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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 (집으로 돌아가는 멀고도 가까운 길,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의 표지 이미지

탕자의 귀향

헨리 나우웬 지음
포이에마 펴냄

1.신앙의 방황을하고 있을때
2.자녀 양육의 지침이 필요할 때
내 인생 최고의 책!! 주의사항(경고)
°신앙인 으로서의 자신의 민낯을 볼 자신이 없는 사람은 함부로 읽지 말것
°마음의 동요대로 따를 자신이 없다면 함부로 읽지 말것
°거룩한 죄책감과 고뇌에 빠질 자신이 있는 사람만 읽을것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읽을것
*그러나 모든 신앙인이 읽기를 바람
(특히 열심히 순종하며 따랐노라 하는 자)

헨리 나우웬은 국제적인 강사,교수 (노트르담다,예일대,
하버드대), 성직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과 인간의 마음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노력했으며, 자신의 아픔과 상처,불안과 염려,기쁨과 우정을 여과없이 보여줌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와, 감동을 준 상처입은 치유자 이다.
'탕장의 귀향'은 누가복음 15장11절~~ 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의 얘기로써 이내용을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이다.
(렘브란트는 빛과 어둠으로 만들어낸 깊숙한 공간감에 탁월
하며 그 안에서 부각되는 모델의 표정들을 너무도 현실적
으로 표현함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담고있다.) 헨리나우웬이
이 그림을(포스터)보고 영적 고뇌에 빠진 상태에서 큰 영감을 얻으면서 쓴,두 아들과, 그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신앙의 영적 3단계를 보여주는 훌륭한 신앙 안내서 이며, 가정에서의 부모의 위치와 역할을 보여주는 아주좋은 자녀 양육서이다.

-<탕자의 귀향>을 처음 봤을때, 저는 미국 전역을 누비는 고단한 순회강연을 마치고 막 돌아왔을 즈음이었습니다.
죽을 만큼 피곤했습니다. 불안하고,외롭고,초조하고,말할 수 없을 만큼 갈급했습니다. 엄마 치마폭에 매달려 엉엉 울고 싶었습니다. 정서적이고 신체적인 안식을 약속하는 유혹의 목소리가 들릴때 마다 여지 없이 무너지곤 했습니다.우연히 렘브란트의 '탕자'와 처음 맞닥뜨렸을 무렵, 내 심장이 쿵쾅 거렸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부드럽게 끌어안고 토닥여주는 그 그림은 당시 고된 행군을 마치고 돌아온 내가 바라는 모든
걸 함축해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사실 나야말로 기나긴 떠돌이 생활에 완전히 탈진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포근한 품에 안기고 싶었습니다. 무엇에도 신경쓰지 않고 쉴 집을 애타게 찾고 있었습니다.'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지난날
의 내 모습인 동시에 장래의 소망이기도 했습니다.
-본문 중-

처음의 시작은 이렇게 우리가 많이 들었던 탕자의 비유에서 처럼 헨리도 집나간 둘째아들 탕자가 자기라고 생각했으며, 이제는 모든걸(명예, 관심, 인정받는것) 내려놓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 겠다고 생각 했지만, 그는 '탕자'의 원작을
본 뒤로는 그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하고,우리에게 일깨워
주지 못한 부분을 깨닫고 일깨워 준다. 자신은 집나간 둘째
아들인 탕자였으며, 지금은 첫째 아들인 집에서 온전히 부모
의 뜻을 받들며 순종한, 책임감에 짓눌려 감히 탕자 처럼 뛰쳐 나가지도 못하는 불만과, 불평이 가득한 아들에 더 가까우며
(교수로서 유명 강사로서 대접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어
하는 자신의 마음), 이제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와 성숙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두 팔을 벌려 집나간 탕자를 한없이 기다리는 아버지가 되라고 하심을 깨닫는다.

