몫
(p.13) 정윤의 글을 읽은 당신은 그 글을 읽기 전의 당신이 아니었다.
(p.16) 지겹고 힘든 일들만 있었다고 기억했던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더 지나고 나니 당신이 그곳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당신은 그곳을 떠나지 못했으니까.
(p.25)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한 깊은 수준의 공감을 했고, 상처의 조건과 가능성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
(p.28) 희영이 지닌 모든 특성들은 좋게 말해 현실성으로, 나쁘게 말해 속물성으로 해석되곤 했다.
(p.33) 써야하니까 쓰는 것이 아니라, 쓰고 싶어서 쓰는 것, 마음을 다해서 쓰고 싶다는 마음이 불처럼 당신 몸을 휘감고 아프게 하는 느낌을 받았다.
(p.34) 당신은 당신의 분노가 무엇 하나 바꾸지 못하고, 그저 당신 자신의 행복을 깨뜨리고 있다는 생각에 슬픔을 느꼈다.
(p.34)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면서 자기 분노 속에 갇혔을 뿐이라고 당신은 생각했다. 그건 당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p.37)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차라리 이런 일을 모르던 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은 그럭저럭 잘 굴러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시절로 이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고. 당신은 희영처럼 강한 사람이 아니어서, 화가 나서, 그러나 무력해서 속이 부식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p.58)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들.
(p.60) 그건 사랑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외로운 사랑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p.65) 정윤 언니, 내가 언니에게 관대하지 못했던 덧을 용서해요. 그렇게 사랑하고 싶었으면서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거, 편지들에 답하지 않았던 거 미안해. 아주 오래 보고 싶었어요. 잘 지내요.
(p.70) 나와 더불어 잘 살아가는 것이다. 나를 방치했던 시간이 길었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나를 비난하고 괴롭혀 왔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에게 좋은 것들이 무엇인지, 내가 편안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알아 가려고 한다. 더 이상 내가 나를 무시하고 방치하지 않을 수 있게 노력하려 한다.
(p.72) 가까운 사람들의 상처를 함부로 재현하지 않는 것. 사람들의 고통을 이용하지 않는 것. 아는 척, 잘난 척, 내가 뭐라도 되는 척하지 않는 것.
(p.74) 나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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