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기가 드러내고 싶은 부분만 남들에게 보이는 법이다. 이미 아홉 살 때 알아 버린 관계의 비밀 같은 거 였다. 진짜는 감추고 그럴듯한 가짜를 내보이는 것. 하지만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일까를 생각하다 보면 어느 것도 확실할 수 없었다. p.52
그러나 내가 지난 일을 말하려 할 때마다 아빠는 딴청을 피우거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철저하게 모른 척했다. 잠자코 있으면 꺼내 보기 비참한 시간이 저절로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기억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과거는 썰물처럼 뒤로 빠지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밀물이 되어 현재를 덮치기 마련이다. p.62
애초에 내가 본 영화 「클래스」에 나오는 마랭이나 「위험한 아이들」에 나오는 루앤 존슨,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혹은 「굿 윌 헌팅」에 나오는 숀 맥과이어 같은 선생은 바라지 않았다. 격려는 못 해도 그저 내 삶을 방해하지는 않기를 바랐다. p.84
"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떤 선택이든 의미는 있지 않을까?" p.94
그러면서 지금까지 아기가 내 삶을 배신하하게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내가 우리 부모의 삶에서 재수 없는 존재였던 것처럼. 마치 한 달에 한 번 떠야 하는 보름달이 두 번이나 떠 불길하다며 두 번째 뜨는 달에 붙이는 이름 블루문처럼. 배신자 달, 재수 없는 달. 나는 내 부모에게, 아기는 나에게 그런 존재 같았다. 초대하지 않았는데 불쑥 나타나서 원하지 않는 삶으로 끌고 가는 존재 말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블루문의 의미를 바꿔 가야 했다. 재수 없는 배신자 달이 아니라 의미를 주는 빛나는 달로. p.145
"Everybody's got to learn sometime(모두 언젠가는 깨닫게 되겠지)." p.147
사람들은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 더 공격적이라는 말을 나는 수긍하는 편이었고, 성적이 나쁘고 친구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한 애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거나 공격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는 것도 이미 경험한 터였다. p.161
그게 위선일지라도 지호에 대한 배려가 깔렸다고 여겨졌다. 진짜로 사이 나쁜 부모는 자녀를 배려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우선하여 자녀가 어떤 상처를 받든지 개의치 않는다. 자녀가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아예 잊기도 한다. p.171
과거의 흔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와 연결되기 마련이다. 티가 나든 안 나든. 내가 아직도 어린 시절에 대한 악몽을 꾸는 것처럼. 아빠나 엄마가 과거 한 일들 때문에 지금까지 내게 미움받는 것처럼. 지난 시간이 시도 때도 없이 나를 흔드는 것처럼. p.188-189
예상한 정도의 점수였다. 그전에는 예상한 대로 점수가 나오면 실망스러웠는데 지금은 예상한 정도만 살아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최소한 배신감이 들지는 않을 텐데. p.217
학교에서 보름달은 풍요와 여성을 상징한다고 배웠다. 그렇다면 두 번이나 뜨는 보름달은 이치에 어긋난 불운한 존재가 아니라 풍요와 여성을 곱으로, 환하게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내 선택은 힘겨울 수 있지만 더 풍요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것은 아닐까?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누군가 문을 열어 주기만을 기다렸지만 지금부터는 내가 문을 열 작정이다. 내가 나를 정의해 나갈 생각이다. p.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