-자유와 행복을 찾아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달라하며, 행복을 찾아 집을 떠났다가 먼 지방에서 방탕하게 살다 길을 잃은 작은아들뿐만 아니라 고향에 머물던 아들 역시 방황하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겉으로는 어른이 시키는 일을 성실하게 잘해낸 착한 아들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아버지
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부친을 잘 섬기고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며 주어진 책임을 다했지만 큰아들은 날이 갈수록 불행하고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탐욕스러운 작은아들보다 이 냉혹하고 원망과 분노에 차 있는 남자와 더 비슷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맏아들에게는 부모의 기대에 맞추어 살며 그 뜻을 잘 따르고 효도하는 자식이라는 소릴 듣고 싶어 하는 특유의 욕구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설정한 의제에 순응해서 거기에
합당한 일들만 골라 하면서 한쪽 구석에서는 어째서 탕자처럼 '달아날' 용기를 내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큰아들의 상실감과 작은아들의 방황의 삶, 둘 다 치유와 용서가 필요했
습니다. 둘 다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둘 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용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회심을 찾자면 아무래도 집에 머물고 있는 이가 돌이키는 경우를 꼽아야 할 겁니다. - 본문 중-

한두 가지도 따라해볼 엄두 조차 내지 못하는 까닭? 무엇일까?
나도 탕자의 귀향에서 저자처럼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부당하다 생각 했으면서 왜? 내 자신이 큰아들이라는 생각을 못했을까? 집에 머물면서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놓고, 의무가, 책임이 너무 막중하다고 징징 거렸다. 모든, 쫌 믿음 생활 했다는 신앙인들은 그럴 것이다. 내게 주어진 많은 임무 (구역장,지역장,봉사부서),책임감과(새신자를 챙겨야 하고, 나이드신 분들을 섬겨야하고),무조건 순종하고 따르라는 교역자 사이에서 내 믿음을 지키기란 여간 힘든게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난 과감하게 핑계를 대고 내 사명과 의무를 놓아버리고 요나처럼 외면하고 도망쳐 버렸다. 탕자처럼 집을 나갈 용기는 없어서 집 안에서 나름 변명을 하고, 투덜거리며 파업을 하고 있다. 직분도 봉사도 모두 모르는 척, 다시 초신자
로 돌아가 한없이 사랑을 받고만 싶어졌다. 마리아와 마르다
에서 내 모습이 마르다 인듯 하였다. 너무도 분주해 지쳐버린 마르다. 예수님 옆에서 열심히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 말씀 경청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분주하고 바쁘게 일하는 마르다, 스스로 일할것을 선택했음에도 불평과,불만으로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마리아를 질책하는 마르다~~ 예수님은 얘, 놓아두라고 각자 좋은것을 하는게 마땅하다 하신다.

교회에는 마리아와같이 말씀을 듣는 (초신자) 자도 필요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마르다와 같은(신앙의 연도가 오랜)신앙인도 필요하다. 신앙의 연륜에 따라 향상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언제나 초신자에 머무를 수 없으며 한층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서 초신자들을 보듬고 섬기며,세상가운데 나가서 두팔 벌려 그 사랑을 전해야 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그게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안다.
그렇기에 아직 초신자에 머물러 사랑을 받기만을 바란다.
헨리도 그렇다고 고백을 한다. 이제 아들의 자리에서 벗어나 한단계 더 올라가 아버지의 자리에 앉으라는 말씀에 두렵고 자신 없어 한다.

-내속에 큰 아들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았다. 숨길수록 내면의 큰아들이 불쑥불쑥 튀어 나왔다.
신앙의 연도가 깊어갈수록 큰아들의 마음을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사는것, 아버지라는 이름에. 그러나 곁길로 나간 작은아들
이나, 성을 내는 큰아들이 되는 쪽이 훨씬 편해보입니다.
-본문 중-
그러면서도 이렇게 고백 한다.
-청춘은 흘러갔으며, 여전히 어린아이의 장난감을 만지작
거리는 것은 스스로 노쇠했고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는 진실을 덮으려는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성인으로서 주어진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동시에, 오직 삶의 여정 속에서 다치고 깨진 이들을 반가이 환영하며 잘잘못을 따지거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데서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온다는 사실을 과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본문 중-
(모두다 초신자로 사랑 받기만을 바란다면 누가 세상가운데 나가 두팔 벌려 안아줄 것이냐고.)

