 자매인 언니의 사라짐, 독박 간병의 고립무원 같은 생활로 이어진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미경에게는 가족은 있지만 가정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원하지 않을 때 혼자가 되는 건 별로였다. 혼자이고 싶을 때 혼자여야 혼자라는 사실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 엄마가, 집이 그립지 않았다. 그저 그리운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혼자여서 꽉 차는 곳.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자, 결국 거기밖에 없는 곳.


난주가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인한 일시적 관계의 단절 이후 기다려준 친구들과 다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장면이 같은 경험이 있기에 공감이 된다.
난주는 입사라는 사회생활 없이 바로 결혼과 출산, 육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생활 패턴은 많은 관계들의 정리와 변화가 오는 시기다. 그때 단절된 관계가 다시 회복될 때 느껴지던 고마움과 왠지 모를 어깃장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정은은 난주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전업주부의 안락한 삶이라고 자신의 상황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빈둥지증후군과 여성성의 상실로 허한 난주가 사업에 실패한 남편으로 인해 경제적 파산에 이른 정은이나, 독박 간병의 미경보다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세 명의 인물들은 다 각자의 행과 불행을 지고 오십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의 여행지가 강릉인 이유는 각자의 사연들이 있던 곳이었는데, 함께 여행을 하면서 강릉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정의된다. 허난설헌의 이야기가 강릉과 연결되면서 그녀들의 삶과 포개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그런데 오십대를 앞두고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꾸 지난 생을 되돌아보게 됐다. 50년 동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았는데, 남은 시간마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로 헛헛했다.

오십이 된다는 것 소설의 문장처럼 지난 생을 되돌아보면서 남은 시간을 그냥 살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하고 늙음을 이제 삶의 중심부로 맞아들여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오십을 앞두고 함께 할 친구들이 있고, 나눌 서사가 있다면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가 어떤 삶이었을지 되새기면서 앞으로의 삶을 안도하면 살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김이설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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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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