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은 상대방을 함부로 불쌍하게 보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
삼년 전에 여자는 역 계단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B는 경애와 함께 그 앞을 지나면서 마치 중요한 비밀을 가르쳐주듯이 "아이가 있어"라고 말했다. 과연 옆을 보니 작은 이불을 덮은 아이의 발이 보였다. 경애는 그 발이 지하도의 찬 기운 속에 나와 있는 것이 마 음에 걸려서 지나가는 말로 불행하네, 라고 했는데, E가 문득 경애 의 팔을 잡으면서 니가 뭔데,라고 따졌다. 니가 뭔데 그렇게 말해, 라고. (73p)
지하상가를 지나다 노숙하는 여자와 아기를 보고 경애 가 무심코 했던 불행'이라는 언급을 정정하던 E는 그때 겨우 열아 홉이었다. 그런 깊이를 가지기 위해서는 반복된 현실과의 충돌이 얼 마나 많이 있었을까. 마치 운석이 수없이 충돌해 만들어진 달의 크 레이터처럼 일상의 어떤 일들이 E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경애는 자 기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받아낼 때마다 마치 E가 경애에게 말했듯 누군가를 그렇게 불행하게 여길 자격은 없어,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나중에는 마음을 덜 쓰며 받아냈다. 누군가에게 그 럴 자격을 주지 않는다면 경애가 불행해질 일도 없는 것이니까.(314p)
책의 인물들은 각자의 고통(이별, 대입실패, 죽음, 사랑, 해고, 원치 않는 진실이 까발려짐, 등…)을 겪지만 은근하게 상대에게 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막 친밀한 것도 아니지만 은근하게.
사건을 즉각 해결할만한 능력이 없다는 점도 답답하지만 현실성 있게 느껴졌고 이 사람들이 진흙탕을 걷고 있단 생각도 들어 함께 답답하기도 했다. 눅눅하고 꿉꿉하다. 그럼에도 인물의 태도는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능동적인 면이 있어서 인물 자체가 그리 부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다.
장편소설인데 글맛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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