그러나 그 두 아들은 다 우리들 이었으며, 하나님 이셨다. 한 없이 철부지로 방황하는 작은 아들도 조금은 성숙해졌다고 의무를 다하며 힘들어 하는 큰아들도 다 우리의 모습이며 예수님의 모습 이었다고 한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와 동등됨을 취하셔서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지친 젊은이의 얼굴에서 아기 예수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저 쇠약한 청년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사람들과 같이 " (빌2:6-7) 되신 분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버지가 맡기신 것을 죄다 팔아치웠습니다. 차츰 내가 소유한 아들의 신분과 그리스도가 가진 아들의 지위가 하나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내가 고향을 다시 찾아가는 것과 예수님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내 집과 주님의 집이 하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기쁨을 힘닿는 데까지 '훔쳐다가' 남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이 쳐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두려울 만큼 어둠이 짙을 때도 빛을 선택하고,죽음의 세력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데도 생명을 선택하며, 거짓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도 진리를 택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어둠은 언젠가 깨끗이 사라질 거라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슬픔을 모두 없애주시지는 않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복판에 하나님이 기쁨을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기쁨의 나라에 속한 자녀들이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주십니다.

-아들의 신분을 되찾았으면 이제는 아버지의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금은 용서하고, 화해하고, 치유하고,잔칫상을 내미는 두 손이 바로 내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비록 지금은 작은아들인 동시에 큰아들의 처지이지만 한없이 그 모습에 머물러서는안 되며 아버지처럼 되어야 합니다. 어떤 아버지와 어머니도 아들딸 시절을 거치지 않고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힘들고 외로운 과정을 밟아야 하지만, 영적인 여정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본 문 중-

교회에는 세상에는 더이상 작은아들이나 큰아들이 더 필요하지 않으며, 회심하고 돌아왔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고, 이제 늘 손을 내민 체 살며 한시바삐 아이들이 돌아와서 그 어깨에 손을 내려놓고 쉬기를 학수고대하는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아이가 성장하면 어른이되고 부모가 되듯이 올바른 신앙이니 되는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피할수 없는 관문이다. 언제나 피터팬으로, 키덜트족으로 살 수 만은 없으니. 이제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자신이 없다. 자신이 없다.
다시 집을 뛰쳐나가는 탕자가 되거나, 집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큰아들로 돌아갈 것 만 같아 자신이 없어진다. 그런 우리에게 나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부모의 단계를 갈 수 있는 지 가르쳐 주셨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처럼 될 수 있까?-
누가복음 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우리도 그분처럼 되어서 자신이 받은 그대로 다른 이들에게 거룩한 자비를 베풀도록 초청하라 하십니다. 아들로서, 상속자로서, 후계자로서 권한과 의무를 통째로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슬픔과, 용서,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을 말씀 하십니다.

°첫번째 방법은 거룩한 자녀들이 벌이고 있는 엄청난 탈선 행위를 하나님의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절절한 슬픔에 눈물을 쏟으며 울부짖으라 하십니다.
°두번째 방법은 끊임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용서한다는 건 힘들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조건적 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17:4)
°세번째 방법은 너그러움 마음을 품는 겁니다. 떠나가는 아들이 요구하는 대로 모든것을 다 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며 온갖 선물을 퍼부었습니다. 자신을 준다는 것은 훈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저절로 생기는 품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쪽으로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옮겨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본문 중-

헨리는 두렵고 떨리며 힘들지만 이렇게 한 걸음씩 내디뎌 아버지의 자리로 옮겨 가겠노라 고백한다. 나 또한 이제까지 권리만 행사하려하고 의무는 피해갔던 제게 크나큰 떨림과 울림을 받았다. 지금까지 신앙적으로 방황하며 헤매였던 이유를 찾았고 해답을 찾은듯 하다. 아직은 두렵고 떨리고 자신이 없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았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함을.

*이책을 읽으며 신앙에 있어서 많은 위안과 깨닫게 된 것도 많지만 지금의 내 위치에서
(사춘기의 자녀를 키우는 입장) 좋은 양육 지침서로 활용해도 손색이 없다.

