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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라

김아인 지음
허블 펴냄

몇 번을 겪든 절대 무감각해질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확신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런 말뿐인 다짐 뒤에서 타인의 죽음에 조금씩, 하지만 분명히 둔감해졌다. 에피네프가 등장하고 열 달간 전 세계에서 네 명 중 한 명이 죽었다. 4인 가족이라면 그중 하나. 여덟 명 친구 모임이라면 그중 두 명. 마흔 명으로 이루어진 학급에선 열 명이 사라졌다. 이제 누군가의 죽음이란 반드시 울거나 오랫동안 슬퍼해야만 할 일이 아니었다. 죽음의 의미나 무게가 달라져서가 아니었다. 달라진 건 우리였다. 그렇게 변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카베의 죽음에 의미를 찾아주는 일 말곤 없었다.

"진행자랑 가벼운 분위기로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하고 싶은 말이 있다더라고. 그러더니 뜬금없이 내 이름을 말하면서 날 좋아했는데 졸업이 몇 달밖에 남지 않은 시기여서 고백하지 못했다고. 그게 너무 후회된다고. 만약 방송을 보게 된다면 꼭 연락하고 싶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놀랐겠네요."
"그럼."
리엔 선배가 웃었다.
"내가 몇 년 동안이나 좋아했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까. 너도 알지는 모르겠는데, 사귀지도 않고 한 사람을 몇 년이나 혼자 좋아한다는 건 거의 병이나 다름없는 거야. 감정이라는 건 원래 변질되고 바뀌는 게 자연스러운 건데... 계기가 없으니까 변하지도 않고, 내심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사라지지도 않아서 그 모습 그대로 냉동 상태로 영영 보존되거든. 그러다 계기가 있어서 그 냉동실 문이 조금 열리기라도 하면 곧바로 굴러 나와서... 또 병이 도져버리는 거지."
"그게 병인가요?"
"병이지."
선배가 딱 잘라 말했다.
"잘못된 거잖아. 서른이 다 되어가는 내가 열아홉 살 때의 나와 똑같은 기분을 느낀다는 게. 생활도 사고방식도 가치관도 달라졌는데, 그 당시 감정의 논리만 예외로 한다는 게."

"나는 왜 그렇게 늘 불안했을까? 계속 같이 있을 줄 알았던 오빠가 나가고 혼자가 돼서? 세상이랑 사람이 무서워서? 에피네프에 죽을까봐? 아니면 그냥 어리고 젊을 땐 누구나 다 그런 거니까?"
내가 아무런 대꾸도 못 하자, 페이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한 번 죽어보니까, 인생도 없고 미래도 없는 상태로 찬찬히 돌아보니까 조금은 알겠더라고. 나는 앞날만 생각했기 때문에 불안했던 거야. 앞으로 올 날들이 지금보다 나을 거라 생각해서. 어른이 돼서 보육원을 나가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지, 오빠를 찾을 수 있겠지, 언젠가는 행복해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현재를 마주 보지 않아서. 내가 어디를 걷고 있는지 몰라서. 그래서 불안했던 거야. 그래도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게 맞는 건 줄 알았어.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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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전략 수업

폴 포돌스키 지음
필름(Feelm) 펴냄

읽었어요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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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가슴, 가족 한 명 한 명의 가슴,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 가슴을 가리키며 내가 모르는 말로 뭔가를 말했어. 하지만 분명 이런 뜻이었을 거야. '우리 아들은 아직 살아 있어'."
흔히 듣는 말이다. 기억에서 살아질 때야말로 사람은 진정한 죽음을 맞이한다고.
"아야나 씨는 아직 에구치 형의 마음속에 살아 있어. 그런 그녀를 데리고 함께 죽어서는 안 돼."
"아야나를 만난 적도 없는 네가 그런 허울 좋은 말을 할 필요는 없어."
"그럼 나를 위해 살아줄 순 없어?"
"널 위해서?"
"나는 친구가 많지 않아."
에리사와는 그렇게 말하며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었다.
"스무 살 때 기숙사생이던 나를 기억하는 건 형뿐이야. 형의 기억 안에서만 그 시절의 내가 살아 있어."
농담 섞인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네가 무정하게 살아온 대가일 뿐이지."
"형이 죽으면 내 일부도 사라져. 그 시절의 나를, 그 시절의 우리를...... 함부로 죽이지 마."
"너......"
"허울뿐인 말 한마디라도 하지 않으면,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잖아."
에리사와가 입술을 깨물었다.
방 안에 커피 향이 다시 돌아왔다.

매미 돌아오다

사쿠라다 도모야 지음
내친구의서재 펴냄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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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돌아오다

사쿠라다 도모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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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어요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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