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님의 프로필 이미지

미리

@miriju4k

+ 팔로우
거짓말 :한은형 장편소설 의 표지 이미지

거짓말

한은형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323. 나는 너무도 멀쩡하게 태어났고, 내 부모는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실한 기독교도이자 고루한 중산층일 뿐이며, 내게는 남편이 있다. 지루하지만 착한 남자다. 그리고 내 옆에는 갓 두 돌이 지난 아이가 색색거리며 자고 있다. 언제 울면서 깨어날지 모르지만.

🌱나는 평범하다. 그래서 평범하지 않은 삶을 꿈꾸었다. 간섭을 하지 않는 예술가 부모와 나만 아는 충직한 집사 같은 남자 어른을 갖고 싶었고, 어릴 때는 나이가 많은 연인을 지금은 나이가 어린 애인을 소유하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남편은, 지극히 평범하다. 대학병원의 고용 약사인 남편은 술을 마시고 온 날에만 코를 곤다. 양말을 내팽개치지도 않고 바지를 뒤집어 벗어놓지도 않는다. 내가 걸레질을 하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그러고는 내 귓불을 깨문다. 🌱나는 순진한 이 남자가 나에 대한 의혹과 회의를 가질까봐 조심한다. 🌿나의 쾌락은 언제까지나 유예될 수밖에 없다. 이 남자와 함께 있는 한.

그래서일까? 나는 마음을 찢어놓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비참하거나 슬프고,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는 이야기. 제대로 된 이야기라면 기쁨에는 슬픔이, 슬픔에는 기쁨이 깃들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읽을 때면 나를 어찌할 수 없다. 남편이 초인종을 누르건 말건 침대에 누워 있고만 싶고, 잠에서 깨어 젖을 달라고 보채는 아이의 뺨을 때리고 싶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몇 년만 숨어 지내고 싶다.
0

미리님의 다른 게시물

미리님의 프로필 이미지

미리

@miriju4k

55. 그러니까, ✔️차마 하지 못한 일. 나는 언제나 그것에 관심이 갔다. 존재의 진면목이란 그가 한 일만큼이나 하지 않은 일에서도 또렷하게 드러나는 법이니까.

그저 하루치의 낙담

박선영 지음
반비 펴냄

읽고있어요
1일 전
0
미리님의 프로필 이미지

미리

@miriju4k

50.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옳은 것을 주장하면 옳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는 자기효능감을 부끄럽지만 그날 처음 맛봤다.

52. 미학의 정점에는 윤리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윤리적이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까지 윤리적이지 못한 존재들이 그래도 윤리적이고자 온 힘을 쥐어짤 때, 부끄럽기 싫어서, 차마 부끄러울 수 없어서, 눈 질끈 감고 옳은 일에 자신을 내던지는 어떤 숭고의 순간들을 나는 사랑한다.

누가 보든 말든(봐주면 더 보람차겠지만) 내게 이익이 되든 손해가 되든(이익이 되면 더 좋겠지만) 해야 할 일을 우직하게 하는 사람들, 하기로 약속한 일은 어쨌든 끝내 해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렇다 할 보상도 없다. 그 일을 우직하게 계속하고 있을 유인이 언 제나 부족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태생이 우직하므로 그렇게 우직하게 일생을 산다. 그들은 승리하지 못한다. 보상도 없이, 보람도 없이, 패배감 속에서, 그렇지만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그렇게 산다.

나는 우직하고 싶지만 마냥 우직하기엔 약아빠진 인간이라서, 언젠가는 흉내 내는 이 짓마저도 때려치울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라서, 이런 사람들을 목격하게 될 때면 울면서 달려가 부둥켜안고만 싶다.

그저 하루치의 낙담

박선영 지음
반비 펴냄

읽고있어요
1일 전
0
미리님의 프로필 이미지

미리

@miriju4k

44. "나는 말한 건 꼭 지켜. 그리고 꼭 지킬 것만 말하지.
코끼리는 충직해. 100퍼센트 충직해."

장면마다 반복되는 코끼리 호튼의 독백이다.

그저 하루치의 낙담

박선영 지음
반비 펴냄

읽고있어요
1일 전
0

미리님의 게시물이 더 궁금하다면?

게시물 더보기
웹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