《자녀 양육 지침》
1.비교하지 않는다.
탕자의 아버지는 큰아들과 작은 아들을 비교하지 않고 서로의 있는 성향 그대로를 받아들 였다. 각자 걸어온 삶의 여정대로 온전한 사랑을 쏟았다 작은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자 즉각적
으로 잔치를 열었으며, 큰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걸 보고는 뛰어 나가 반기며 함께 어울려 그 기쁨을 마음껏 누리자고 초대해 그 마음의 서운함을 달래 주었다.
2.각자의 특성을 인정한다.
아버지는 아들들의 저마다 가진 각자의 독특한 은사와 부족한 점들도 꿰고 있었다. 큰아들은 소심하고 열정이 부족해서 생동감이 모자라는 것이 아쉽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큰아들에게 잣대를 들이대지 않은 것처럼 작은 아들에게도 낫고 못함을 가리거나 더하고 덜함을 재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두 아들이 가진 독특한 특성에 맞추어 반응했다.
큰아들에는 그가 집에서 만족감을 느낄수 있도록 집안 일을 담당하게 했으며, 활동적이고 모험심이 강하고 열정적인 둘째는 그의 뜻대로 세상을경험하게 해주었다.
3.강요하지 않는다.
작은아들이 방탕하고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올 줄 알면서도 그를 강압적으로 제재하지를 않았다. 아무리 얘기를 해봐야 스스로 경험하고, 깨닫고 느끼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큰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불평 불만에도 자신이 얼마나 큰 아들을 사랑하는지를 알아주기를, 또한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4.기다려준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집을 나갔을때 그가 스스로 깨닫고 돌아올때까지 문밖에서, 늘 그자리에서 한없이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아들이든 큰아들이든 기대하는 건 단 하나, 집으로 돌아오는 것 뿐.
5.비난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큰아들이 거칠고 모질게 대들어도 비난 섞인 꾸지람으로 맞서지 않았다. 되받아 치지도, 잘못을 꼬집는 법도 없었다. 아들의 비난에도 변명하지 않았을뿐더러 큰아들의 처신을 비판하지도 않았다. 모든 평가를 단숨에 뛰어넘어 곧바로 친밀한 관계를 강조 했다."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무조건 적인 사랑을 여실히 보여주 었다. 작은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 왔을 때도, 질책이나,꾸지람이나, 그어떤 경위도 묻지 않고 즉각적으로 반기며 기뻐하고 잔치를 벌였다.
6온전한 사랑을 쏟는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한없이 사랑하므로 강요 하지도 ,속박 하지도, 밀어 붙이지도 ,끌어당기지도 않았다. 그 사랑을 거부하든지 아니면 집으로 돌아오든지 선택할 자유를 주었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끝을 알 수 없는 사랑이었다 온전한 사랑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자녀들이 자유로워 지기를, 자유로이 사랑하기를 바랄뿐이다. 아버지는 집에 팔짱을 끼고 앉은 채,자식이 돌아와서 탈선행위를 사죄하고,용서를 청하며,
앞으로 잘 살겠다고 약속해 주기를 기다리는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집 밖으로 찾아다니고, 위엄 따위는 내팽겨치고 달려나갔다. 사과나 개과천선을 약속하는 말에 집착하지 않았다. 잔치상을 떡 벌어지게 차려놓고 손을 잡아끌었을 뿐이다.
7.스스로 선택하게 한다.
탕자의 비유는 해피엔딩으로끝나지 않았다. 선택의 몫은 오직 두아들에게 넘겼다. 작은 아들이 잔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큰아들이 동생의 잔치에 참여했는지, 모든것을 용서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들였는지 알 수 없다. 그 판단과 선택은 누구도 해줄 수 없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본인의 몫임을
8.부모로써 신뢰를 주어야 한다.
집나간 탕자가 집으로 돌아 올 수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자기를 받아줄 거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책망과 질책과 꾸짖기만하는 아버지가 있는 집이라면 결코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언제나 문밖에서 두 팔 벌려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신뢰가 있었기에 감히 돌아갈 용기를 낸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아버지가 계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나를 끌어안고 따뜻하게 품어주실 하나님 아버지.
헨리는 주님은 그 품안에 안긴 자녀들을 하나하나 특별하고 온전하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라고 말한다.
탕자의 비유는 나를 만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찾아다니는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죽음의 권세에 의지하지 말고 그토록 소원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거룩한 팔에 몸 맡기라고 하나님이 권면하고 간청하고 사정하신다고.

