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는 '리얼리티를 찾아내어 수집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고 했다. 세상에 완전한 허구 소설은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우리가 딛고 사는 땅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으며, 그 땅 위에는 갖가지 인간 군상이 있다. 작가 자신, 작가가 보는 사람, 작가가 볼 수 없는 사람과 그들의 생활 양식까지. 어쩌면 작가의 의무는 그 '리얼리티'들을 빠짐없이 포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보영 작가는 김초엽의 글이 '모든 것을 감싸안는다'고 했다. 작가 자신, 다수의 사람, 소수의 사람 모두를 감싸안는다. 딱 한 사람이어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이 땅에 '리얼리티'로 존재하기에 김초엽은 그 모두를 쓴다. 대신에 타자의 눈으로 그들을 평가하거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그들의 입으로 말한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자신의 언어로 말하기에, 이야기는 한없이 따뜻한 것이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주인공이 누구든지간에 완벽하게 그가 된다는 것-처음부터 그들이었던 사람처럼 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래서 나는 김초엽 작가가 좋다.
표제작 <양면의 조개껍데기>에는 두 개의 자아를 가진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는 한 사람만의 특징이 아니라 어느 종족이 가진 특징이다. 이들은 자신의 여러 자아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거나, 의학의 도움을 받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택하기도 한다. 주인공 샐리는 샐리라는 그릇 안에 '라임'과 '레몬'이라는 자아를 갖고 있다. 두 자아는 툭하면 충돌하지만, 어떤 일에 있어서는 각자의 장점을 발휘하기도 한다. 라임과 레몬은 처음에 헤어질 결심을 하지만, 점차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네가 저 깊은 바다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라는 자문에 샐리는 '아무도 나에게 너는 왜 그런 존재냐고 묻지 않는 곳'이라는 답을 얻는다. 자아가 두 개인 우리.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너. 다소 까칠한 너. 나와는 반대되는 너. 너와 나를 감싸안는 과정은 '외계에서 온 존재'로 비유되는 '소수의 존재'가 세계에 포용되는 과정과도 같다.
<소금물 주파수>는 어린 고래의 입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고래는 때로 천진난만하고 끝없는 자기 탐색의 길을 걷는다.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한 아웃사이더 고래는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찾아 떠난다. 왜 나는 이런 것들을 알고 있을까? 나는 어떤 이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그런 한편 더 먼 세상을 알고 싶어한다. 안쪽(자아)의 심연과 바깥쪽(세상)의 대양을 동시에 탐험한다. 그 끝에서 도달한 존재의 의미가 사랑이어서, 이 단편은 내가 가장 좋아한 이야기가 되었다. 작가의 고향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데면데면한 동시에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애정이 느껴진다. 꼭 작가의 말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끊임없이 공상에 빠지는 이, 자신이 동물이거나 기계라고 믿는 이, 결함이 있는 로봇,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진 이, 외계에서 온 이.....김초엽의 세계는 그들을 주인공으로 호출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땅에도 존재하는 이들의 비유임을 알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활짝 열린 해피엔딩으로 나아간다. 나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준 이에게 '모두가 행복한 세상'으로 향하는 초대장을 남기면서. 앞으로의 지구는 그 초대장을 받은 이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 문학을 말할 때 김초엽이 항상 불려나오는 것은, 이미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나는 김초엽이 계속해서 '이상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넘치는' 이야기를 써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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