아들이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 아버지는 끝까지 신실함을 보여주신다.끝까지 우리에게 아비 노릇을 해주시겠
다는 '하나님 의'. 하니님의 의는 항상 자비를 베푸 심으로 자녀인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유도 하신다. 김세윤 교수의 저서 '주기도문 강해'에 보면 탕자의 비유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탕자는 아담이며, 아담은 바로 우리를 뜻한다. 아담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에
게서 위임받은 땅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런데 탕자가 아버지
에게 자기 분깃을 달라고 요구하여 아버지를 떠났듯이 아담은 자기스스로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사단의 말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초월과 전능함으로 부터 분리를 택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려 자기 주장을 선언 했다. 자기의 내재 자원에 갇혀 버린 것이다. 창조주의 전능하심, 전지하심, 영원하심, 무소 부재하심에 참여하지 못하고 시간적,장소적, 제한에 갇힌 것이다. 결핍 인 것이다. 탕자의 귀향은 곧 우리로 하여금 아담적 운명을 극복해서 다시 한번 창조주와 연합 되는것을 의미한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의 능력안에 거하듯이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통치속에 거함으로 우리 내재 자원의 가난함에서 해방되어 창조주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무한함을 덧입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이것이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든 이유이다. 이제는 방황을 끝내고 돌아가야 할 때인것 같다. 더이상 대답을 미룰 수 없을것 같다. 내 영혼은 매우 지치고 곤하여 더이상 떠돌기에는 모든걸 소진했다. 이제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 할 때임을.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 하나님께서 묻고 기다리고 계신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시고 다만 축복하고 용서해줄 아버지 께로의 "귀향" 말이다.
👍 일상의 재미를 원할 때 추천!
2018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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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방

@bimileuibang

사람에겐 누구나 이야기가 있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사는데 어떻게 아무 이야기가 없을 수 있을까. 하루를 살았어도 숨을 쉬었고, 밥을 먹었고, 웃었고, 울었고, 신체를 통한 감각을 느꼈다. 그런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냥 왔다 그냥 가는 인생은 없다. 그러니 악인인들 이야기가 없을까. 그 또한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이야기는 있다. 그런데 왜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말이 위험하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이 궁금해 이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는데 간혹 전문지식이 필요한 부분들이 더러 있어 이해력(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다소 어려웠다.

'내가 알고 있는바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말은 악인의 행동에 문학적 이야기를 입혀 대중을 호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미디어에서 종종 써먹는 범법자에게 스토리를 입혀(어릴 적 불우한 환경 등등) 대중들로 하여금 그를 연민의 마음을 갖게 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것으로는 카메라 앞에 선 그의 외모(걸치고 두른 옷과, 모자, 등)에 스토리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대기업 오너가 들어 검찰에 출두할 때 흔이 이용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이렇게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다. '악인'의 기준과 악행의 기준을 묻고, 여러 방면에서 그것을 조명한다.
한마디로 '악'이라는 것은 사람이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세상에 완전하고, 무죄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대중에게는 악한 살인마이지만, 자신의 자녀에게는 좋은 부모로 불리고. 나에게는 악한 사람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선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는 이해가 가고 수긍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문학, 예술매체이다.

문학과 예술에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것은 적용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 이유를 소설, 에세이, 영화, 연극, 웹툰을 통해 얘기한다. 사회의 범죄자는 현행법으로 악인을 판결할 수 있지만, 문학과 예술에서는 동등한 이야기로 '악'을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요즘 특히 드라마, 영화, 웹툰이 너무 악인을 정당화시킨다는 비난에 대해 다소 억울함? 을 호소한다.
각기 다른 분야 9명의 저자들이 들려주는 악인의 서사에 가장 공감 가는 글은 듀나가 쓴 글이다.(가장 쉽게 공감이 된다.)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이 책을 대변하듯 장강명 작가가 다른 곳에 쓴 글이 이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도움이 되었지 완전히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구호가 그렇듯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요구는 어떤 맥락에서는 적절하지만 어떤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이 간명한 슬로건은 당초 현실의 잔혹 범죄와 이를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를 규탄하기 위해 대두됐지만, 머잖아 창작 서사 전체를 아우르는 원칙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
김지운 편집자의 분석에 따르면 ‘악인의 서사 자체를 비윤리와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이 널리 '확산’되어 이제 ‘대중화된 통설로 자리매김했다.
생각하는 첫째 부조리는 ‘서사 없이 어떤 인간이 악인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를 서사로 이해하는 동물이며, 서사 정보 없이 도덕적 판단은 불가능하다. 즉 어떤 사람을 악인이라고 규정할 때 우리는 그에 대해 이미 서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요구는 어떤 인간에 대한 이해를 어느 지점에서 멈추겠다, 그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끝났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서사 예술이 수용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오히려 그런 태도의 반대 지점에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도끼 살인마이고, 안나 카레니나와 마담 보바리는 간통을 저질렀고, 히스클리프는 스토커, 뫼르소는 묻지 마 살인범인데 우리는 그들의 서사를 읽으며 도덕적 판단이 흔들리거나 최소한 악인의 고통에 공감하게 돼 당혹스러워한다.
그 사실이 둘째 부조리로 이어진다. 인류사에는 한 개인의 광증이나 직업 범죄자의 탐욕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거대한 악행이 있어 왔다. 성전(聖戰)이라고 하는 끔찍한 집단 학살을 저지른 자들은 예외 없이 자신들이 정의를 수행한다고 여겼다. 상대를 악인으로 묘사하는 얄팍한 서사를 굳게 믿었기에, 그 이상의 서사를 들으려 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악인을 처단하기 위해 악행을 반복하는 지독한 아이러니는 작은 규모로도 흔히 일어난다. 어느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특정 멤버를 괴롭힌 것 같다는 심증으로 전 국민이 그 청년들을 괴롭힌다. 자신의 도덕적 판단을 굳게 믿을수록 더 잔인해진다. 호모사피엔스가 흔히 빠지는 함정이다. 나는 그보다는 늘 흔들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타인을 쉽게 악마화하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문학을 읽는다. 그런 의미에서는 서사 없는 악인을 시원하게 응징하는 복수극이야말로 가장 ‘비윤리적인’ 픽션 아닐까 싶다.
선정적인 범죄 보도가 낳을 수 있는 피해가 있다. 악인을 평범한 사람보다 더 자유롭고 더 유능한 것으로 묘사하며 악행을 매혹적으로 그리는 창작물도 있다(그런데 화려한 스포츠카가 등장하는 갱스터 랩뮤직비디오에서 알 수 있듯 비서 사적 요소도 그런 선망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그런 선정성과 도덕적 무감각을 극복하기 위해 타인의 서사를 막자는 발상은 상투적 범죄물 속 악인의 초상만큼이나 얄팍하다. 그리고 위험하다."

그러고 보면 홍길동은 대도이고, 임꺽정은 산적, 장보고는 해적이다. 우리는 이들을 악인이라 하지 않는다. 영웅, 의적, 호걸, 위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요즘 미디어가 좀 심하게 악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경종이 될지, 모방이 될지 선택 또한 개인의 몫으로 두어야 하는 건가?... 역시 어렵다.

"이런 세계에서ㅓ 우리는 창작물의 악역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악역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라는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하지만 서사를 주지 않고 악역을 최대한 단순히 만들어도 누군가는 결국 그 악당을 옹호할 핑계를 찾아내 제멋대로 서사를 덕분일 것이다.
하나의 완벽한 해답은 없을 것이고 아마 우리는 매 창작마다 새로운 전투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영화는 영화일 뿐,' '소설은 소설일 뿐' 같은 말은 거짓말이다. 어느 작가가 세상을 향해 한마디라도 던졌다면 우리는 그 말의 여파로 세상이 꿈틀거릴 것을 각오해야 한다. ( 듀나 본문 중)"

나는 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선과 악을 판결할 권한 또한 나에게는 없다. 다만, 지금 세상의 문화를 정치를 사회를 올바른 시각으로 볼 수 있고, 좋은 책을, 영화를, 드라마를 고를 수 있는 안목과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고 책을 열심히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모든 작가님들 부탁드립니다.

"악이라는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재현하는 서사는 '앎'의 서사를 쌓아 올린다. 앎의 서사는 달리 보는 눈을 통해 구체화된다. 달리 보기 위해 작가들은 많은 눈으로 보고나 다른 거리에서 본다.
악은 가해의 끝이 아니라 피해의 시작이다." (박혜진 본문 중)

악인의 서사

듀나 지음
돌고래 펴냄

👍 일상의 재미를 원할 때 추천!
2023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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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방

@bimileuibang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상대도 자신을 좋아해 주면,
그것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지 않을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
(생략)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나는 그의 꽃이 되고 싶은데.
내가 아무리 그의 이름을 불러 주어도
그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되어주지 않는다.
짝사랑, 외사랑의 슬픔이다.

"어쨌든, 그날 밤, 리쯔웨이는 완곡하게 그녀의 고백을 거절했지만, 여전히 친구로서 그녀를 좋아했다. 교통사고가 있기 전까지 사실 그녀는 줄곧 힘들어했다. 심지어, 만약 이대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 번 생각하기도 했다. "

책 제목을 보고 편견을 가졌다. 아니 오독을 했다.
'상견녀?', '상간녀?' 제목이 웃긴다. 무슨 치정? 불륜 소설이려니 했다. 우연찮게 '너의 시간 속으로'라는 유튜브 Shorts 영상에서 전여빈의 엠펙 있는 연기에 과몰입 되어 무슨 드라마인지 궁금해 검색해 보았다.
대만 명작 想見你(너를 보고 싶어)를 리메이크한 드라마라고 한다. 극찬의 극찬이 넘쳐난다. 책으로도 나왔다기에 대만의 타임슬립은 어떤 식일까 하는 궁금증에 읽게 되었다.
처음의 기대는 청춘물 타임슬립 (기욤 뮈소) 정도로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역시 뻔한 청춘물에 타임슬립이군 하는 생각으로 1/3 지점을 지나는데 점점 빨려 들어간다. 어느새 장르가 바뀌었다. 상큼 발랄 로맨스에서 스릴 넘치는 추리 소설로 바뀌는 것 같더니 다시 애절하고 몽글몽글한 애정물에서 추리로 바뀐다.
로맨스와 추리를 왔다 갔다. 복잡한데 흥미롭고 재미있다.
2/3 지점을 넘어서는 거의 심장이 두근거기고 진땀이 난다. 이야기가 뻔하지 않았다.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왜 그리들 극찬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사랑은 늘 아프다.
단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관심과 사랑, 보살핌을 받고 싶어 했던 천윈루에게 나태주의 '풀꽃'을 읽어 주고 싶다.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내가 너를 좋아하고 있잖아. 한 번만 기회를 줘, 네게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줘."
천원루는 공허한 눈빛으로 모쥔제를 보면서, 잠시 주의가 흐트러졌다.
“이 세상에서 내가 누구보다 널 좋아해. 게다가 난 네가 필요하다고, 약속할게. 온 힘을 다해 널 즐겁게 해줄 거야. 사랑받는 게, 보살핌을 받는 게 어떤 건지 느끼게 해 줄게."

달콤함과 애절한 사랑이 돌고 돌아 서로에게 꽃이 되어준 황위쉬안과 리쯔웨이의 사랑이 중심이지만. 먼 곳만 바라보는 천윈루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선 모쥔제의 풀꽃 같은 사랑을 더 응원한다.

"그녀는 모쥔제를 바라보았다. 요즘 모쥔제는 계속 천윈루 곁에 있어주었다. 그는 항상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가 리쯔웨이는 아니었지만, 누군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주고, 진심으로 좋아해 준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세상 모든 연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상견니

지엔치펑 외 4명 지음
리플레이 펴냄

👍 외로울 때 추천!
2023년 9월 26일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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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방

@bimileuibang

나는, 사자도, 경찰도, 슈도, 선생도, 고슬링도 아니다. 이들처럼 독서 중독자가 되고 싶에 퇴짜를 맞으면서도 계속 모임에 지원을 하는 노마드이다. 독서광이 되고 싶어 이 책을 읽었는데 이들처럼 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나 노마드 처럼 계속 두들길 것이다. 퇴짜를 맞아도 매번 찾아가는 노마드 처럼, 포기하는 책이 많아도 또 사고, 빌리고, 선물 받아 읽을 것이다. 그럼 언제쯤 독서광이 될 것이다.

독서 초보자들에게 쉽게 독서의 재미를, 책 고르는 법, 도서관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학습만화 모드로 웃기고, 거칠고 단호하게 가르쳐 준다. 만화를 이렇게 진지하게 읽기는 처음이다.
푹 빠져서 단숨에 읽었단. 내가 아는 책, 가지고 있는 책, 읽은 책 얘기가 나오면 저절로 눈이 밝아져 아~~ 나도 좀 하는 군하는 자부심이 생긴다.

포인트 1.
웃기고 공감 가는 부분

독서 모임에서 절대로 꺼내서는 안되는 금기어(책, 저자)가 있다.
슈가 무심코 가져온 과자가 '마들렌'. 뒤늦게 후회하는 슈. 마들렌을 본 회원들의 반응이 웃음 포인트

슈: 여기가 다른 모임이었다면...
(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마들렌 장면
알아?
'아니'
'따뜻한 홍차에 찍어 먹는 마들렌
그걸 맛보는 순간 감미로운기쁨에
젖어 들며 예상치 못한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라" "그래? 난 앞으로
네가 떠오를 것 같은데")

그러나 이 모임에서 프루스트의 마들렌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지긋 지긋해", "거 지겨운 레퍼토리 좀 바꾸라고".... 따위의 비난은 차라리 괜찮은 편이지. 더 근원적으로...
'세상에는 많은 책이 있지만 독서 중독자라 해도 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은 소수일 뿐이다. 결국 살면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게 되는 일이 많은데, 독서 중독자들은 남아도는 독서력으로 그럭저럭, 아니 심도 있는 수준까지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유독 할 말 없는 책들이 있으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중 하나다.'

그래서 모임에선 어지간하면 꺼내지 않는 주제이지만.....이 중 누군가 참지 못하고 내뱉을 가능서도 배제할 순 없다.

*선생 : 참 착해. 회원 중 누군가 프루스트 현상을 이야기하면, 프로이트를 거론하며 흐름을 바꾸자. 프로이트가 없었다면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며.... 아니지!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만큼 할 말이 딱히 없는 책이잖아. 누군가 눈치 없이 그쪽으로 이야기를 몰아가면 마찬가지로 곤란해...

* 사자 : 생제르맹 귀족 동네를 드나드는 등장인물 스완 씨 이야기를 하다가 슬쩍 화제를 전환하는 거야.
"역시 축구는 파리 생제르맹이지!라고 말하면서..... 근데 다들 축알못이면 어쩌지? 아니, 그보다 난 살케 팬인데....

"고슬링: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해 뒀잖아. 완독한 것처럼, 마지막 권 최고의 문장이라며 인용을 하는 거지.
'작품이란, 그 책이 없다면 아마도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못 가려내고 말 것을, 독자에게 분산시키기 위해서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고는 볼 일 이 갑자기 생겼다며 자리를 먼저 뜨는 거야.. 치고 빠지는 전술..

이렇듯. 프루스트는 독충들에게도 힘겹다. ㅎㅎㅎ
솔직히 마들렌 얘기는 좀 지겹다. 나는 몇 년째 1권부터 4권을 도돌이표처럼 반복 중이며,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역시 책장에 고이 모셔두고 몇 년째 감상 중이다. ㅋㅋㅋ.

포인트 2.
헉, 이런 교향? 만화에도 뒤통수치는 반전이! 허를 찌른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이창현 지음
사계절 펴냄

👍 일상의 재미를 원할 때 추천!
2023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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